청산도_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 버린 하늘과, 아른 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 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릴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
십자가_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詩 감상] 허 영 숙 암울한 시대, 저항도 극복도 할 수 없는 현실과 자신의 무기력함, 마치 십자가를 진 듯 짓눌러 오는 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시인의 마음이 그러하듯 그 시절은 누구에게나 아픈 날들이었다. [낭송가] 최 현 숙 시마을 낭송작가협회 회원 한국시예술문화연구회장 공감시낭송아카데미원장
원대리 여자들_윤준경 강원도 원대리에는 집 나온 여자들이 살고 있다 등성이로 등성이로 뒷걸음쳐 누가 따라올세라 숨어 사는 게 분명하다 속세를 거부하는 흰 살결로 빛의 시스루를 걷어내는 미끈한 다리 일인칭의 독자적 진술을 거부하고 다만 숲이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되어 가슴과 가슴의 적당한 거리로 푸른 머리 향기롭게 날리고 있다 가는 허리 사이로 도시여자의 상념을 숨기고 자작자작 가슴 타는 소리도 모성애의 옥시토신도 잊은 듯 하늘 우러르는 충성의 몸짓만 고고하다 지금은 그들만의 설국에서 머리끝까지 하얀 광채로 발신인 없는 연하장을 띄울 것이니 굳센 병사의 몸에서도 한 소절 그리움의 별은 떠오를 것이므로 [시인] 윤 준 경 [詩 감상] 허 영 숙 원대리에 가면 자작나무 숲이 있다. 상념을 버리고 도망 온 하얀 살결을 가진 여자들이 모여 사는 숲처럼 그 숲에 들면 눈이 환하다. 자작나무 껍질은 편지지로도 쓰였다. 마치 떠나온 곳을 향해 안부라도 전하고 싶은 나무의 바람처럼, [낭송가] 최 경 애 시마을 낭송작가협회 회원 계간 《힐링문화》 편집국장 cwn-tv "시와 함께하는 문학이야기" 진행자
징_박정원 누가 나를 제대로 한방 먹여줬으면 좋겠다 피가 철철 흐르도록 퍼런 멍이 평생 지워지지 않도록 찡하게 맞았으면 좋겠다 상처가 깊을수록 은은한 소리를 낸다는데 멍울 진 가슴 한복판에 명중해야 멀리멀리 울려 퍼진다는데 오늘도 나는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서쪽 산 정수리로 망연히 붉은 징 하나를 넘기고야 만다 징채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제대로 한번 울어보지도 못하고 모가지로 매달린 채 녹슨 밥을 먹으면서 [시인] 박 정 원 [詩 감상] 허 영 숙 제대로 울지 못해 상처가 녹이 슬어가서 아픈, 그래서 누군가 제대로 두드려주어 실컷 울고 싶은 날들이 있다.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안으로 담고 있는 가슴을 누가 한번 제대로 울려주면 온 산을 후벼 파는 울음으로 울고 싶은 날이 있다. (허영숙/시인) [낭송가] 홍 성 례 시마을 낭송작가협회 회원 전국 재능시낭송대회 금상 숙대 평생교육원 강사
등_박일만 기대오는 온기가 넓다 인파에 쏠려 밀착돼 오는 편편한 뼈에서 피돌기가 살아난다 등도 맞대면 포옹보다 뜨겁다는 마주보며 찔러대는 삿대질보다 미쁘다는 이 어색한 풍경의 간격 치장으로 얼룩진 앞면보다야 뒷모습이 오히려 큰사람을 품고 있다 피를 잘 버무려 골고루 온기를 건네는 등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두 다리를 대신해 필사적으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사람과 사람의 등 비틀거리는 전철이 따뜻한 언덕을 만드는 낯설게 기대지만 의자보다 편안한 그대, 사람의 등 [詩 감상] 허 영 숙 시인 사람 많은 지하철을 타면 때론 상대의 등이 내 등에 밀착 될 때가 있다. 그의 체온이 나에게 건너온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등이지만 편안하다. 때로는 나도 누군가에게 등을 내주고 싶다. 기댈 언덕이 돼 주고 싶다. [낭송가] 박 태 서 시마을 낭송작가협회 부회장 재능시낭송대회 은상 서울교통공사 재직
