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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행 칼럼]산티아고 순례길 여행 11일차 - 삶의 경계에서 선택한 길

벨로라도(Belorado)에서 산 주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까지

(조세금융신문=송민재)

 

새로운 것을 배우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자.

그리고 멋진 실수를 해보라.

실수는 자산이다.”

- 다니엘 핑크

 

 

여전히 비 오는 아침

벨로라도(Belorado)에서 산 주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까지 24km를 걸어가기로 정했다. 출발을 하려고 하니 어제 이어서 여전히 비가 온다. 우기라고 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더 비가 자주 오는 듯 하다.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춰 내려가니 다들 이미 자리에 앉아서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하면서 오늘 가야 할 길에 대한 자료를 살펴 본다.

오늘 걸어야 할 길에 대한 안내 책자 내용을 읽고 있으니 책자에 적힌 문구가 가슴에 들어온다.


길이 거기에 있기에 내가 그 길 위에 서 있다.’


 



 아침 식사를 하려고 모인 순례자들.

 


 1층에는 사무실이고 숙소는 2층부터 도미트리 형식으로 몇 개씩 나누어져 있다. 전날 들어왔던 큰 문은 잠겨 있고 아침에는 뒷문으로 나가야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정보: 벨로라도(Belorado)에서 산 주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까지>

벨로라도(Belorado)에서 산 주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까지는 24km 구간이다. 절반 정도 구간은 완만한 오르막이지만 그 후 5km 정도에 걸쳐 거위라는 뜻을 가진 Oca 산을 올라가야 한다. 지치기 쉬운 구간이기에 체력 관리를 잘해야 할 구간이기도 하다. 이미 열흘 넘게 걸어온 길 위에서의 생활은 길만 보이면 무심하게 걸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내가 길인지 길이 나인지도 모르게 항상 길 위에 서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 산티아고까지는 남아있는 거리와 시간이 있지만 어쩌면 끝까지 다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이 생기는 것도 이 때 쯤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걸어야 하는 구간이 발목 등을 다치게 할 수 있으니 익숙함 때문에 긴장감을 너무 내려놓지 않도록 하자.

 

 

 

 벨로라도(Belorado)가 마을 수준이 아니라 도시 규모라서 그런지 제법 걸어나와야 까미노 위에 다시 설 수 있다. 골목을 지나면서 담벽이나 건물벽에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는게 인상적이었다. 은은한 아침 빛과 함께 비에 젖은 도시는 고요함이 느껴진다.

   

 Tiron 강 위에 놓인 나무 다리이다. 이 다리를 넘어가면 다시 새로운 까미노가 시작된다.

  

 다리를 건너가서 보이는 안내판이다. 비오는 날씨에 맑은 날의 이 곳 사진을 보고 있으니 한 여름 까미노의 풍경이 궁금해진다.

 


 비가 조금씩 내렸는데 약간씩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혹시 맑은 날을 기대해 보지만 스페인의 날씨는 예측하기 힘들다.

 


 넓게 펼쳐진 목초지 사이로 길이 길게 이어진다. 길의 끝에서 파란 하늘이 열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어느 순간엔가 파란 하늘이 열려있다. 원래도 파란 하늘이 유난스러웠는데 비가 온 뒤라 더욱 맑게 보이는 하늘이다. 신비롭게 열리는 하늘을 보면 걷다 보니 다음 마을인 Tosantos에 도착한다.

 

 

 

Tosantos

마을 뒷편을 지나며 까미노 위에 다시 올라선다. 벨로라도에서 5km 정도 걸어오면 되는 거리에 있는 마을인데 규모가 크지 않은 마을이다. Bar El Castano에서 샌드위치를 판다고 해서 표시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갔었는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문을 열지 않았다. 할 수 없어 다시 마을 뒤쪽으로 와서 마을을 벗어난다.

이 곳은 성당 알베르게가 운영되는데 30여명이 머물 수 있다고 한다. 기부제이고 저녁 식사를 제공하는데 식사 후 원하는 사람은 기도회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Tosantos 정면 언덕에 성당이 있다고 하던데 마을을 접어들 때는 발견하지 못하고 나오면서 발견했다. 마지막 사진의 모습이 Virgen de la Pena 라고 하는 성당이다.


  

 

 Tosantos에서 2km를 정도 걸어가면 Villambistia라는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아래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성당이 San Esteban 성당이다. 훼손이 되긴 했지만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성당이라고 한다.



