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불교의 세계는 인도를 중심으로 구산팔해(九山八海)로 이루어져 있다. 9산 8해는 1개의 3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구성하는 1수미세계(一須彌世界), 대지에 수미산(須彌山)을 포함한 아홉 대산(大山), 그 산들을 둘러싸고 있는 여덟 대해(大海)로 구성된다. 이러한 세계에서 사찰(寺刹)은 승려들이 모여서 불도를 수행하고 교법을 펴는 곳이다. 중국에서 승려들이 모여 사는 곳을 사원(寺院)이라고 하였다. 후대에 ‘사’는 절 전체를 가리키고 ‘원’은 ‘사’의 별사(別舍)로 사용하였으며, ‘암(庵)’은 산 속에 있는 작은 집 또는 토굴 등을 가리킨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중심으로 일반인들의 기도처인 사찰(寺刹), 국왕의 보호를 받는 왕찰(王刹), 사망한 국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로 구분한다. 진신사리와 적멸보궁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진신사리와 정골 100과를 가져와서 황룡사를 비롯한 사찰에 봉안했다. 우리나라에서 진신사리가 있는 적멸보궁은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및 치악산 법흥사에 있다. 진신사리가 석가모니의 형체이기 때문에 불상을 대신하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삼한시대에 각 읍락이 천신과 여러 부족의 지신을 함께 묶은 소도(蘇塗)로 통합되었다. 읍은 성으로 둘러쌓인 마을이고, 소도는 고대 유목민족의 신성한 지역을 상징했다. 사제인 천군(天君)이 소도에서 천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방울로 신을 호출하고 무아지경에서 제천의식을 집행했다. 주술과 제사가 태양과 자연을 지배하는 신령에게 풍요를 기원하면서 실시되었다. 이것이 문화와 종교의 특질을 갖는 제천 행사로 바뀌어서 국가의 안녕과 권위를 높였다. 풍년 기원의 제천행사 천군이 흙이나 나무로 성(城)이나 책(柵)을 쌓고 소도를 지배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상태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정치권력이 확고하지 못한 상태였다. 마한 54국 중에는 신소도국(臣蘇塗國)도 있었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에 소도를 편입했다. 제정일치의 사회였던 고조선(古朝鮮)도 군장(軍將)이 천군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의 신도(神道)도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의례, 무속과 자연 신앙에 기초하여 성립되었다. 소도와 신도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면서 인간과 부구분하고 하늘에 제천행사를 주관하는 지역이었다. 제천행사는 흉노족의 정월 춘제, 5월제, 그리고 가을제가 있었고,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유라시아는 아시아와 유럽이 연결된 거대한 지역으로 중위도 지역에 유럽대평원에서 시베리아평원에 이르는 거대한 초원(Steppe)을 형성하면서 유목문화의 발상지가 되었다. 초원지역은 서부(흑해 초원), 중부(카자흐 초원), 동부(신강, 몽골, 만주, 시베리아)로 구분된다. 초원문화, 유목문화, 수렵문화, 농경문화의 단일 구조 속에 서로 융합된 복합문화를 형성해 왔다. 흑해 초원의 지배자, 스키타이 흑해 초원(Pontic Steppe)은 몰도바,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부에 이르는 지역으로 고대 문명에서 스키타이(Skythai)의 활동무대였다. 스키타이는 사슴을 의미하는 스콜로토이(Skolotoi)에서 유래하며, 그리스인들은 ‘시메리안’ 또는 ‘스키타이’로 불렀다. 헤로도투스는 “정주하지 않고 수레로 자신의 집을 갖고 다닌다. 수렵생활을 하면서 가축을 치며 활을 쏘는데 능하다”고 기록했다. 소규모의 농경도 했지만 주변의 농경민들을 약탈하거나 공납으로 착취하면서 무사 정신, 전쟁 승리, 그리고 형제 관계를 중시했다. 스키타이는 농경 스키타이, 상공 스키타이, 유목 스키타이, 그리고 로열 스키타이의 4개 집단으로 사회를 구성했다. 스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시자(尸子)는 태(太)라는 원초적인 혼돈 상태에서 하늘과 땅 사이 공간을 ‘우(宇)’라 하고, 새롭게 오는 것을 ‘주(宙)’라 하여 추상적인 관념에서 우주(宇宙)가 탄생했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구체적인 형태로 변화되었고, 여기에 음양오행과 방위가 규칙을 부여하면서 사물에 대한 인식이나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동아시인들은 만물의 질서를 천원지방과 오행방위로 측정하고 사물을 인식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탄생, 우주와 천원지방 우주는 시간의 변화량을 측정할 때 근원적인 단위이며 물리적인 법칙이 존재하는 원자를 기본단위로 한다. 