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챙이_이동순 우리는 버림받은 자식인가요, 어머니 오늘도 뙤약볕 내리쬐는 논바닥에 한 움큼 물 고인 곳을 그나마 물이라고 오르내리며 그게 마지막 헤엄인 줄은 몰랐지요 한많은 당신의 알보재기를, 어머니 왜 갈라진 강바닥에 뿌리셨어요 있는 듯 마는 듯 조금 물 고인 곳이 처음엔 우리들의 고향인줄 알았습니다 하기야 우리들 고향이란 별 것 있나요 하늘 아래 모든 늪이 내 집이지요 끊임 없이 세상은 균열되고 우리들의 작은 늪이 말라붙네요 날마다 황토물 속을 오르내리며 부글대는 거품만 삼켰답니다 아 숨이 가빠져요 어머니 물을 주세요 물을 주세요 헐떡이는 아가미를 축이고 싶어요 어찌해서 우리에겐 발이 없나요 아무리 소리쳐도 눈하나 꿈쩍 않는 저 무뚝뚝한 논두렁과 바위들의 냉담이 나는 미워요 우린 끝내 논바닥에서 죽어갔지만 누구 하나 우리를 거두지 않았어요 망종 무렵 농부가 물꼬를 틔우고 나서 맑은 여울은 가만히 다가왔습니다 여울이 깊은 잠을 흔들어 깨울 때 우리들 버림받아 굳어진 몸은 푸른 물위에 가비야이 떠서 아주 먼 곳으로 흘러갔습니다 [시인] 이 동 순 ·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_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시인] 김 영 랑 1903년 전남 강진(康津) 출생(1950년 별세). 본명은 윤식(允植) 1930년 박용철(朴龍喆)·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아름답고 음악적인 시어,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 시집으로 『영랑시집(永郞詩集)』 [詩 감상] 양 현 근 김영랑은 일제 강점시 순수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민족시인이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
사평역에서_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시인] 곽 재 구 1954년 광주광역시 출생 숭실대학교 대학원 졸업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로 등단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받들어 꽃』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창작 동화집 『아기참새 찌꾸』 『외눈박이 한세』 에세이 『
엇노리_최정신 무릎은 복숭아 속살이어야 한다 한사코 피마자기름 들고 내 무릎에 집착하던 당신, 짐짓 당신 무릎은 무명 치마 속 깊게 숨긴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그 감춤을 자꾸만 들춰 두들두들 손마디로 음 소거 자장가를 듣곤 했다 신여성 날개 꺾은 시살이는 삼실 비벼 길쌈 짓느라 피멍 가실 날 없었다는 무릎을 들려주던 밤, 싸락눈 쌓이던 소리 귓등에 아삼했다 삼실처럼 질긴 명이 되라고 윤달에 지은 베옷 한 벌 것도 말짱 헛소리, 육순 막 넘긴 해 말끔히 차려입고 목실로 이주했다 폐업한 생이 십수 년, 월수 찍듯 보름밤이면 매끈하고 둥근 무릎이 창틀에 걸터앉아 궁금을 염탐한다 고해(苦海)에 두고 간 나룻배가 못 미더워 노심초사 내려 본다 어쩐 일로 빛이 처연할까 슬픔의 문양은 둥글었을까 사사건건 엇박자 장단이나 맞추던 나는 이승 버린 후에도 맘 못 놓는 애물단지, 무사한 무릎 접어 안심 한 잔 진설할 기일이 달 포 남짓 남았다 *고려 가요의 하나로, 아버지의 사랑보다 어머니의 사랑이 더 크고 지극함을 낫과 호미에 비유하여 읊은 노래 [시인] 최 정 신 경기도 파주 출생 2004년 《문학세계》로 등단 시집 『구상나무에게 듣다』 동인시집 『시와 그리움
내가 바라는 세상_이기철 이 세상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꽃모종을 심는 일입니다 한 번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들이 길가에 피어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꽃을 제 마음대로 이름지어 부르게 하는 일입니다 아무에게도 이름 불려지지 않은 꽃이 혼자 눈시울 붉히면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그 꽃에 다가가 시처럼 따뜻한 이름을 그 꽃에 달아주는 일입니다 부리가 하얀 새가 와서 시의 이름을 단 꽃을 물고 하늘을 날아가면 그 새가 가는 쪽의 마을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마을도 꽃처럼 예쁜 이름을 처음으로 달게 되겠지요 그러고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꽃이 된 사람의 마음을 시로 읽는 일입니다 마을마다 살구꽃 같은 등불 오르고 식구들이 저녁상 가에 모여 앉아 꽃물 든 손으로 수저를 들 때 식구들의 이마에 환한 꽃빛이 비치는 것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어둠이 목화송이처럼 내려와 꽃들이 잎을 포개면 그날 밤 갓 시집 온 신부는 꽃처럼 아름다운 첫 아일 가질 것입니다 그러면 나 혼자 베갯모를 베고 그 소문을 화신처럼 듣는 일입니다 [시인] 이 기 철 1943년 경남 출생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영
꽃 떨어져 밟힐 때_김재진 꽃 떨어져 밟히는 그 짧은 사이 한 사람의 생애가 왔다가 간다. 바람은 몸 안에 새소리 하나 심어놓고 살구꽃 진 언덕을 남루뿐인 한 생애가 비틀거리며 올라가는 동안 시간은 잠깐 우물에 비친 바람소리 같다 내가 너를 안을 때 내 안의 우주가 미묘하게 떨리듯 꽃 한 송이 벌어질 때 하늘로 난 창문 하나 열리듯 너는 없지만 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울던 사람들이 눈물을 닦고 꽃 떨어져 밟히는 길을 손 모으며 걸어갈 때 자신을 쏜 암살자를 향해 합장하며 쓰러지던 마하트마 간디처럼 세상의 슬픔 속에 우린 따뜻한 미소 하나 심을 수가 있을까? [시인] 김 재 진 1976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등 [詩 감상] 양 현 근 짧은 봄날, 화르르 피었다 지는 봄꽃처럼 찰라에 왔다가 순간에 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 순간을 살아가면서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껴안는 경건한 의식이다. 그리고 온 우주를 통째로 짊어지는 일과 같다. 꽃 떨어져 밟히는 사이, 우리는 결코 부끄럽지 않은 견고한 미소 하나 가슴에 품을 수 있을까. [낭송가] 최 경 애 시마을 낭송작가협
