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5 (금)

  • 맑음동두천 -3.6℃
  • 맑음강릉 3.0℃
  • 맑음서울 -1.9℃
  • 맑음대전 0.2℃
  • 맑음대구 1.7℃
  • 맑음울산 2.7℃
  • 맑음광주 3.9℃
  • 맑음부산 3.9℃
  • 맑음고창 2.7℃
  • 구름조금제주 8.0℃
  • 맑음강화 -1.6℃
  • 맑음보은 -0.3℃
  • 맑음금산 0.3℃
  • 맑음강진군 4.5℃
  • 맑음경주시 2.3℃
  • 맑음거제 3.9℃
기상청 제공

[전문가칼럼] 한국사회의 승자독식 세습제도⑥ 희생의 강요, 유목민족의 순장문화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유라시아는 초원지대에서 수렵과 유목으로 생활을 유지하였고, 내부적으로 엄격한 규율과 전통으로 움직였다. 순장은 유목민족의 독특한 전통 중에서 유라시안 전역에 가장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이 제도는 유라시아의 스키타이와 흉노, 만주의 부여, 한반도의 신라와 가야, 일본열도의 왜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대상은 포로와 노예로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신분 변동이 순장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고등 종교의 탄생으로 소멸되었지만 우월적인 의식이나 희생의 강요는 여전히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유목민족의 특성과 범위

 

스키타이(Skythai)는 유목민족으로 사슴을 의미하는 스콜로토이(Skolotoi)에서 유래한다. 헤로도투스는 ‘역사’에서“정 주하지 않고 수레로 자신의 집을 갖고 다닌다. 그들은 수렵생활을 하면서 가축을 치며 활을 쏘는데 능하다”고 기록했다. 

 

소규모 농경을 하면서도 초원지대 주변의 농경민들을 약탈하거나 그 생산물의 공납을 취했다. 부족장은 언제나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면서 퇴각을 불허했다. 스키타이인들은 무사정신과 승전욕, 그리고 타인과는 형제 관계를 중시했다. 

 

유목 공동체인 흉노는 여러 씨족이 부족을 구성했다. 그 명칭은 여러 유목 민족과 부족들을 계승한 포괄적인 개념으로 중국의 중화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이다. 흉노는 귀방, 험윤으로 불리면서 상나라와 주나라 때부터 중원과 경쟁했다. 

 

오랜 기간 한나라와 싸우면서 외부세계의 문화를 관대하게 수용했다. ‘사기’에 흉노는 “자연의 변화를 따라서 가축의 이동을 좇아 간다”고 했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으면서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경계선이 되었다.

 

또한, 만주의 부여는 왕을 중심으로 대가들이 중앙에 거주하면서 지방 세력이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는 연맹 국가였다. 지방은 5개 지역으로 그 아래에 가장 기본적인 집단인 읍락을 두었다. 지배계급인 제가(諸加)들이 스스로 무장하여 금속제 병기로 기마 전투를 수행했다. 좋은 말을 길러서 농경민이면서도 기마 풍습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쳤다. 

 

가야는 기마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낙동강 중류 이남의 서쪽과 소백산맥 동쪽 지역에서 백제와 신라 사이의 완충지 역할을 했다. 600여년의 역사 속에 한반도 남동쪽을 지배했지만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만 일부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서기’에‘가라(加羅, 369년)’와‘가라국왕기본한기(加羅國王己本旱岐, 382년)’로 나타난다. ‘삼국사기’에 대가야는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으로 모두 16대 520년간 존속하다가 신라 진흥왕의 침공으로 멸망하여 대가야군이 되었다”고 했다. 

 

유목민족의 동복과 순장

 

유목민족이 남긴 대표적인 문화가 동복(銅鍑)의 사용이다. 동복은 구리 솥으로 흉노, 부여, 선비가 공유했던 문화였다. 기원전 9세기 스키타이가 사용하기 시작하여 흑해 연안과 알타이, 바이칼, 그리고 북중국 등으로 확산되었다. 

 

동복이 스키타이이에서 사용하던 것이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지방을 거쳐서 오르도스에 유입되어 흉노식으로 변형되었다. 만주족의 음식인 화과(火鍋)는 동복처럼 구리와 주석 등으로 만든 둥근 모양의 그릇을 의미한다. 한반도의 낙랑과 고구려도 사용하였고 3세기 가야에도 유입되었다. 신라의 기마인물상에도 동복이 있다. 그렇지만 동복은 백제지역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초기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의 쿠르간(Kurgan)은 땅 속에 거대한 목곽을 만들고 그 위를 돌무지와 흙으로 덮은 무덤이다. 왕이 죽으면 땅에 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유해를 미이라로 만들고 수레에 싣고 이웃 부족들에게 갔다. 