원자는 연속적이고 지수함수적인 비트(bit) 단위의 전자(electron)와 불연속적이고 다항함수적인 큐비트(cubit) 단위의 양자(quantum)를 포함하고 있다. 가장 가벼운 원자인 수소에서 헬륨, 헬륨에서 탄소로 변하는 핵융합에서 다양한 물질이 생성된다. 별은 수소 원자에서 시작하여 자체 핵융합으로 점점 커져서 적색 거성이 되고, 내부의 핵연료를 소모하면서 응축되어 성운(planetary nebula)으로 변한다. 성운의 원자핵이 서로 부딪치고 외곽이 전자로 덮이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플리트비체(Plitvička jezera)는 크로아티아의 국립공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진 곳으로 수많은 폭포로 이루어져 있다. 석회암 지대로 지형의 침식이 이루어지면서 호수가 생성되어 물에 포함된 광물, 무기물과 유기물의 성분과 양에 따라 하늘색, 밝은 초록색, 청록색, 진한 파란색, 또는 회색을 띠고 있다. 삼척 미인폭포는 미국의 그랜드캐니언과 지질학적 특성과 석회암이 혼합된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석회질 물이 높이 30m에서 내려오면서 신비로운 비취색의 물빛을 띠고 있다. 특히 수량이 풍부한 여름철에 석회수의 장대한 물기둥과 물안개가 장관을 이루면서 최고의 풍경을 제공한다. 전 세계적으로 중국 구채구, 트뤼키예 카파도키아,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등에서 볼 수 있는 애매랄드 폭포수를 다시 보려면 보수 공사가 끝나는 2026년 3월 초까지 기다려야 한다. 자세한 사항은 삼척시 폐광지역사업단, 도계읍에 연락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초기 백제는 낙랑군과 대방군에서 문화를 받아들이다가 낙랑과 대방의 소멸로 동진(東晉)에서 남조의 문화를 전수받았다. 중국식 무덤인 전축분(벽돌무덤)은 고대 중국에서 유행하였고, 낙랑에서도 2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평양 토성리와 황해도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은 덮개 돌 아래에 돌기둥을 세우고 봉분을 얹는 횡혈식 석실분으로 발전했다. 횡혈식석실분(돌방무덤)은 흙으로 봉분을 만들고 중앙에 석관이나 석곽을 배치하는 구조로 백제 중기부터 주요한 묘제로 정착하였다. 전축분 무령왕릉의 남조문화 전축분인 공주 송산리 6호분은 사신도, 해와 달, 별을 그렸고, 두 장의 벽돌을 맞대서 한 쌍이 되도록 쌓았다. 7호분(무령왕릉)은 배수로 공사 중에 도굴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굴하였다(1971년 7월 5일). 묘지석으로 축조 시기(525년)와 무덤의 주인(무령왕)을 알 수 있다. 진묘수가 무덤방으로 가는 널길 가운데에서 입구 쪽을 노려보는 자세로 외부 침입자로부터 무덤을 보호했다. 머리에 뿔이 한 개 달려 있는 진묘수는 죽은 자의 영혼을 서왕모(西王母)에게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보통 널방 입구에 한 쌍을 바깥을 향해 배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백제의 가요는 남녀간 사랑,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 영농 활동의 노동요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읍사(井邑詞)’, ‘선운산가(禪雲山歌)’, ‘무등산가(無等山歌)’, ‘지리산가(智異山歌)’ 등이 있다(고려사). 또한, 노동요인 ‘산유화가’가 백제의 멸망과 함께 서천과 부여 일대의 노동요로 불려졌다. 일반 백성들의 애환과 농사에서 오는 고된 삶을 진솔한 가사와 가락으로 표현했다. 백제 여인의 기다림을 담은 백제 가요들 정읍사는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남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아내가 근처 산 바위에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비는 노래이며, 백제의 가요 중에서 유일하게 전하고 있다. 정읍사는 정읍(井邑) 또는 빗가락 정읍(橫指井邑)으로 불렀다(고려사, 악학궤범). 왕이나 왕세자가 이동할 때 위엄을 보여주기 위하여 연주했다. 조선 말기에 가사인 ‘정읍사’는 사라지고, 연주곡인 ‘수제천’만 남아서 처용무(處容舞)의 반주로 연주한다. 전곡은 4장으로 1,2,3장은 6장단, 4장은 2장단이다. 2장은 1장의 반복이고, 3장은 1장과 2장보다 4도 위로 조옮김을 하였고, 4장은 원래의 조로 되돌아간 가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불상과 보살이 사찰의 불전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백제의 불상들은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아름답고 섬세한 모습이다. 불상(佛像)은 불법을 쉽게 보여주고 터득할 수 있는 신앙의 매개체다. 