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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산업콤비나트의 모델, 일본질소비료와 흥남철수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1870~1913년까지 경공업을 기반으로 상품수출이 증가하면서 중국을 능가했다. 1900년대 초 일본 경제는 산업혁명을 이루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상품수출액은 1913년 세계 16위에서 1929년 7위 규모까지 상승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이웃 지역들이 원료 공급과 소비지의 역할을 했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 정책은 산업의 발전과 침략전략에 따라서 무력 통치기(1910~1919년), 문화 통치기(1919~1931년), 민족 말살 통치기(1931~1945년)로 구분하고 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에 진출한 일본은 1905∼1911년 사이에 조선의 화폐제도를 정리하여 인위적으로 상업자본을 파괴했다. 1911년 회사령을 제정하여 상품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하면서 민족자본의 산업자본화를 통제했다.

 

그리고, 일제는 1910∼1918년까지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다수의 토지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면서 농촌경제를 파괴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의 경제는 상업, 산업, 농업이 모두 일본인과 친일세력에게 넘어갔다. 그러면서 조선과 일본의 거래에 대한 관세가 대부분 폐지되고 1920년대 단일 시장이 형성되었다.

 

일본의 화학산업 육성과 조선질소비료 설립

 

1920년대 초반까지 조선의 산업구조는 정미소를 중심으로 주로 식료품공업과 경공업이 차지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1920년대 북부지방에 유역변경방식의 발전을 시작하였고, 일본질소(日本窒素), 닛산(日産), 미쓰이(三井)·미쓰비시(三菱) 등이 진출하여 화학 및 금속기계산업을 육성하였다.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는 큐슈에 1908년 석회질 비료를 생산하는 일본질소비료(日本窒素肥料)를 설립했다.

 

 

 

 

1922년 일본질소비료는 암모니아 비료 공장을 건설하면서 필요한 전력 공급의 확보하기가 어려워지자 1925년부터 한반도의 수력 개발에 참여했다. 일본질소비료는 1926년 조선수전(朝鮮水電)과 1927년 조선질소비료를 설립하고, 1929년부터 부전강발전소에서 송전을 개시하였다.

 

조선질소비료가 이 전기를 이용하여 1930년부터 황산암모늄(ammonium sulfate)비료를 생산하는 흥남비료공장을 운영했다. 조선질소비료는 1930년 조선수전을 합병하여 비료 생산을 확대했다. 이후 흥남 지역은 연관 산업인 유지, 화약, 석탄화학, 알루미늄(비철금속) 등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전기화학 콤비나트가 형성되었다.

 

외부적으로 화학시설이었지만 언제든지 군수산업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각 공장이 연결되었다. 이들 공장은 1930년대부터 화약과 제련 등의 군수 분야에서 대륙 침략의 발판이 되었다.

 

 

 

 

전기화학콤비나트를 활용한 군수산업의 육성

 

일본은 1932년 만주국(滿洲國)을 세우고 조선, 대만, 관동주, 만주에 걸친 광역 경제권을 구축했다. 조선질소비료는 화약의 원료인 글리세린 확보를 위해 흥남에 1932년 유지공장을 건설했다. 글리셀린은 동해의 정어리 어유와 전기분해로 발생되는 수소를 결합하여 제조했다. 흥남에 조선질소화약이 1935년 설립되어 조선질소비료의 글리세린으로 화약을 생산하면서 일본 화약 제조의 50%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조선질소비료는 1936년 연산 10만t의 질소비료를 생산하면서 세계 5위의 기업이 되었다. 조선질소비료의 구인광고는 1941년부터 1945년 8월까지 경성일보에만 총 115차례 게재되었다. 흥남비료공장이 가장 많았으며, 흥남금속공장, 용흥공장, 본궁공장, 아오지공장, 흥남제련소, 남산공장, 청수공장, 함흥합동목재, 시오노기공장 등의 순이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생하면서 조선을 병참기지화하여 군수공업화를 추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열도보다 안전한 한반도 북부에 공업생산을 집중시켰다.

