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2 (일)

  • 구름많음동두천 16.3℃
  • 구름많음강릉 20.8℃
  • 맑음서울 19.6℃
  • 흐림대전 17.7℃
  • 구름많음대구 19.4℃
  • 구름많음울산 18.3℃
  • 맑음광주 21.7℃
  • 구름많음부산 21.9℃
  • 흐림고창 18.2℃
  • 맑음제주 20.8℃
  • 구름많음강화 14.2℃
  • 흐림보은 15.5℃
  • 구름많음금산 15.7℃
  • 구름조금강진군 15.8℃
  • 구름많음경주시 15.0℃
  • 흐림거제 18.1℃
기상청 제공

[전문가칼럼] 한국사회의 승자독식 세습제도⑦ 역대 마지막 왕들의 초라한 무덤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백제(해씨와 부여씨)와 고려(왕씨)를 건국했던 세력들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비운의 의자왕과 공양왕이 동정심을 얻지 못한 것으로 문헌에 기록하고 있다. 그 마지막 모습이 방탕하거나 비겁하게 그려지면서 백성들의 동정심을 얻지 못하도록 했다. 고려의 광종이 후고구려(태봉)와 후백제의 유산을 말살하고, 조선의 태종도 고려 왕조의 흔적을 지웠다. 구한말의 역사는 없고, 그 후의 산업화 과정만을 칭찬하고 있다.

 

왕권강화에 실패한 의자왕

 

‘삼국사기’는 의자왕을‘과단성있고 용감하며 사려깊은 왕’으로 ‘궁녀들과 술을 많이 마신 적이 있다’고만 기록했다. 왕위를 계승하자 친위정변(親衛政變)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내부의 분열과 민심을 수습했다(640년). 왕권강화에 반대한 좌평 중심의 귀족들을 추방하면서 성충과 흥수도 과감하게 배제했다. 그후 고구려‧말갈과 연합하여 655년까지 신라의 100여개 성을 차지했다.

 

의자왕 시기는 전통 음악의 백미인 정읍사(수제천)를 노래하였고, 최고의 예술품인 백제대향로를 만든 문화의 부흥기였다. 고구려가 비슷한 시기에 내분으로 불안정한 정세였던 것과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의자왕은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13만 대군과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5만 대군에 숫적 열세로 대항하는데 역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던 웅진성에서 성주인 예식진의 배반으로 제대로 항전도 못하고 함락되었다.

 

 

의자왕은 전쟁포로가 된 후에 당으로 압송되었고 얼마 후 병사하여 북망산에 묻혔다. 존재하지 않은‘3천궁녀’는 노래인‘백마강’으로 진짜처럼 되었고, 마치 삼천궁녀를 거느린 것처럼 한량의 방탕군주가 되었다. 의자왕이 낙양의 북망산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낙양시와 부여군이 의자왕의 묘수색을 했지만 찾지 못하고 그곳의 흙을 가져다가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가묘(假墓)를 조성했다.

 

권력투쟁에서 무너진 견훤왕과 공양왕

 

견훤은 중앙에서 파견한 서남해 방수군(防戍軍)으로 강주(진주)에 입성하여 독자세력화를 시작했다. 그는 강주에서 승주로 진격하여 정복하고, 다시 무주(광주)를 차지했다. 백제 때 발라(發羅)였던 금성(나주)에 후백제를 세우고 도성을 전주로 옮겼다.

 

그는 박씨인 선덕왕, 경명왕, 경애왕의 정통성을 문제삼아서 경애왕을 제거하고 김씨인 경순왕을 세웠다. 지역의 민심을 얻어 승승장구하던 견훤도 호족세력의 지원을 받은 왕건의 고려군에 홍성의 운주에서 패한 후 항복을 결정했다(934년). 그러자 장남인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서 실권을 장악하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켰다. 견훤은 석달만에 도망쳐서 왕건에 투항했고, 신검이 황산전투에서 패하면서 후백제가 멸망했다(936년).

 

후백제가 망한 후 얼마되지 않아 견훤도 화병으로‘황산불사(黃山佛舍)’에서 일생을 마쳤다. 황산불사가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고려사’지리지에 그의 무덤이 논산 금곡으로 기록하고 있다. 견훤왕릉은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전견훤묘(前甄萱墓)로 남아있다. 1970년 견씨 문중이 능을 정리하였는데 그 규모는 신라의 왕릉과 비슷하지만 부대시설이 없다.