기도의 대상인 불상은 석가모니불‧아미타불‧약사불‧비로자나불 등이다. 보살은 성불(成佛)의 뜻으로 부처를 도와서 보살행(菩薩行)을 하는 사람이다. 백제의 불상은 석가모니불, 미륵보살, 관세음보살을 표현하면서 인간의 생로병사와 구제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고 있다. 석가모니불은 인도의 보리수 아래서 새로병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불상으로 인간의 고뇌를 초월하게 한다.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설법하다가 성불하여 3회 설법으로 272억명을 교화시킨다. 관세음보살은 극락에서 어려움에 처한 중생을 구제하고, 이승에서 죽은 자를 극락으로 인도한다. 불전의 석가모니불과 봉주 보살상 불전은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인 부처나 보살 등의 불상을 모신 불교 건축물이다. 이곳에서 사찰에서 이루어지는 주요한 행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선종(禪宗)의 사찰에서 법당, 교종(敎宗)의 사찰에서 강당으로 불린다. 우리나라는 선종 중심의 사찰이 많기 때문에 주요 법당으로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산업화(industrialization)는 개인의 건강, 질병, 그리고 죽음에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장기간에 걸친 의료화(medicalization)는 질병의 원인이 되는 환경이나 사회적 과정보다 의사에 의존하는 치료 중심으로 변했다. 의대 입학 후부터 난해한 의학 지식으로 일반인의 접근을 통제하면서 집단적 응집력과 폐쇄적 구조를 형성했다. 우리나라는 1999년 의약분업 사태를 시발점으로 의사들이 의대입학 정원의 동결을 배경으로 배출 인원과 자연 감소에 의한 의료 인력을 관리하고, 인구의 증가와 고령화에 따른 의료 수요의 증가로 의료비용이 증가해 왔다. 건강보험제도 실시 따른 의료 수요 확대 의사는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일탈을 제거하는 문화적 가치와 규범의 수행자로 개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환자는 아프면 빨리 회복하기 위해 의사의 지시를 적극적으로 따라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의사는 생물학적 기술뿐만 아니라 권위를 가지는 집단으로 변모됐다. 의사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자율성을 가지면서 의료 내 다른 직군과 환자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됐다. 의사들은 의료 기술을 기반으로 제도적으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조성원 순례자는 한화그룹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오로지 한 곳에서 40여년간 청춘을 불사르고 재경 분야 임원까지 올랐다가 용인경전철 대표를 마지막으로 퇴직했다. 퇴직에 즈음해서 2018년 지구의 둘레인 4만여 킬로미터에 해당되는 거리를 걷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매일 2만보씩 걸었다. 그 목표가 완성되어 가면서 마지막 피날레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프랑스 길, 산티아고 4대 순례길의 하이라이트! 산티아고 순례길은 9세기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면서 십자군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지를 갈 수 없게 되자 순례의 대체지로 유럽 전역에서 많은 순례 객들이 오면서 시작됐다. 그가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은 여러 개의 경로가 있는데 ‘프랑스 길’은 투르의 길, 리모주의 길, 르 퓌의 길, 툴루즈의 길에서 각각 시작해 생 장 피에드포르에 합류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한 다음에 바스크 주, 아라곤 주, 나바라 주를 거쳐 최종 목적지인 야고보의 순교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순례길이다. 또 다른 순례길로 ‘스페인 길’은 출발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아라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마을 입구나 고갯마루는 신령의 보호를 받는 마을 안과 보호받지 못하는 마을 밖을 연결하는 영역이었다. 마을의 뒷산이나 부근의 산은 우주를 관장하는 상당신(上堂神, 산신당)을 모시고, 마을의 입구는 장승, 솟대(짐대), 돌탑, 선돌 등으로 하당신(下堂神, 서나당)을 세웠다. 마을 변의 거석은 하늘과 태양에 이르는 매개체로 초자연적인 숭배의 대상이면서 제단으로 사용했다. 