 

이 지역의 군수산업을 이용하여 폭탄을 제조하고 있었다. 그 발단이 된 것은 도쿄대 이화학연구소에서 폭탄 개발에 대한 ‘니고연구(二號硏究)’를 진행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의 도쿄공습으로 이화학연구소가 파괴되자보다 안전하고 연관 산업이 발달한 흥남 지역을 활성화시켰다. 1943년 일본은 한반도의 지하자원 탐사에서 우라늄 매장량을 확인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료 생산에서 나오는 인산은 우라늄 추출에 사용될 수 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방사능 실험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947년 주한 미군의 보고에 “일본군이 북한의 동해안에 띄운 선박에서 폭발 실험을 실시해 원폭과 비슷한 폭발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미군의 기밀문서에도 “1945년 8월 12일, 함경남도 흥남 앞바다에서 원폭과 비슷한 폭발이 있었다”는 보고가 있다. 그렇지만 연합군 사령부는 그 당시 일본의 핵기술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비해 훨씬 부족했고 지적했다.

 

2020년 8월 4일 레바논에서 질산암모늄이 폭발하면서 원자폭탄 폭발에서 나타나는 버섯구름을 형성했다. 질산암모늄은 녹은 후에 170도에서 암모니아와 산화질소로 분해되면서 열이 발생한다. 이때 발생한 산화질소는 산소 없이도 연쇄 폭발을 일으킨다. 폭발의 위력은 약 1000~1500톤의 TNT가 폭발한 규모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약 1/15의 위력이었다.

 

대규모 폭발로 158명이 사망하고 6000명 넘게 다쳤으며, 25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원산 앞바다에서 실험이 진행되었다면 핵실험이나 질산암모늄의 폭발로 나타났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발전과 흥남철수

 

1930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의 GDP 성장률은 평균 4.2%로 대공황 시기에 세계 최상위 수준이었고, 중화학공업에서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러나, 1945년 전쟁에 패하면서 정치와 경제는 극도의 혼란에 부딪혔고 미군정에 의한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에 일본은 상징 천황제의 신설, 노동운동 및 정치활동의 자유화, 경제개혁을 추진하였다. 경제개혁은 재벌해체, 농지개혁, 노동개혁, 금융 및 재정 제도에서 추진되었다.

 

1949년부터 연합군이 일본에 대한 자본주의 계획을 확정하여 인플레이션 해소를 위한 긴축예산을 추진했다. 그리고,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한국전쟁 특수’가 일본 경제를 회복시켰다. 일본은 도쿄올림픽을 거치면서 1968년부터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일본질소비료는 JNC로 사명을 변경하였고, 화학분야에서 글로벌 전문기업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일본기업들이 물러갔을 때 경공업 분야에 경성방직, 가네보, 경성직물, 가타쿠라, 조선제망, 조선제분, 대일본제당, 조선맥주, 조선고무, 왕자제지 등이 있었다. 중화학공업은 고주파중공업, 마그네슘금속공업, 조선질소비료, 조선화약 등으로 군수산업이었다.

 

흥남비료공장은 광복 후에도 생산을 계속했지만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에 의한 주요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아시아 최대의 화학단지였던 이곳의 산업시설, 주변의 수풍댐과 발전소들도 파

괴되었다. 북한은 일제 강점기의 시설과 인프라를 이용하여 공업지대로 육성했다. 1955년 8월부터 흥남비료 공장의 일부 시설이 복구되어 생산을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흥남 전기화학콤비나트와 유사한 석유화학단지를 울산과 여천에 건설했다. 또한 1961년 충주비료와 1963년 호남비료가 설립되었으며, 1973년 두 회사가 합병하여 한국종합화학이 되었다.

 

한국종합화학은 1980년까지 요소 비료를 생산하면서 비료 및 석유화학, 알코올 회사를 자회사로 운영하였고, 1996년 수산화 알루미늄을 공급하였다.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선진 경제개발 모델을 들여왔지만 실제로는 일제강점기의 유산을 물려받고 있다. 화학산업이 발달했던 독일, 일본, 우리나라의 순으로 이어지는 연장선 상에서 도입되었지만 기존의 유산을 청산하고 새로운 모델을 심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산업분야의 과제로 남아 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경희대 경영학과, 고려대 통계학석사, University of Liverpool MBA,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경희대 의과학박사과정

•국민투자신탁 애널리스트, 동부증권 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한국과학사학회 회원, 한국경영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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