  

 Villambistia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문득 뒤를 돌아보니 걸어온 길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사람이 걸어온 길이 항상 아름다울 수 없는데 아득하게 걸어온 길의 느낌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Villambistia

규모가 크지 않은 마을이라 마을에 들어선지 얼마 안되어 마을을 벗어날 수 있다. 규모가 작은 마을이지만 시립 알베르게가 있다. 14명이 이용 가능한데 6유로 정도이다. 연중 무휴라고는 되어 있지만 겨울에는 확인할 필요가 있는 곳이다.

 



▲ 성당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다 허물어진 집과 현대식으로 지은 집이 공조하는 묘한 이질감을 맛볼 수 있다. 현대식 집 문 위에 인형 모양이 달려 있는게 재미있다.

 

 

 

 마을을 벗어나 들길을 걸어가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 다음 마을인 Espinosa del Camino가 나타난다. 1.6km 정도이니 모퉁이만 돌아서면 보이는 정도이다.

 


Espinosa del Camino

거리가 한적하다 못해 적막하다고 소개되어 있던데 정말 그렇다. 오래된 집의 형태가 그대로 느껴지는 마을인데 바로셀로나 출신의 은퇴한 노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로 인해 그나마 활기를 잃지 않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상점이 있고 마을 광장에 음료나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는 Bar가 있다. 알베르게는 2개가 있는데 Sr. Pepe가 운영하고 있는 알베르게 Campana에서는 17유로로 저녁과 조식을 포함한 숙박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마을의 끝에 도착하니 산티아고 532km, 오세브리오 378km, 레온 221km, 부르고스 43km, La Campana 0.0km 라고 적힌 표지판이 보이고 길이 다시 열린다.  La Campana 0.0km 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여기가 Sr. Pepe가 운영하는 알베르게 Campana인가 보다.

 

 

 

 Espinosa del Camino 마을을 벗어나니 다시 넓게 초원이 펼쳐진 길과 길을 걷는 우측 하늘이 열리는게 보인다.




 언덕을 넘어 다시 내리막 길을 가다보면 Vilafranca의 전신 Auca가 이슬람에 의해 파괴된 흔적으로 추정되는 곳을 볼 수 있다.

 

 

 Auca의 흔적을 지나 길을 따라 내려오면 큰 도로 위의 다리가 보이는데 까미노의 표시는 그 옆의 좁은 숲길을 가르킨다. 길을 따라오면 지역에 대한 소개 표지판과 작은 다리를 볼 수 있다.

 


Vilafranca Montes de Oca

1075년 알폰소 7세가 Auca가 있던 자리에 세운 마을이 Vilafranca 이다. 순례자를 위한 병원이 세워지자 그 주위로 마을이 생겨나 지금은 옛 학교 자리에 알베르게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14세기에 지어져서 지금은 완전히 복원된 병원 뒤 급경사를 따라 Montes de Oca로 오르게 된다. Montes de Oca는 중세 순례자들에게는 위험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떡깔나무 숲을 걸어가며 고독한 순례자의 느낌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초입에 Bar가 보인다. 들어가서 오렌지, 바나나, 샌드위치를 시켜서 먹고 있으니 까를로와 마르코도 들어와서 반갑다고 인사를 한다.

 

 

 식사 후 길을 나서니 호텔과 알베르게가 같이 있는 건물이 성당 옆에 있는게 보인다. 이 알베르게가 과거 순례자 병원을 개조한 곳이라고 한다. 5유로에서 45유로까지 방 형태에 따라 비용이 달라진다. 계속되는 순례에 지쳐 있다면 고급스러운 시설을 이용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성당을 지나 본격적으로 오르막에 들어가기 전에 내려다 본 모습.

  

 

 비가 살짝 뿌리다가 다시 하늘이 열리다가 다시 흐려지는 종잡을 수 없는 날씨와 함께  Montes de Oca를 넘어 간다. 아주 험한 산은 아니지만 지쳐 있는 순례자를 숨차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넓은 평야 길을 주로 걷다가 산 길을 걸으니 나름대로 순례자의 길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산을 거의 다 넘었는지 카이도스 기념비(Monumento de los Vaidos)가 보이기 시작한다. 카이도스 기념비는 1936~1939년 동안 있었던 스페인 내전의 전사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라고 한다.



