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문화

[동아시아 자본의 빅데이터, 부여백제 여행]② 시간과 공간의 일반화 : 천문과 지도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에 하늘의 천문도(天文圖)와 땅의 지도(地圖)를 만들어서 자연을 이해하였다.

 

천문도는 하늘의 권위를 얻으려는 상징성이 강하였고, 지도는 인간의 생활에 이용할 수 있도록 실용성을 중시했다. 고대의 지도인‘마파문디’는 그리스, 로마시대에 기술했던 역사와 여행가들이 알려준 정보를 기록했다.

 

선사시대의 암각화는 믿음의 대상물이나 종교적인 성지에 정성을 바치는 표현으로 스스로 표현한 그림 앞에서 다양한 종교의식을 행하였다. 지리의 표현은 암각화, 동굴이나 무덤 벽화, 지도와 천문도의 순으로 발전하였다.

 

동아시아의 우주관인‘개천설’에 따르면 그 모습을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으로 표현하였다. 우주의 질서는‘하늘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돌고, 땅은 동서남북의 네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태양의 궤적은 농사의 시기와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그러나 시시각각 달라지는 태양과 다르게 북극성은 항상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나라 이후 북극성은 하늘의 중심이었고, 고대의 천문도와 고분벽화에도 북극성이 포함된 북두칠성을 천하의 중심으로 나타내고 있다. 암각화와 벽화는 지도가 없던 시절에 생활이나 환경을 표시하는 수단이었다.

 

고분 벽화인 고구려의 강서대묘의 천정은 하늘에 사는 비천, 선인 등을 표현하였다. 덕흥리 고분 벽화는 60여개의 별자리를 그리고, 은하수 사이에 견우와 직녀를 배치하였다.

 

 

 

지도를 표현한 울주암각화는 육지 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 면 등의 그림을 새겼다. 천문도인 덕흥리벽화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견우와 직녀를 표현하였다. 견우가 머리에 흰 모자를 쓰고 황색의 긴 옷을 입고 걸어가고 있다.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컨텐츠진흥원(KOCCA)

 

고대의 암각화는 평야에 홀로 솟은 산(별봉), 물과 가깝거나 볕이 잘 드는 동남쪽의 바위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의 암각화나 벽화에 등장하는 동물들 중에 과거에 존재했지만 소멸되었거나 현 지역에 존재하지 않는 동물들도 발견되고 있다. 몽골이나 시베리아의 그림에 맘모스, 코끼리, 기린, 사자 등이 나타나고 있다.

 

울주 반구대와 천전리 암각화는 사실적인 표현으로 그림과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표현하였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등이 있는데, 사슴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모습 등을 표현하였다.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는 지형 지세를 회화식 지도로 표현하였다. 산지는 산줄기를 겹쳐서 곡선미를 강조하고 있다.

 

근대까지 서구 세계에 한반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일본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큐슈와 인근 지역의 제한된 정보를 유럽에 제공하였다. 예수회 신부들도 조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고 일본에서 멀리 떨어진 섬나라 정도로 인식하였다.

 

 

 

 

한반도가 등장하는 최초의 서구 지도는 1513년 프란시스쿠 호드리게스(Francisco Rodrigues)가 번역한 자바인의 지도였다. 1554년 포르투갈의 로포 호멤이 그린 지도에 한반도로 인지할 수 있는 땅의 모습이 있고, 1561년 바르톨로메우 벨류(Bartolomeu Velho)가 해도에 한반도로 간주될 수 있는 반도를 그렸다. 포르투갈이 출판한‘수로지’에 조선을 북위 30도와 40도 사이에 그리면서 코리아(Corea)로 표기하였다.

 

중국은 상상적 세계지도인‘천하도’에 조선과 가상의 국가들을 수록하였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대동여지도의 서문인 지도유설은 고대 중국의 지도 제작 기원과 지도의 중요성을 밝히고, 진나라의 배수(裵秀)의 지도 제작 규범을 설명하고 있다. 배수의 기법은 원근의 실제가 분율에 의하여 정해지고, 도수의 실제가 고하, 방사, 우직에 의하여 계산되었다.