전화_마종기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가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詩 감상]허 영 숙시인 안 받을 것을 알면서도 신호음으로 전달되는 내 그리움이 당신의 공간에 스며들기를, 소리의 눈으로라도 당신을 보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오늘도 나는 당신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를 당신의 공간속으로 전화를 건다. [낭송가] 조 정 숙 시마을 낭송작가협회 회원 청마유치환 전국시낭송대회 대상 김영랑 전국시낭송대회 대상
저녁이 다 오기 전에_고 영 아무도 찾지 않는 강가를 걸었다 바람을 업고 포도나무 반대편으로 몇 걸음 떼었더니 당신이 젖은 손을 흔들던 쪽에서 꽁지깃이 유난히 붉은, 푸른 머리를 가진 새가 날아올랐다 새들은 모두 푸른 영혼을 가졌을 거라고 그래서 하늘이 푸른 거라고 일렁이는 손으로 강물 위에 새를 그렸더니 금세 물결이 데려갔다 내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나는 포도나무에 필 꽃들을 기다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소식을 영영 기다릴 수밖에 없는 폐허의 심정으로 천천히 저녁을 걸었다 포도넝쿨은 왜 한사코 서쪽으로만 뻗어 가는지 포도밭에서 건너온 노을이 흐르는 강물을 다 건너가기 전에 포도나무도 모르는 포도나무의 배후가 되고 싶었다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배후가 되고 싶었다 [詩 감상]고 영시인 찬란했던 시간도 저녁이면 어둑해져서 하늘에도 강물에도 나무에도 침잠하는 내가 있다. 근원도 모를 어떤 그리움의 배후가 되어 저녁을 걷듯 누군가를 향해 한없이 걷는 내가 보인다 (허영숙/시인) [낭송가] 향 일 화 시마을 낭송협회 고문 《시와표현》 시부문 등단 빛고을 전국시낭송대회 대상
모든 그리운 것은 뒤쪽에 있다_ 양현근 아쉬움은 늘 한 발 늦게 오는지 대합실 기둥 뒤에 남겨진 배웅이 아프다 아닌 척 모르는 척 먼 산을 보고 있다 먼저 내밀지 못하는 안녕이란 얼마나 모진 것이냐 누구도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어쩌면 쉽게 올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기차가 왔던 길 만큼을 되돌아 떠난다 딱, 그 만큼의 거리를 두고 철길 근처의 낯익은 풍경에게도 다짐을 해두었다 그리운 것일수록 간격을 두면 넘치지 않는다고 침목과 침목사이에 두근거림을 묶어둔다 햇살은 덤불 속으로 숨어들고 레일을 따라 눈발이 빗겨들고 이 지상의 모든 서글픈 만남들이 그 이름을 캄캄하게 안아가야 하는 저녁 모든 그리운 것은 왜 뒤쪽에 있는지 보고 싶은 것은 왜 가슴 속에 바스락 소리를 숨겨놓고 있는 것인지 써레질이 끝난 저녁하늘에서는 순한 노을이 방금 떠나온 뒤쪽을 몇 번이고 돌아보고 있다 [詩 감상]양 현 근시인 허둥지둥 현실에 쫒기며 살다보면 무엇 때문에 사는 지도 잊고 살 때가 많다. 채워지지 않는 것들로 늘 가슴 속이 먹먹해져 올 때 그리운 이름들이 바스락거릴 때면 가끔은 뒤를 돌아 보라. 어쩌면 우리가 잊고 살아온 모든 것들 그리운 것들이 거기 있
민들레 우체국 _허영숙 바람이 햇살 소인을 찍어 편지를 띄웁니다 어떤 사연은 무거워서 강물에 내려놓고 또 어떤 사연은 두근거려 산비탈을 넘지 못합니다 그대가 꽃의 마음을 물어물어 편지 한 장 원한다면 어머니에게 보내는 안부는 장독대 근처에 놓아두겠습니다 아버지의 삽자루가 꽂혀 있는 논둑에도 내려놓겠습니다 먼데서 가끔 달을 볼지도 모를 누이의 뒤란도 노랗게 밝혀야겠지요 사랑은 마른 논에 논물 들 듯 천천히 적시는 것이라고 쓴 편지는 더 오래 더 먼 기슭까지 보냅니다 차마 전하지 못한 편지들은 누군가의 안부를 기다리는 이의 간절한 담벼락에 내려놓겠습니다 봄이 끝나기 전에 어느 눈 밝은 이가 꺼내보겠지요 누가 펴 봐도 노랗게 웃을 얼굴을 기억하며 홀씨 하나하나의 안부를 섬깁니다 [詩 감상] 허 영 숙 시인 사람들에게는 가끔씩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이 있다. 누이여도 좋고 어머니여도 좋고 때로는 말로는 차마 꺼낼 수 없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움이라고도 한다. 민들레는 바람의 소인을 찍어 씨앗을 곳곳마다 날려보내니 안부를 전하고자 하는 화자의 심정에 나의 그리움도 얹어 보낸다. 그 곳에 닿기를, 그리하여 눈 밝은 그가 한번쯤은 나를 떠올려주기를.. [시인] 허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