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7 (토)

  • 흐림동두천 29.3℃
  • 흐림강릉 31.2℃
  • 흐림서울 29.7℃
  • 구름많음대전 30.3℃
  • 흐림대구 29.3℃
  • 구름많음울산 30.6℃
  • 광주 27.1℃
  • 구름조금부산 30.1℃
  • 흐림고창 29.7℃
  • 제주 29.3℃
  • 흐림강화 29.0℃
  • 구름많음보은 28.6℃
  • 흐림금산 29.3℃
  • 흐림강진군 29.8℃
  • 흐림경주시 31.3℃
  • 구름많음거제 28.8℃
기상청 제공

[전문가칼럼] 한국사회의 승자독식 세습제도⑦ 역대 마지막 왕들의 초라한 무덤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백제(해씨와 부여씨)와 고려(왕씨)를 건국했던 세력들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비운의 의자왕과 공양왕이 동정심을 얻지 못한 것으로 문헌에 기록하고 있다. 그 마지막 모습이 방탕하거나 비겁하게 그려지면서 백성들의 동정심을 얻지 못하도록 했다. 고려의 광종이 후고구려(태봉)와 후백제의 유산을 말살하고, 조선의 태종도 고려 왕조의 흔적을 지웠다. 구한말의 역사는 없고, 그 후의 산업화 과정만을 칭찬하고 있다.

 

왕권강화에 실패한 의자왕

 

‘삼국사기’는 의자왕을‘과단성있고 용감하며 사려깊은 왕’으로 ‘궁녀들과 술을 많이 마신 적이 있다’고만 기록했다. 왕위를 계승하자 친위정변(親衛政變)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내부의 분열과 민심을 수습했다(640년). 왕권강화에 반대한 좌평 중심의 귀족들을 추방하면서 성충과 흥수도 과감하게 배제했다. 그후 고구려‧말갈과 연합하여 655년까지 신라의 100여개 성을 차지했다.

 

의자왕 시기는 전통 음악의 백미인 정읍사(수제천)를 노래하였고, 최고의 예술품인 백제대향로를 만든 문화의 부흥기였다. 고구려가 비슷한 시기에 내분으로 불안정한 정세였던 것과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의자왕은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13만 대군과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5만 대군에 숫적 열세로 대항하는데 역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던 웅진성에서 성주인 예식진의 배반으로 제대로 항전도 못하고 함락되었다.

 

 

의자왕은 전쟁포로가 된 후에 당으로 압송되었고 얼마 후 병사하여 북망산에 묻혔다. 존재하지 않은‘3천궁녀’는 노래인‘백마강’으로 진짜처럼 되었고, 마치 삼천궁녀를 거느린 것처럼 한량의 방탕군주가 되었다. 의자왕이 낙양의 북망산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낙양시와 부여군이 의자왕의 묘수색을 했지만 찾지 못하고 그곳의 흙을 가져다가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가묘(假墓)를 조성했다.

 

권력투쟁에서 무너진 견훤왕과 공양왕

 

견훤은 중앙에서 파견한 서남해 방수군(防戍軍)으로 강주(진주)에 입성하여 독자세력화를 시작했다. 그는 강주에서 승주로 진격하여 정복하고, 다시 무주(광주)를 차지했다. 백제 때 발라(發羅)였던 금성(나주)에 후백제를 세우고 도성을 전주로 옮겼다.

 

그는 박씨인 선덕왕, 경명왕, 경애왕의 정통성을 문제삼아서 경애왕을 제거하고 김씨인 경순왕을 세웠다. 지역의 민심을 얻어 승승장구하던 견훤도 호족세력의 지원을 받은 왕건의 고려군에 홍성의 운주에서 패한 후 항복을 결정했다(934년). 그러자 장남인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서 실권을 장악하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켰다. 견훤은 석달만에 도망쳐서 왕건에 투항했고, 신검이 황산전투에서 패하면서 후백제가 멸망했다(936년).

 

후백제가 망한 후 얼마되지 않아 견훤도 화병으로‘황산불사(黃山佛舍)’에서 일생을 마쳤다. 황산불사가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고려사’지리지에 그의 무덤이 논산 금곡으로 기록하고 있다. 견훤왕릉은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전견훤묘(前甄萱墓)로 남아있다. 1970년 견씨 문중이 능을 정리하였는데 그 규모는 신라의 왕릉과 비슷하지만 부대시설이 없다.

 

고려사에 공양왕은“인자하고 부드러웠으나 행동은 우유부단했다”라고 평했다. 고려 말기에 왕씨는 지배계층 간 권력다툼으로 13세기 이후 공민왕부터 국왕과 가까운 종친이 거의 없었다. 이성계가 우왕(禑王)을 몰아내고(1388년), 그의 아들인 창(昌)을 왕위에 앉혔다가 밀어내고 제비뽑기로 공양왕을 왕위에 앉혔다(1389년). 그러나, 고려는 존속하기엔 너무 쇠락하였고, 왕실의 권위도 떨어질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갔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1390년)에 참여한 조민수와 재상을 지낸 이색을 몰아냈고, 긴밀한 협력자였던 심덕부를 제거했다. 그리고, 기존 권력가들이 명나라를 끌어들여 이성계를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급진 사대부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말았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한 후 이성계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공양왕은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1392년). 공양왕은 간성군(杆城郡)으로 추방되었다가 삼척부(三陟府)로 옮긴 후 이성계가 왕씨를 제거하라는 신하들의 청을 수락하는 형식으로 처형했다(1394년). 왕릉은 고양 공양왕릉을 공식으로 인정하지만, 그가 처형당한 삼척에도 공양왕릉이 전하고 있다.

