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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한국사회의 승자독식 세습제도④ 사회적 구성원 간 융합과 정보공유에 의한 지역주의 타파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근대국가 이전의 경우 지배세력이 지향하는 가치가 국가의 성격을 규정했다. 고대에 민족의식이나 단일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민족들은 서로 다른 언어와 관습,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50만년 전부터 한반도에 인간이 거주했지만 현재의 한반도인들과 거리가 있다. 그리고, 5000년 전 빙하기에 고위도 거주 부족들이 추위를 피하여 한반도로 이동하면서 토착민들과 결합했다. 신석기시대에 각 종족의 분화가 일어나면서 공통적인 언어와 민족성의 공동체인 ‘종족(種族)’을 형성했다.

 

종족 간 융합에 따른 민족의식의 형성

 

고인돌, 돌널무덤과 비파형동검 등의 유적은 예맥족이 B.C.4~5세기에 요동-평양-황해 동부-경기 파주, 강화-부여(송국리)로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는 상주-대구-청도-김해-창원, 다른 갈래로 대전-전주-장수-승주-여천(적량동)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일부가 쓰시마와 북큐슈에 야요이문화를 남겼다. 이들의 이동 경로는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에 이르는 무문토기의 발견 지역과 일치한다.

 

한민족은 북방계 이주민과 남방계 토착민이 오랫동안 문화적 동화 과정을 거치면서 통합되었다. 부락연합이 부락연맹(部落聯盟)으로 발전하여 소민족(小民族)이 되고, 소민족이 연합하여 대민족(大民族)을 형성한다. 고대 한반도인들은 몽골인종으로 고아시아어나 알타이어와 관련되어 있다. 청동기시대에 예맥족의 한반도 이동으로 토착세력인 고아시아족과 동화현상이 일어났다.

 

한(韓)은 중국의 동방 군현과 이웃한 지역과 그곳에 거주한 특정한 역사 공동체 및 그들이 세운 ‘국’(나라)을 가리킨다. 한이라는 명칭은 삼한시대부터 중국 문헌에 등장하여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고조선 이후 삼한이 출현하면서 특정한 시기에 나타난 역사적 실체이기도 했다.

 

신라는 삼한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고려는 삼한 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를 ‘삼한’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삼한을 거의 사용하지 않다가 국호가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변했고(1897년),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이 만들어졌다(1919년).

 

한민족의 특성은 남북국시대 이후에 한반도 중남부에 나타났고, 세종대왕이 한민족의 토대가 되는 영토와 문화를 완성했다. 그렇지만, 북부지방은 오랜 기간 여진족이 거주하면서 한민족과 혼재된 상태를 유지했다. 만주의 경우 알타이 계통어를 쓰는 민족들이 살면서 영토와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지역주의 형성을 통한 패권의식의 형성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대립, 그리고 통일신라의 등장으로 지역적인 차별이 시작되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치한 이후 뚜렷한 민족의 이동은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후백제와 고려가 대립하였고 고려는 후백제 출신을 지배층의 구성에서 배제했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각 호족들을 우대하는 화평 정책을 펼쳤지만 신라의 신분제도와 지방의 호족 세력을 인정했다.

 

고려사 태조편이 편찬되었지만 거란군의 침입(1010년)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최제안(崔齊安)이 고려사를 재편찬할 때 최항(崔沆)의 집에서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발견하여 삽입했다. 훈요십조 8항은 “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銜統合之怨, 犯 生亂, 且其僧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奸巧言語, 弄權亂政, 以致 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차현 이남은 산과 땅이 배역의 형태로 사람 또한 배역하다. 조정에 들어오면 변란을 꾀할 수 있고 임금이 행차하는 길을 막아서 난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벼슬을 주지 마라)”

 

 

 

묘청의 난은 고구려 계승의 서경 출신과 신라 계승의 경주 출신의 무력 대결이었다. 고려시대는 옛 신라 땅에서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났고(1202년), 옛 고구려 땅에서 서경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이 일어났다(1217년). 그리고 이언년 형제가 담양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다(1237년).

 

민족주의와 지역주의의 고착화

 

신라 중심의 패권주의는 고려를 거쳐서 조선에서도 재현되었다. 조선 전기는 신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과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나타났다. 이성계는 무관출신으로 그를 도운 공신들이 서북 지방의 맹장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서북지방 사람은 높은 벼슬에 임용하지 말라”고 서북인에 대한 차별정책을 실시했다.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에 서북 지역은 의병 활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황해도 이북의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은 과거에 합격해도 수령을 할 정도였다. 그 지역의 지방관들은 타 지역 출신들로 채워졌다. 또한 서북지방 사람과 혼인하거나 친구로 사귀지도 않았다.

 

소백산맥 서쪽은 새로운 왕조의 고향인 ‘풍패지향(豊沛之鄕)’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구한말 의병 봉기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주요 인물이 임진왜란 중에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사망했다. 또한 인조반정 이후 호서와 경기에 세력 기반을 둔 서인이 중앙을 장악하면서 다른 지역은 정치권력에서 밀려났다.

 

조선 중기에 성리학이 득세하면서 호남과 서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고착화시켰다. 영남출신의 김종직, 남인계열의 이익, 이중환, 안정복 등이 훈요십조의 ‘차현’에 대한 차령이남설을 주장했다.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 1760년)에서 “고려 때 이미 차령 이남과 공주강 밖은 배역의 형세”라고 했다. 그의 제자였던 이중환도 택리지(擇里志, 1751년)에서 “원래 백제의 땅으로 땅과 물이 모두 배역하다. 이후 고려시대에 이곳 사람들은 등용되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기록했다.

 

지금도 이러한 지역 기반의 패권주의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는 우리 사회의 시간과 공간을 통합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역사 발전은 다문화 사회를 효율적으로 융합하고 사회적 정보의 공유를 통한 상호 배려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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