   

 카이도스 기념비를 지나고 부터는 내리막과 넓은 숲길을 걸어간다. 군데 군데 돌을 모아서 하트 모양이나 부엔 까미노라고 모양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잘 못 디디면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 밭을 피해 조심스럽게 걸어가는데 나무 조각들을 전시해 놓은 곳을 발견했다. 사람은 없는데 조각들만 있는데다 소개 자료에 어디에도 설명이 없어서 왜 전시해 놓았는지 그 의미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조각의 모양이 순례자를 상징하는 모양이라 아마도 순례에 대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나무 조각들을 구경하다 길을 따라 가니 앞선 순례자들이 제법 보인 내리막 길이 이어지고 산 주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가 보이기 시작한다. 웬 동양 순례자가 우산을 쓰고 가기에 한국순례자인가 했는데 숙소에서는 지나 가버렸는지 만나지 못했는데, 몇 일 후에 같은 숙소에서 만나 인사를 하게 되어 알게 된 사실은 잇슨이라고 하는데 대만에서 왔다고 한다.

 


산 주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

1060년에 태어난 San JuanMonte de Oca에서 순례자들을 도우며 살다가 1163년에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시신을 그가 지었던 성당의 로마네스크식 경당에 안치했다고 한다. 1477년 이사벨 여왕이 이 곳을 순례하던 중 가뭄이 해갈되어 산 후안의 기적이라 여기고 성당에 오늘날과 같은 건물을 증축하도록 하면서 산 주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 마을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성당 입구에는 수태고지 장면을 새긴 조각이 있다. 성인이 지은 이 성당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찾으면 아이를 잉태하게 된다는 재미있는 전설도 함께 전해져 오는 곳이다.

수도원 옆에 알베르게가 있는데 7유로이다. Jose Maria 신부님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큰 홀에 매트리스를 깔고 자야 하고 신부님이 저녁에는 마늘 스프를 아침에는 밀크 커피를 준다고 했는데 도착해서 보니 철제 이층 침대가 놓아져 있었고 식사는 가져와서 배식 해 주는 방식이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 순례자들이 많아지면서 방법이 바뀐 것 같다.

원래는 오르테가에서 멈추지 않고 좀 더 멀리 가고자 했지만 아픈 다리로 더 멀리가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을 했다. 다음 날 부르고스까지 가야 하는데 오르테가에서 30km 정도를 걸으면서 정오까지는 도착해야 하니 단축하고 어쩔 수 없었다. 걸어가는 시간이 많이 걸리니 일찍 할 것 같다.

 

 

 

 현재 성당은 보수 공사 중이다. 성당의 모습과 성당 앞 모습이다.

 


 성당과 이어진 건물에 알베르게가 있고 이어져서 Bar도 있다.

  

 알베르게 1층 사무실 내부이다. 숙소는 2층에 있고 1층에는 사무실과 식당이 있다.

  

 숙소를 잡으면서 저녁식사를 예약했더니 시간이 되어서 받은 저녁 식사이다. 맛은 큰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은 정도였다. 오렌지와 떠먹는 요구르트를 주는 것이 순례자들의 영양을 많이 고려해 주는 듯 했다. 와인은 적당히 마시고 싶은 만큼 준다.

 

 


오늘의 일기

삶은 철저히 혼자라고 절실히 느낀다. 그리고 자그마한 자극과 고통에도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반복하며 삶이 이어지는 것은 인류의 생존과 맞닿아 있는 이유임을 깨닫는다.

언젠간 죽고 허무할텐데 이 많은 일들이 왜 필요한 것인지, 숱한 나날을 고민해 오지만 답을 찾을 수 있겠는가? 자그마한 고통 하나만 없어지면 모든 것이 해결 될 듯하다가도 금방 또 다른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 그냥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던가.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끊임없이 고민해 본다. 이렇게 걸어서 산다는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다면 땅 끝까지라도 걸어 갈 수 있을 텐데….


내려놓는다는 것이 욕심을 내려놓는다는 것인지 미련을 내려놓는다는 것인지 구별이 안된다. 하루하루 후회없이 보람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제와 똑 같은 오늘을 살며 내일은 달라지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시간들을 보내다가, 반복되는 어리석음에 마침표를 찍어보려 떠난 길이지만, 이 길이 끝나고 나면 과연 무엇인가 바뀌는게 있을지 기대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 계속되는 걸음 속에서 어제와는 조금씩 다른 의미를 느끼고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산티아고까지 삼분의 일이 지나간다. 여전히  다리가 아픈 상태이고, 내일 나을지 아님 계속 이러면서 가야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갈 수 있는데까지 가보자 다짐해 본다. 걷고 또 걷는 것이 삶과 닮아 있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한걸음 걸음 속에서 느끼고 깨달으며 삶에 대한 통찰이 함께 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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