 

황제의 무덤과 왕조의 뒤안길

 

고종은 친일세력과 일본군에 의해서 1907년 7월 20일에 강제로 퇴위했다. 이어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였고, 1919년 정월에 승하했다. 우리 나라 유일의 황제의 무덤인 홍릉(洪陵)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이고, 유릉(裕陵)은 순종황제와 순명황후의 능이다.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 아닌 하늘과 땅이 원형인 천원지원(天圓地圓)으로 조성했다. 홍유릉은 마지막 왕들 중에서 가장 화려한 무덤으로 역사는 시간이 지난 후에 재평가하게 될 것이다.

 

백제의 멸망은 귀족들의 의자왕에 대한 불만, 백제의 세력 확장에 불안했던 신라, 고구려 견제를 위한 당나라의 이해관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삼국사기’는 “궁예는 왕도의 정치를 펼칠 능력을 갖지 못했고, 견훤은 통찰력이 부족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역사의 신라의 경순왕만 연민이 느껴지도록 가슴 아프게 서술하고 있다. 공양왕은 타의로 왕에 오른 후 추락한 왕권과 신진세력에 힘써 보지도 못하고 왕조의 마지막 왕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썼다. 성공한 개혁가도 그 배경이나 의미보다 상대의 상처만을 더욱 크게 그린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배너

전문가 코너

더보기



[김우일의 세상 돋보기] 의사의 꿈을 버리고 인류 최고의 지혜를 만든 사람
(조세금융신문=김우일 대우M&A 대표) 의료계의 극심한 반대 속에서도 정부 측의 강행으로 의대증원이 확실시 되어가며 바야흐로 의사 전성시대가 도래되었다. 현재 의대정원 3058명이 5058명으로 대폭 늘어나며 10년 후에는 5만명 이상의 의사가 늘어나게 된 것은 반드시 우리 사회에 포지티브 영향만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존재하듯이 이에도 여러 가지 부작용이 도래될 것임은 명확하다. 첫째는, 의사를 목표로 하는 광풍시대가 사회구조를 더욱 불균형으로 만들 것이다. 오로지 계급 최고의 위치에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 본인을 비롯해 부모들이 더 미친듯이 나댈 것은 지금까지의 입시 흐름을 봐서도 틀림없다. 그래서 흔히 회자되는 의대입학을 위한 반수생, N수생의 폭증이 불 보듯 뻔하며 이 수요는 이공계의 우수한 인재를 거의 고갈시켜 국가과학기술발전에 큰 후퇴를 가져올 것이다. SKY대 등의 이공계 우수인재들이 의대입학을 하기 위해 자퇴를 하고 의대입시 전문학원에 몰려드는 현상이 더욱 심화되는 것은 현재 바이오, AI, 우주, 반도체 등이 글로벌 산업의 중추로 국가간 초경쟁시대에 거꾸로 가는 현상이고 이는 국가미래에 매우 불안한 느낌을 준
[인터뷰] 창립 50주년 부자(父子) 합동 남서울관세사무소 홍영선 관세사
(조세금융신문=이지한 기자) 국내 최초의 부자(父子) 합동 관세사무소인 남서울관세사무소가 지난 5월 12일 하버파크호텔에서 창립 50주년 행사를 열고 혁신과 도약의 100년을 다짐했다. 이 자리에는 특히 장시화·이용철·이영희·김용우·이상태·손종운 씨 등 남서울 창업 멤버가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현재 남서울관세사무소를 이끄는 홍영선 대표관세사는 이날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통해 “남서울관세사무소의 50주년은 관세사회 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뜻깊은 기록이자 커다란 귀감이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전·현직 남서울 식구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믿음으로 다져온 남서울관세사무소의 50년을 보냈습니다. 앞으로 혁신과 도약의 100년을 다짐합니다”라고 전했다. 기념식에는 이승남 국가원로회의 정책위원 겸 KBS 前 국장도 참석해 “지금까지 믿음으로 50년을 지켜온 만큼 앞으로 100년도 믿음으로, 튼튼하게 성장해 나가는 기업이 될 것”이라며 덕담을 전했다. 남서울관세사무소(옛 남서울통관사)는 국내 첫 지하철(청량리역~서울역)인 1호선이 개통되고, ‘K-푸드’의 대표주자로 세계 60여 개 나라의 과자 시장을 휩쓰는 ‘초코파이’가 탄생하던 해인 1974년 5월 10일 고 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