거석문화는 선돌(menhir), 돌멘(dolmen), 스톤서클(stone circle), 스톤어라인먼트(stone alignment) 등으로 인류 문명과 함께 해오고 있다. 마을의 하당신, 돌무더기와 선돌 돌무더기는 선사시대의 거석 기념물로 일정한 장소에 돌을 모으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돌을 쌓으면서 안전과 소망을 기원하는 정령 신앙의 표현이면서 대상이었다. 주로 냇가의 돌이나 산의 돌을 이용하여 둥근 형태로 쌓아 올린 후 정상부에 길쭉한 신줏돌을 세운다. 산길이나 들길에 돌을 쌓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면서 안내 표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몽골의 돌무더기인 ‘어워(Овоо)’는 광활한 초원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정표이면서 주변을 돌면서 안전을 기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태양숭배는 긴 일조량과 따뜻한 기후를 소망하면서 나타났다. 태양이 계절의 순환을 만들면서 농작물의 경작을 결정했다. 태양을 상징하는 곡옥, 동검과 동경이 주술적인 목적의 도구나 위세품으로 사용되었고, 무덤에 부장품으로 함께 묻었다. 옥(玉)은 가장 정결하고 순수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태양 속에 사는 삼족오(三足烏)는 세발 달린 까마귀로 태양과 땅에 살면서 하늘, 사람과 땅을 연결하였다. 태양의 상징인 위세품, 곡옥과 동경 곡옥은 왕권 혹은 지배계급의 권위를 나타내는 장식품이다. 홍산문화는 옥의 소유를 특별한 지위의 상징물로 여겨서 무덤의 부장품으로 사용했다. 곡옥은 머리부분에서 크고 굵으며 꼬리 부분으로 가늘게 꼬부라져 있다. 크기는 1센티미터부터 10센티미터 내외까지 대부분 옥으로 만들어졌다. 곡옥은 힘의 상징이나 장신구, 호부(護符)나 주술적 의식용구, 초승달 숭배로 반달장식이라는 가설이 있다. 곡옥은 반월형에서 두툼한 초승달 모양으로 점차 변화되었다. 옥이 시신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힘을 가졌다고 믿고, 시신에 옥을 부장하기도 했다. 합옥은 부활, 색옥은 육체의 정기, 옥돈은 내세의 양식을 상징했다. 동경은 태양을 상징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지식은 원리를 통해서 맥락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지식의 특수성과 유사성을 인정하면서 신뢰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지식은 과거를 말하는 철학, 미래를 이야기하는 과학, 그리고 인간의 본능과 경험(실험, 관찰 등) 등을 합쳐서 이루어진다. 전 세계 많은 국가들은 대학에서 지식을 창출하고 전파하면서 국가의 발전과 산업의 성장에 활용하고 있다. 지식의 생성: 불확실성과 확률의 탄생 지식은 오랜 기간의 유물, 유적과 사건들의 빅데이터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자료가 많을수록 그 원인이나 현상을 빨리 찾을 수 있지만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도 존재할 수 있어 근본적인 실체를 찾기는 어렵다. 초기 값이 지식을 결정할 수 있는 출발점이지만 첫 정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지식을 정의하기 어렵다. 확률(probability)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떤 사건이나 사물의 특징을 반복적으로 측정해서 얻는다. 베르누이(Bernoulli)는 반복 실험에서 얻은 경험 확률로 미지의 기대 값과 확률을 계산했다. 베이즈(Bayes)는 이론 확률(사전 확률)에 추가 정보를 반영하여 새로운 확률(사후 확률)을 계산했다. 베르누이 확률과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조공은 중심국(종주국)인 중국에 대하여 제후국(번국)인 속국의 충성을 나타내는 위계 구조였다. 황제는 제후국의 조공을 통하여 상징적인 통치권을 인정받았고, 제후국은 지배 영역의 종주권에 대한 중원의 확인을 받았다. 동아시아는 조공과 책봉으로 환경의 변화에 순응하면서 각 국가가 독자적인 통치를 수행하였다. 조공에 따른 책봉의 역사 최초 책봉의 기록으로 근초고왕이 동진(東晉)에서 진동장군령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를 받았다. 송(宋)은 전지왕에게 책봉하면서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한단계 승격시켰다. 백제의 관료로 신하였던 부여례가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를 받고, 장무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를 받았다(472년). 양나라는 무령왕에게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백제왕(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百濟王, 521년), 성왕에게 지절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持節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 524년)을 수여했다. 