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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문가 칼럼] 언어의 진화, 백제어와 일본어 형성에서 근초고왕의 역할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현대 한국어는 고대 언어와는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는 북방계와 남방계 이주민, 그리고 선주민인 고아시아족이 오랜 세월 교류하며 살아온 공간이었다. 

 

이러한 복합적 인종적 배경은 언어에도 다문화적 속성을 남겼다.백제는 지배계층을 형성한 부여계와 낙랑계 이주민, 그리고 마한 세력과 남방계 토착민이 융합된 사회였다. 

 

그 중심지인 한성(위례성)과 웅진, 사비, 금마 일대에서는 다양한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언어 또한 이런 융합의 산물이었다. 백제어는 이러한 문화적 교류 속에서 형성·통합되었으며, 백제 멸망 이전부터 활발한 대외 교류를 통해 왜(倭)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멸망과 함께 백제계 주민이 대거 일본 열도로 이주하면서 고대 일본어 형성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백제계 도래인의 언어·기술·지식이 반영되어 있다.

 

문명사 관점에서 민족 간 언어 형성의 이해

 

오늘날 전 세계에는 약 7,000여 종의 언어가 존재한다. 언어는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 현재의 형태로 정착했으며, 그 변화의 핵심에는 음운과 형태가 있다. 음운은 발음의 방식이며, 형태는 문자와 의미의 결합이다. 언어의 진화를 추적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문자로 남은 기록이다. 발음을 알 수 없을 때는 비슷한 소리를 차용하는 차자 표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언어의 선택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교류가 많은 지역일수록 공통 언어로 수렴되며, 고립된 지역에서 고립어가 형성된다. 이러한 변화는 한반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과의 교류 속에서 많은 한자어가 차용되었고, 대체할 단어가 없는 분야에서 차용이 더욱 활발했다. 

 

정복과 이주, 그리고 다문화적 접촉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각 민족이나 종족의 구강 구조에 따른 억양과 문법의 변화를 낳았다. 경상도와 충청도 사투리의 억양 차이, 다문화 가정의 특유한 발음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부여계 언어, 백제어와 고구려어


한국어의 기원에 대해서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알타이어족 가설은 여전히 강력한 견해 중 하나이며, 튀르크어·몽골어·퉁구스어로 분화했으며, 백제와 고구려의 언어는 부여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위서》에 따르면 부여계 두막루어는 거란어와 실위어와 가까웠다고 하며, 부여어는 백제어와 고구려어의 원류이자 고대 일본어의 뿌리가 되었다. 

 

남부의 마한 지역은 한계어, 낙랑·대방군 지역은 중국계 언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또한 씨족 언어의 명칭도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에벤키족 등 퉁구스계 씨족의 ‘킴(Kim)’, ‘바이(Bai)’, ‘사마(Sama)’ 등의 이름은 한반도의 ‘김’, ‘박’, ‘사마’ 씨와 음성학적으로 유사하다. 이는 북방계와 한반도 세력 간의 언어적 연속성을 보여준다.

 

 

백제어와 일본 형성에서 근초고왕의 역할

 

백제의 고이왕(234~286)은 낙랑을 공격해 임진강 상류와 안성천 일대를 장악하며 국가 기반을 다졌다. 이후 근초고왕(324~375)은 백제 왕권을 강화하고 마한을 통합함으로써 언어와 문화를 하나로 묶었다. 그는 369년에 금강 유역의 건마국을 정복하고, 371년에는 3만의 군사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며 남평양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이 시기에 백제는 영산강 하류와 탐라까지 진출했고,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근초고왕은 일본 오오진 천황에게 칠지도(七支刀)와 칠자경(七字鏡)을 보냈다. 칠지도에 새겨진 글귀는 백제와 왜의 교류를 상징하며, 백제어의 문자 표기 전통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또한 박사 고흥(高興)에게 명해 삼국시대 최초의 국사인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했다. 이는 한자를 빌려 백제어를 표기한 초기 역사서로, 왕권의 정당성과 언어의 제도화를 상징한다.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辟百兵宜□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태□ 4년 □월 16일 병오 한낮에 만들었는데 백 번을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은 백 명의 군사를 피할 수 있어 □가 후왕께 주노라. □□□□가 제작했다. 선세 이래 이런 칼은 아직 없었고,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그런 까닭에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

 

백제어의 구성, 부여어와 마한어

 

백제어는 지배층의 부여어와 피지배층의 마한어가 공존하면서 형성되었다. 4세기에 예성강에서 안성까지는 부여어권, 그 남쪽은 마한어권이었다. 지명 속에 남은 언어 흔적은 백제어 복원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홀(忽)’은 도읍지를 뜻하며 위례홀, 미추홀, 졸본홀 등으로 남아 있다. ‘비리(卑離)’ 또는 ‘부리(夫里)’는 마을 단위를 뜻해 소부리, 고량부리 등에 쓰였다. ‘벌(伐)’은 신라 지역 명칭으로 서라벌, 비자벌 등에서 볼 수 있다.

 

또한 ‘골(骨)’, ‘굴(屈)’은 곡(谷)이나 성(城)을 의미했고, 마을 명칭에는 ‘실’, ‘거리’, ‘다리’, ‘뫼’, ‘터’, ‘재’, ‘바위’, ‘들’ 등의 어미가 붙었다. 이러한 지명 체계는 백제어의 형태적 규칙과 음운적 특징을 간직한 언어 유물이다. 

 

서천 은곡리는 ‘한실’을 으뜸마을로, 골짜기 위쪽의 ‘웃한실’과 아래쪽의 ‘아래한실’로 나뉜다. 서쪽은 ‘박상골’, ‘감나무골’, ‘양지편’, ‘원퉁이’ 마을이다. 동쪽은 ‘은적골(굴)’, ‘텃골’, ‘분톳골’, ‘망굴’이 있다. 은적골에서 오양골로 가는 고개는 ‘꽃감재’와 ‘살푸쟁이’가 있다.

 

 

백제어의 원형, 고사기와 일본서기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광개토대왕비》, 《고사기》, 《일본서기》, 《만엽집》 등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고사기》(712)는 백제계 도래인 오노 야스마로가 편찬했으며, 백제 학자 아직기(阿直岐)가 일본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서기》(720)는 백제의 역사서인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를 참조하여 서술되었으며, 백제의 연대기를 기준으로 일본 왕조의 시간을 정립했다.

 

일본어에도 백제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밀(3)’, ‘옻(5)’, ‘나는(7)’, ‘덕(10)’은 일본어 ‘밋(3)’, ‘잇즈(5)’, ‘나나(7)’, ‘도우(10)’와 유사하다. 전라도 사투리 ‘~당께’는 일본어 ‘닷케(だっけ)’, 충청도 ‘~서라우’는 ‘소로우(そうろう)’와 발음 구조가 닮았다. 

 

이러한 유사성은 백제어가 일본어의 기반 언어임을 나타낸다. 백제와 일본의 성씨 체계 또한 닮아 있다. 백제는 부여(扶餘), 흑치(黑齒), 사택(沙宅) 등 복성(複姓)을 사용했고, 일본 역시 지명과 관등을 결합한 복합 명칭을 썼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대략 4,000년의 분화 과정을 거쳤다. 백제가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 주면서 백제의 한자 표기법이 일본의 훈독에 영향을 미쳤다. 백제의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 다문화 융합의 상징이었다. 근초고왕 시대에 백제어는 왕권과 문화의 중심 언어로 정비되었고, 한자를 매개로 일본 열도에 전파되며 새로운 언어의 씨앗이 되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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