쉘부르의 우산_조경희 미아삼거리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어디서 비를 피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 쉘부르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차창 너무 주유소 앞 우산 하나가 몸을 웅크린 채 비를 맞고 있다 한쪽 다리를 저는 청년이 다가가 우산이 되어준다 강물같이 흐르는 시간의 버스를 타고 기억 너머 흑백의 시간으로 거슬러 흐르다 보면 쉘부르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서 있고 젖은 내 어깨를 감싸며 우산을 받쳐주던, 사랑을 노래하던 쉘부르의 우산은 언제부턴가 슬픈 이별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쉘부르의 우산은 비를 맞으며 어둡고 차가운 시간 속으로 멀어져간다 버스는 정체되어 교차로에 멈춰서고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한 켠 젖은 추억의 영상을 떠올리듯 차창 밖 내리는 비의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다 신호등이 바뀌면서 차는 다시 속력을 내고 빗길을 달려간다 비 내리는 쉘부르의 통기타 가수는 목소리를 잃은 지 이미 오래이고 늙은 디제이도 세상을 떠나버렸다 팔아야 할 추억의 한 페이지조차 남아 있지 않은 우산장수 마저 골목에서 사라져버린 쉘부르엔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는다 잃어버린 우산을 어디에서도 찾을 길 없다 내리는 비를 향해 버스가 달리면 달릴수록 쉘부르는 점점 멀어져 가고 한 여
다시 꽃피는 아침-양현근 무서리 가득한 언덕을 지나 푸른 이파리의 한 시절이 눅눅한 어둠 걷어내며 저리 뜨겁게 돋아나요 낭창낭창한 목소리로 무딘 뿌리들 다짐하듯 반짝이고 있어요 이제 우리, 서로를 감싸 안은 낮은 어깨동무로 한 생애의 현기증을 반듯하게 건너가요 서두르지 말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그저 넉넉한 차림새로 새벽 새들의 지저귐과 꽃피는 날들의 이유를 함께 생각해요 나를 열어 그대를 받고 밤새도록 우리를 품어 저 산처럼 펄럭이면 너른 들판의 빈자리에는 금세 새벽 강물의 뒤척이는 소리로 가득하겠지요 첫, 사랑 같은 지극함이 들어차겠지요 한 시절 꽃피고 싶은 풍경이 저리도 환하게 경배하듯 밝아 와요 두 날개 바스락거리며 우리들의 배경에 안녕, 안녕, 반짝이는 햇살을 부려놓아요 지금은 별들이 서둘러 귀가하는 둥근 새벽 참말로 기쁜 우리들의 너른 벌판이거든요 깊은 산 너른 강을 휘돌아 풀꽃 향기 터지는 푸른 아침이거든요 [시인] 양 현 근 1998년 『창조문학』 등단 시집 『수채화로 사는 날』 『안부가 그리운 날』 『길은 그리움 쪽으로 눕는다』 『기다림 근처』 등 2009년 『시선』작품상 수상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받음 [詩 감상] 양 현
여승(女僧)_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시인] 백 석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필명은 백석(白石)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1996년 사망)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 《통영》 《고향》 《북방에서》 《적막강산》 등을 발표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로 문학활동 시작 시집 『사슴』 등 [詩 감상] 양 현 근 일제 강점기 여승이 된 슬픈 여인(민중)의 아픔이 배어있는 시다. 평안도 어느 깊은 산 작은 금광(금점판)에서 옥수수를 팔던 여인이 여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 온다. 돈 벌러 나가서 십여 년 넘게 돌
멀리가는 물_도종환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한다. 이미 더렵혀진 물이나 썩을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식은 체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길을 가지 않는가. 때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가는 물이 있지 않은가. [시인] 도 종 환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충남대 문학박사 1984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 『접시꽃 당신』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해인으로 가는 길』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 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모과』 『마지막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_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시인] 백 석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필명은 백석(白石)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1996년 사망)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 《통영》 《고향》 《북방에서》 《적막강산》 등을 발표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로 문학활동 시작 시집 『사슴』 등 [詩 감상] 양 현 근 백석은 1929년 평안북도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4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전문