 

인간이 죽으면 현세와 같은 내세 생활을 한다고 믿고 저승에서 쓸 물건과 사람을 함께 매장했다. 말은 보통 1~3마리, 고급 쿠르간 7~16마리, 왕의 경우 50마리 이상과 수레를 함께 부장했다. 이러한 고분은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및 내몽고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신라의 적석목곽분도 목관에 시신을 안치하고 머리 쪽에 부장품을 놓았다.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린 후 흙을 부어 거대한 봉분을 조성했다. 그리고, 사후 1주기에 시종 50명과 말 50마리를 순장하고, 권력과 재력의 상징인 3~4kg의 순금제 공예품을 부장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목관이 소멸되어 그 곳에 흙이 덮이면서 돌무데기와 흙이 섞인다. 청주의 봉명동 유적은 환두대도와 마구류를 통하여 유목문화의 확산을 확인할 수 있다. 

 

가야의 순장은 4~5세기 주부곽순장(금관가야), 5~6세기 주곽순장(아라가야), 순장곽 순장(대가야)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18년에 1, 2, 3호분을 시작으로 39호분까지 발굴했었다. 1977년터 재발굴을 하면서 금동관, 철판 값옷와 투구, 토기 등의 부장품을 출토했다. 지산동 30호분은 무덤 주인의 돌널과 순장자 3인의 돌덧널로 구성되어 있다. 44호분은 1기의 주석실과 2기의 부장석실을 구축하고, 36명 이상을 순장했다. 

 

김해 대성동고분은 3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의 목곽묘로 오로도스형 동복(이동식 솥)을 발굴했다. 29호분의 동복(銅鍑)은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이 사용한 금속그릇이다. 금관가야 순장은 안치하는 주곽과 부장품을 넣는 부장곽을 갖추고 있다. 머리맡이나 발치 부분에 순장하고 또한 부곽에도 순장했다. 

 

동복과 순장

 

 

 

 

순장은 특정한 국가나 종족에게 국한되지 않은 보편적인 의식으로 사회의 강한 지배와 예속의 전통이었다. 후에 순장 대신에 무인상과 토우로 대체했다. 진시황릉은 진흙으로 만든 수많은 병마용을 토우를 부장했다. 한나라도 사람을 순장하지 않고 인물과 동물의 모형을 부장했다. 신라와 왜의 무덤에서도 수많은 토우가 발굴되고 있다. 왜에서도 4세기 무렵 순장제도가 폐지되면서 사람이나 동물 모양의 인형인 '하니와(埴輪)'를 묻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전문가 코너

더보기



[이명구 관세청장의 행정노트] 낚시와 K-관세행정
(조세금융신문=이명구 관세청장) 어린 시절, 여름이면 시골 도랑은 나에게 최고의 놀이터였다. 맨발로 물살을 가르며 미꾸라지와 붕어를 잡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허름한 양동이에 물고기를 담아 집에 가져가면 어머니는 늘 “고생했다”라며 따뜻한 잡탕을 끓여주셨다. 돌과 수초가 얽힌 물속을 들여다보며 ‘물고기가 머무는 자리’를 찾던 그 경험은 훗날 관세행정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물가에서는 마음이 늘 편안했다. 장인어른께서 선물해 주신 낚싯대를 들고 개천을 찾으며 업무의 무게를 내려놓곤 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서 낚시와는 자연스레 멀어졌고, 다시 낚싯대를 잡기까지 20년이 흘렀다. 놀랍게도 다시 시작하자 시간의 공백은 금세 사라졌다. 물가의 고요함은 여전히 나를 비워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었다. 낚시는 계절을 타지 않는다. 영하의 겨울에도 두툼한 외투를 챙겨 입고 손난로를 넣은 채 저수지로 향한다. 찬바람이 스쳐도 찌가 흔들리는 순간 마음은 고요해진다. 몇 해 전에는 붕어 낚시에서 나아가 워킹 배스 낚시를 시작했다. 장비도 간편하고 운동 효과도 좋아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걸어 다니며 포인트를 찾는
[초대석] 세무법인 와이즈앤택스 최시헌 회장, 김선명 대표 "변화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최고의 세무서비스"
(조세금융신문=이지한 기자, 사진=이학명 기자) 지난 2023년에 이어 2025년에 치러진 한국세무사회 제33대와 제34대 임원 선거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돼 3년째 주요 회직을 수행해 온 최시헌 부회장과 김선명 부회장이 올해 1월 세무법인 와이즈앤택스를 설립하고 최고의 세무 컨설팅과 세무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꿈을 안고 본격 출범한 지 1년 가까이 됐다. 대구지방국세청장으로 국세공무원을 마감한 최시헌 세무사가 회장직을 맡았고, 세무 고시 출신의 김선명 세무사는 대표세무사로서 법인을 이끌고 있다. 여기에 김준성, 김민식, 박정준, 민규태 세무사 등 4명의 젊은 세무사가 합류해 분당 본점과 분당 서현, 경기 광주, 서울 용산 등을 거점으로 하여 활발한 업무를 전개하고 있다. 낙엽이 거리를 뒤덮고 있던 11월 중순, 분당 본점에서 최시헌 부회장과 김선명 세무사를 만나 와이즈앤택스의 설립 과정을 돌아보고, 향후 법인을 어떻게 이끌어 갈 예정인지 알아봤다. Q. 우선 성공적인 법인 설립을 축하합니다. 올해 1월 각자 활동하시던 세무사사무소를 합쳐서 새로운 세무법인을 설립하셨는데요.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최시헌 회장) 저는 20년 연말 대구지방국세청장을 끝으로 공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