성왕이 양나라에 시경(詩經) 전문가를 요청했고, 양무제는 예학의 권위자인 육후(陸詡)를 보냈다. 위덕왕은 동제에서 사지절시중거기대장군대방군공백제왕(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동아시아의 묘제는 세월의 변천에 따라서 그 양식이 변해왔다.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은 계급 사회의 도래에 따른 지배자의 우위를 상징하면서 하늘에 제사하는 제단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적석고분은 만주계 양식이지만 백제의 한성과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던 소백산맥 지역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고인돌이나 적석고분이 사라지고 봉분을 흙으로 조성하는 횡혈식 석실분과 중국식 통광묘가 묘제의 주용한 형식으로 자리하였다. 무덤과 제단, 칠성바위의 역할을 했던 고인돌 고인돌은 납작한 판석이나 돌덩이 밑에 ‘괸 돌’ 또는 ‘고임돌’을 놓았다. 고인돌은 무덤이면서 제단이며,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돌 방 위에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덮개를 얹었다. 탁자형은 시신을 지상에 놓아두고 평지에 높은 받침돌로 무덤 방을 만든다. 덮개형은 땅을 파고 무덤방을 돌로 덮는다. 바둑판형은 무덤방 주위에 돌무지를 쌓고 다시 덮개 돌을 놓았다. 강화 고인돌은 탁자형으로 받침돌에 덮개 돌을 놓았다. 보령 죽청리 고인돌은 중심에 낮은 받침의 덮개형 고인돌로 제단을 만들고 주변에 남방식 고인돌을 배치했다. 신안 방월리 고인돌은 7기의 고인돌로 칠성바위를 형성하고 있다.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한반도와 대륙이 전쟁과 사회적 혼란으로 불안할 때 일본열도로 간 인구이동이 지난 2천년간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까지 벼농사, 청동기, 철기, 관개농업 등이 이주민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6세기에서 7세기 후반까지 차례로 가야, 백제,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많은 유민의 이동이 이루어졌다.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20년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인구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교류하였다. 백제계 주민의 큐슈지역 정착 왜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지원하면서 백강전투에 참여했다(663년). 백제 부흥전쟁이 실패하자 백제 유민들이 대거 왜로 이주하면서 일본은 나당에 대한 적개심으로 정체성을 새롭게 했다. 후지와라 노후히토는 백제의 유민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善光)이 일본에서 백제왕의 작위를 받았다(속일본기). 백제가 멸망하자 지배층이 일본 수군과 함께 건너갔고(663년), 백제 왕족들과 일반인들이 오사카, 교토, 큐슈 일대에 정착했다. 왜의 수군이 남도지역에 상륙하여 백제인을 수송해 왔다(663년 10월). 여자신, 귀실집사(기시쓰 슈시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백제는 도교의 오행설에 따라서 군대의 깃발을 황색으로 통일하였다. 도성의 남쪽에 남단(南壇)을 세우고 정기적으로 천제를 올렸다. 도교문화는 삼신산과 무릉도원을 표현한 산수문전, 봉래산을 조각한 백제금동대향로, 그리고 부여 궁남지의 방장산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백제 예술의 극치이면서 한국 예술의 원류가 되었다. 도교적 사고의 산수문전 토지는 신의 소유이기 때문에 사용시 신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무령왕릉 지석(誌石)은 토지신에게 땅을 샀다는 토지 매지권을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에 도교의 도사들이 주문을 외울 때 내는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의 표현이 있디. 왕릉 입구의 진묘수는 무덤을 지키는 뿔과 날개가 달린 상상의 동물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침입자나 악귀를 막고, 죽은 영혼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을 한다. 남조의 황제릉에 돌로 만든 진묘수 한 쌍을 무덤 앞에서 세웠다. 외리문양전은 부여 외리의 사찰터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벽돌로 42매가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었다(1937년). 