월곶_배홍배 모두들 말이 없었다. 이따금 무거운 침묵위로 고깃배가 미끄러져 들어올 때마다 나는 출렁이는 작은 배들의 이마를 다독일 뿐 그 흔들림이 내게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저녁 해가 조심스럽게 비켜 가는 몸속 허물어질 것들을 소금 창고의 물새가 외로움에 가늘어진 말간 다리로 받쳐줄 때도 갯바람은 황폐한 그리움 밖으로만 불었다 돌아오지 않은 배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하나 둘 그리운 눈빛을 바다에 던지고 뒤늦게 귀항하는 배들이 물위에 뜨는 그 많은 흔적들을 어디까지 지울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 할 때도 나는 깨닫지 못했다, 아직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시인] 배 홍 배 1953년 전남 장흥 출생 2000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단단한 새』『바람의 색깔』, 산문집『추억으로 가는 간이역』 등 [詩 감상] 양 현 근 삶이란 고깃배가 말없이 궤적을 남기듯 뒷사람에게 발자국을 남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사람으로 누군가에게는 아픈 눈빛으로 추억되는 일일 것이다. 물새 떼의 가느다란 다리 사이로 바람이 분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빛도 가느다랗게 흔들리고 있다.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바람에 흔들
민들레 유산_장승규 지난 밤바람에 상경했을까 검정 보퉁이 하나를 끌어안은 민들레 흰 저고리 아파트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다. 이제 막 보퉁이 먼저 낯선 풍경 위에 내려놓더니 아직도 두리번거린다 형제들이 나누어 가졌을 보퉁이 안을 슬쩍 엿보았다 보잘것없이 작은 그 안에 얼마간 먹고 지낼 양식은 잊지 않고 넣었고 앞으로 크게 될 떡잎도 아주 작게 접어 두었고 노란 예쁜 꽃도 몇 송이나 들어 있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부디 높은 곳 찾으려고 하지 말거라 낮더라도 네 마음 편한 자리에서 뿌리내리고 살거라 마지막 말씀도 고이 접어 넣었다 민들레 흰 저고리는 돌아앉아 조용히 흔들리고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노란 꽃들은 둘러앉아 티 없이 수다 중이다 [시인] 장 승 규 경남 사천출생 한국외국어대학 영어과 졸업 2002년 《문학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이 그리운 날은』 『민들레 유산』 등 [詩 감상] 양 현 근 민들레는 세상 낮은 곳에 자리잡고 사는 다년생초의 일종이다. 우리나라 들판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으며, 노란 꽃봉우리를 피운다. 꽃이 지고나면 솜털모양의 깃이 나오는데, 바람을 타고 날아가서 널리 퍼지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자체 생명력과 번식력
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_이생진 시 읽는 건 아주 좋아 짧아서 좋아 그 즉시 맛이 나서 좋아 '나도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 하고 동정할 수 있어서 좋아 허망해도 좋고 쓸쓸하고 외롭고 춥고 배고파도 그 사람도 배고플 거라는 생각이 나서 좋아 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누가 찾아 올 것 같아서 좋아 시는 가난해서 좋아 시 쓰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해서 좋아 그 사람과 헤어진 뒤에도 시 속에 그 사람이 남아 있어서 좋아 시는 짧아서 좋아 배고파도 읽고 싶어서 좋아 시 속에서 만나자는 약속 시는 외로운 사람과의 약속 같아서 좋아 시를 읽어도 슬프고 외롭고 시를 읽어도 춥고 배고프고 그런데 시를 읽고 있으면 슬픔도 외로움도 다 숨어 버려서 좋아 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눈에 파묻힌 집에서 사는 것 같아서 좋아 시는 세월처럼 짧아서 좋아 [시인] 이 생 진 1929년 충남 서산 출생 1969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으로 『그리운 바다 城山浦』 『거문도』 『외로운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 『그리운 섬 우도에 가면』 『반 고흐, ‘너도 미쳐라’』 『산에 오는 이유』 『어머니의 숨비소리』 『오름에서 만난 제주』 『섬 사람들』 등 다수 1996년 윤동주 문학상
세월이 가면_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시인] 박 인 환 1946년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하였다. <남풍> <지하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비롯한 많은 영화평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세월이 가면>, <목마(木馬)와 숙녀> 등이 있다. [詩 감상] 양 현 근 박인환은 30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요절한 50년대, 모더니즘 계열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긴 이별을 예감이라도 하듯 시인은 이 시를 쓰기 전날, 그의 첫사랑 애인이 묻혀있던 망우리 공동묘지에 다녀왔다고 한다. 이별은 늘 아프게 마련이다. 미련도 남고 미움도 남는다. 애증이 교차하는 것이 곧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