 

대동여지도는 1861년에 완성된 전국을 가로세로 39.5×29.5㎝ 크기의 도엽(도판) 120개 판에 나눠 새긴 다목적 목판 인쇄지도이다. 지도를 모두 펼치면 가로 약 3.8m, 세로 약 6.7m의 대형 전국지도가 된다. 고지도는 국토의 중심 산인 백두산을 강하게 강조하면서 산이 뻗어 내린 형태를 연맥(連脈)으로 표현하였고 산줄기를 용맥(龍脈)으로 인식하였다

 

고분벽화의 천문도에서 발전한 혼천전도는 원 안에 남반구와 북반구의 별을 집어 넣었다. 동국대지도는 대동여지도보다 먼저 제작된 지도로 표현방법이나 정확성이 뛰어나다. 그렇지만 후대에 제작된 대동여지도보다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도가 나타내는 영역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로 많은 논쟁들이 있어 왔다. 그렇지만 영토는 현재의 문제로 전쟁이나 조약에 의하지 않고 변경이 불가능하다. 지도는 조약 체결 과정에서 중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과, 경희대 경영학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영국 리버풀대 경영학석사(MBA), 서강대 경영학박사, 경희대 노화의학박사과정

•국민투자신탁 애널리스트, 동부증권 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배너

전문가 코너

더보기



[데스크칼럼] 관치금융의 덫에 걸린 농협금융
(조세금융신문=양학섭 편집국장) 최근 농협금융지주와 대주주인 농협중앙회가 NH투자증권 사장 인선을 놓고 갈등을 빚은 바 있다. 여기에 금감원까지 가세하면서 관치금융에 대한 논란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NH투자증권 정영채 사장의 연임 도전과 관련이 있다. 정 전 사장은 옵티머스 펀드 사태를 일으켜 금감원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은 장본인이다. 여기에다, 폐쇄적인 조직운영, 개인 사법리스크 등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6년간 장기 집권에 성공한 저력을 보였다. 그러나 증권사태가 범농협 차원의 규제 리스크로 확산되는 가운데 정영채 전 사장이 4연임에 도전하자, 대주주인 농협중앙회가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쟁점을 살펴보면, 농협중앙회는 이번에는 농협 출신 인사를 추천해 NH투자증권의 내부통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반면, 이석준 농협금융지주 회장은 자본시장 전문가를 앉혀야 한다고 반발하면서 농협중앙회와 마찰이 일어난 것이다. 전문성이 중요하다는 이석준 지주회장의 말도 일리가 있고, 범농협 차원의 리스크관리가 중요하다는 대주주의 판단도 일리가 있다. 참고로, 농협중앙회는 농협금융지주 지분 100%를 소유한 1인 최대 주주다. 문제는
[인터뷰] 임채수 서울지방세무사회장 권역별 회원 교육에 초점
(조세금융신문=이지한 기자) 임채수 서울지방세무사회장은 지난해 6월 총회 선임으로 회장직을 맡은 후 이제 취임 1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임 회장은 회원에게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지방회의 가장 큰 역할이라면서 서울 전역을 권역별로 구분해 인근 지역세무사회를 묶어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 회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올해 6월에 치러질 서울지방세무사회장 선거 이전에 관련 규정 개정으로 임기를 조정해 본회인 한국세무사회는 물론 다른 모든 지방세무사회와 임기를 맞춰야 한다는 견해도 밝혔다. 물론 임원의 임기 조정을 위해서는 규정 개정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임기 조정이라는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처음이라 주목받고 있다. 임채수 회장을 만나 지난 임기 중의 성과와 함께 앞으로 서울지방세무사회가 나아갈 길에 대해 들어봤다. Q. 회장님께서 국세청과 세무사로서의 길을 걸어오셨고 지난 1년 동안 서울지방세무사회장으로서 활약하셨는데 지금까지 삶의 여정을 소개해 주시죠. A. 저는 1957년에 경남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 그랬듯이 저도 가난한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때의 배고픈 기억에 지금도 밥을 남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