보물로 지정된 8매는 봉황무늬, 산수무늬, 산수도깨비무늬, 산수봉황무늬, 연꽃도깨비무늬, 연꽃구름무늬, 연꽃무늬, 용무늬이다. 특히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한반도 남부와 일본의 큐슈는 고대 문화를 공유하면서 활발한 교류로 서로 협력했었다. 양 지역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유적이 많고, 역사적으로 풀리지 않은 흔적들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교류의 흔적으로 보이는 서로 비슷한 유물이 양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왜는 가야, 마한과 교류하면서 발전을 이루다가 4세기 중반부터 백제중심으로 바뀌었다. 고대 한반도 남부와 왜의 큐슈와 문화적으로 유사성이 가장 큰 부분이 무덤양식이다. 토기문화의 흔적, 항아리와 옹관묘 옹관은 초기 철기시대에 생활 용기에서 묘제로 변하여 전용의 U자형으로 발전했다. 세계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묘제로 기원전 6000년경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시작하여 동아시아 전역에 확산되었다. 초기 철기시대는 부장품을 묻지 않다가 3세기부터 토기, 구슬, 철기 등을 함께 사용했다. 영산강 유역은 대형 옹관과 옹관 고분이 형성되어 있다. 후에 이 지역의 고분은 석실에 옹관을 배치하는 석실분과 옹관묘의 혼합된 양식이 나타나기도 한다. 옹관묘는 마한지역의 보편적인 묘제로 4세기에 대형화되면서 U자형으로 바뀌었다. 여러 개의 옹관들이 한 곳에 발견되면서 가족이나 씨족의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급변하는 국제정세는 병자호란을 전후의 동아시아 정세와 서구의 식민지 개척에 따른 국제 패권의 변화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여진족은 청을 세워서 역대 최고의 왕조를 구축했지만 조선은 왕권의 약화와 당파 싸움으로 국제질서에서 배제되었다. 오히려 동일하게 쇄국정책을 취했던 일본과 통신사와 국왕사를 상호 파견하면서 평온한 시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함경도와 여진족의 관계 여진족은 목축과 수렵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전환하면서 계급을 형성하고 국가를 탄생시켰다. 조선 건국의 출발점인 함경도 경원(慶源)은 시베리아와 만주의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로 북방 유목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북방계인 숙신‧읍루‧예맥‧부여‧말갈 등이 지배하다가 고구려‧당나라‧발해‧거란‧금나라‧원나라‧명나라의 통제를 받았다. 주로 여진족이 활동하였고, 이성계의 고조인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였고, 그 아들인 이행리(李行里)도 이곳의 관리를 지냈다. 이곳의 관리였던 이징옥(李澄玉)이 계유정난으로 파면되자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를 내세운 ‘이징옥의 난’을 일으켰다((1453년). 누르하치의 직계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이 지역에서 살다가 뒤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서 융합문화를 형성했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탑으로 초기에 나무를 이용하여 목탑을 세웠고, 후에 석재를 이용하여 석탑을 조각했다. 목탑은 재질의 특성상 수명이 짧기 때문에 오래 전에 제작된 건축물은 찾기 어렵다. 목탑의 건축뿐만 아니라 목조건축물의 지붕 비례를 적용하여 석탑을 세웠다. 백제의 석탑은 각 층의 지붕 돌(옥개석)이 몸 돌보다 상대적으로 깊고 넓게 만들어졌다. 백제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 정림사지 오층석탑, 그리고 왕궁리 석탑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백제의 목탑, 호류지오중탑과 능사지 오층탑 목탑은 중심 기둥의 심초석을 중심으로 각 층간 비례를 만들어서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백제 목탑의 원형은 높이 35미터의 호류지 오중탑으로 1층 내부 심주(心法)의 둘레에 사천주(四天柱)를 세우고, 그 내부에 수미산을 쌓은 후 소조상(塑造像)을 사면에 장식했다. 부여 정림사지에서도 소조상 파편이 발견되어 초기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는 중앙의 목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석탑을 배치하는 3탑 3금당식의 가람을 구성했다. 백제는 신라의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