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인구는 국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그 규모에 따라서 한 국가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인구 규모가 크고 지적 능력이 뛰어날 경우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경제와 제도의 안정화를 통하여 발전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다민족 국가나 계급 사회는 사회적인 변화의 약화로 정체되는 특성을 나타낸다. 현대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서로 다른 사회시스템 속에서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고 있다. 그동안 각 국가간 인구성장과 이동정책에서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중세 동아시아 국가의 인구변화에 따른 국력의 변화
기원전 1세기의 한서(漢書)에 낙랑 지역이 6만 2812호, 인구 40여만명이었다. 삼국시대의 인구는 자연출생과 함께 전쟁에서 포로로 끌려가거나 잡혀와서 인구의 변화를 이루었다. 삼국유사에 5~6세기의 인구는 고구려 69만호, 백제 76만호, 신라 17만호로 약 380여 만명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기까지 인구 변화는 크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인구는 약 550만명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농업기술이 발전하면서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던 시기까지 인구는 계속 증가하였다.
그렇지만 임진왜란(1592~1598년)과 병자호란(1636~1637년)으로 조선의 인구는 정체되었다. 왜란과 호란의 여파로 조선은 급격하게 국력과 왕권이 약화되었고, 사대주의를 지향하는 성리학과 진영의 이익을 앞세운 당파싸움이 국가를 흔들었다. 또한 한랭한 기후의 남하로 흉년이 지속되면서 극심한 민심의 이반과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그로 인하여 조선의 인구는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반도가 전쟁으로 인구와 산업에서 정체되는 사이에 중국은 명나라 후기의 1억 5000만 명에서 청나라 시대인 18세기말에 3억 명까지 증가했다. 그리고 19세기 중엽의 청나라 인구는 4억 2000만 명에 이르렀다.
인구 증가로 경제가 발달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면서 세계의 관리자로 나섰다. 정화가 인도양을 원정하고 마테오리치와 같은 사제가 교황의 칙사로 북경을 방문했다. 그렇지만 중국의 인구 증가는 1인당 소유할 수 있는 경작지를 감소키면서 수많은 실업자를 양산하였다.
중국은 인구팽창 과정에서 관리의 실패로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은 인구성장을 바탕으로 15만명에 이르는 대군을 소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 조선의 인구와 국력은 훈련된 10만 대군을 양성하기 어려웠다. 인구가 팽창하자 일본은 제후들에게 줄 토지가 부족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토요토미는 영주와 무사에게 나눠줄 땅을 찾아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장기간의 임진왜란으로 일본도 17세기 전후에 일시적으로 인구가 감소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초 1500만명이던 인구는 경지 면적을 확대하고 농업 생산량을 증대시켜서 18세기 초에 2500만 명까지 증가했다.
인구성장에 의한 자본축적과 삿초동맹에 의한 신질서의 확립
일본은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과 나가사키와 히라도에서 도자기 무역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도 귀국하지 않고 도자기 생산으로 현지에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19세기 중반부터 인구의 성장과 자본의 축적을 배경으로 동아시아 지배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삿초동맹(薩長同盟, 1866년)은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들을 포함한 한반도계 후손들이 주로 살던 지역인 사쓰마 번(가고시마현)과 조슈 번(야마구치현)이 맺은 협정이다. 양 세력은 총 6개항의 밀약에서 에도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의 실권을 인정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즉, 이들은 270년간 지속된 에도막부를 붕괴시키고, 율령반포(701년) 이후 신기관과 태정관으 나줘진 권력을 천황중심으로 집중하는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다.
그리고 1870년대 전후의 정한론(征韓論)도 이 지역 출신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지역 출신들은 한반도에 대한 적개심을 공공연히 드러내기도 한다.
정한론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남아시아까지도 일본의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에 고노에 내각(1940년)이 서구의 근대적 모순을 동아시아적 가치로 극복하겠다는 ‘대동아공영권’으로 발전하였다. 일본은 외교적으로 카쓰라-테프트밀약(1905년)을 맺어서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양국의 각서(memorandum)는 모두 극비로 했기 때문에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은 제2차 영일동맹(1905년)과 포츠머스 조약(1905년)을 차례로 체결하여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주정책을 통한 식민지 운영과 현지화
일본은 증가한 인구를 식민지 개발에도 활용하였다. 1873년 일본은 외국에 나가는 유학생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도입하였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병역을 면제하면서 해외이민을 장려했다. 또한 태평양과 동남아지역에 농산물 생산을 위한 노동력을 공급했다. 과잉인구와 자본주의의 진전으로 농촌이 분해되면서 이민 희망자를 모집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해외에 돈벌러 가려는 사람들이 그 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은 경제적으로 일본열도, 한반도, 요동과 만주를 연결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한반도와 만주는 1911년 11월 압록강 철교로 연결하여 봉천(심양)에서 부산간 직통열차를 운행시켰다(1912년). 신의주발 만주 봉천행 열차가 하루 6편, 봉천발 신의주행 열차가 하루 5편씩 있었다(1923년). 만주철도는 1917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의 철도를 위탁운영하기도 했다.
일본은 본격적으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관동군사령부(關東軍司令部)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만주사변을 계기로 만주국(1931년)을 세우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푸이)를 초대 황제인 강덕제로 즉위시켰다. 푸이는 만주족으로 동북지방의 지지를 받았고, 목초지 때문에 한족과 갈등에 있었던 몽고족도 지지했다. 천자가 수도 100리밖에서 하늘에 보고하는 제사인 고천례(告天禮)와 제천의식을 수도인 신경의 순천(順天)광장에서 거행했다(1934년).
히도라 쓰요시 내각은 20년내 일본인 100만호 500만명을 만주로 송출하여 만주 인구의 10%를 일본인이 차지하는 목표를 세웠다(1936년). 만주국으로 이주했던 일본인들이 패전으로 귀국하지 못하면서 ‘중국 잔류고아·잔류부인 문제’를 일으켰다. 일본과 중국이 1972년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1999년까지 총 6041세대 1만 9252명이 귀국하였다. 2차 세계대전 후에도 일본은 심각한 인구과잉의 해소책으로 이민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동아시아의 인구는 임진왜란으로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15세기부터 조선을 제외하고 인구가 팽창하였다. 조선은 왜란과 호란의 여파로 극심한 사회분열과 빈곤에 따른 민심의 이반으로 긴 암흑기를 거쳤다. 그 사이에 중국과 일본은 인구성장을 계기로 자본을 축적하여 번영을 이루었다.
그렇지만 중국의 인구성장은 제한된 토지에 따른 실업의 발생으로 국력이 약화되면서 열강의 침략과 민란으로 국가를 해체시켰다. 반대로 일본은 인구성장을 토대로 15세기에 동아시아의 패권에 도전하였고, 자본을 축적하여 19세기에 서구열강과 함께 제국주의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과잉인구의 해소책으로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실시하여 현지에서 주요 세력을 형성시켰다. 인구 성장이 국력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와 위협으로 작용한 교훈을 얻고 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경희대 경영학과, 고려대 통계학석사, University of Liverpool MBA,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경희대 의과학박사과정
•국민투자신탁 애널리스트, 동부증권 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한국과학사학회 회원, 한국경영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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