 

고려사에 공양왕은“인자하고 부드러웠으나 행동은 우유부단했다”라고 평했다. 고려 말기에 왕씨는 지배계층 간 권력다툼으로 13세기 이후 공민왕부터 국왕과 가까운 종친이 거의 없었다. 이성계가 우왕(禑王)을 몰아내고(1388년), 그의 아들인 창(昌)을 왕위에 앉혔다가 밀어내고 제비뽑기로 공양왕을 왕위에 앉혔다(1389년). 그러나, 고려는 존속하기엔 너무 쇠락하였고, 왕실의 권위도 떨어질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갔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1390년)에 참여한 조민수와 재상을 지낸 이색을 몰아냈고, 긴밀한 협력자였던 심덕부를 제거했다. 그리고, 기존 권력가들이 명나라를 끌어들여 이성계를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급진 사대부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말았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한 후 이성계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공양왕은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1392년). 공양왕은 간성군(杆城郡)으로 추방되었다가 삼척부(三陟府)로 옮긴 후 이성계가 왕씨를 제거하라는 신하들의 청을 수락하는 형식으로 처형했다(1394년). 왕릉은 고양 공양왕릉을 공식으로 인정하지만, 그가 처형당한 삼척에도 공양왕릉이 전하고 있다.

 

황제의 무덤과 왕조의 뒤안길

 

고종은 친일세력과 일본군에 의해서 1907년 7월 20일에 강제로 퇴위했다. 이어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였고, 1919년 정월에 승하했다. 우리 나라 유일의 황제의 무덤인 홍릉(洪陵)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이고, 유릉(裕陵)은 순종황제와 순명황후의 능이다.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 아닌 하늘과 땅이 원형인 천원지원(天圓地圓)으로 조성했다. 홍유릉은 마지막 왕들 중에서 가장 화려한 무덤으로 역사는 시간이 지난 후에 재평가하게 될 것이다.

 

백제의 멸망은 귀족들의 의자왕에 대한 불만, 백제의 세력 확장에 불안했던 신라, 고구려 견제를 위한 당나라의 이해관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삼국사기’는 “궁예는 왕도의 정치를 펼칠 능력을 갖지 못했고, 견훤은 통찰력이 부족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역사의 신라의 경순왕만 연민이 느껴지도록 가슴 아프게 서술하고 있다. 공양왕은 타의로 왕에 오른 후 추락한 왕권과 신진세력에 힘써 보지도 못하고 왕조의 마지막 왕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썼다. 성공한 개혁가도 그 배경이나 의미보다 상대의 상처만을 더욱 크게 그린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배너




[김우일의 세상 돋보기] 대통령의 국정 독대보고, 故김우중 회장 본받아야
(조세금융신문=김우일 대우M&A 대표) 민생문제, 코로나문제, 국제적문제 등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중차대한 시기에 취임 후 첫 번째 이루어지는 대통령의 국정보고가 마치 조그만 가게의 운영방식을 답습하는 듯하다. 진행된 국정보고의 문제점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외한인 장관과 문외한인 대통령의 일대일 독대 방식이다. 이 방식은 형식적인 국정보고를 하고 끝낸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끼리의 보고는 자칫 오도된 결론을 끄집어내 국민을 혼돈에 빠트릴 위험이 크다. 불교경전에 나오는 군맹평상(群盲評象)이 회상된다. 코끼리를 보지 못한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고는 자기의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코끼리를 평했다. 상아를 만진 맹인은 무와 같다, 코를 만진 맹인은 방앗공이, 다리를 만진 맹인은 나무토막, 등을 만진 맹인은 널빤지, 꼬리를 만진 맹인은 새끼줄 같다며 코끼리의 극히 일부를 말할 뿐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유관부처의 실무자들이 빠져있다. 실질적으로 실정을 파악하고 설계를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은 오랫동안 부처에서 잔뼈가 굵은 행정공무원들이다. 흔히 말하는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아닌 늘공(늘 공무원)들인 것이다. 어공인 장관
[인터뷰]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전문위원, 첫 세제개편안…"반시장주의적 요소 넘쳐난다"
(조세금융신문=고승주 기자) 정부가 고금리·고환율·고물가 경제위기에 대응해 감세정책의 시동을 걸었다. 법인세 인하와 다주택자 종부세 중과세 폐지 등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찬성 측에서는 이러한 조치가 곳간에 쌓여 있는 돈을 투자 등으로 흐르게 할 것이란 해석을 내놓는 반면, 거꾸로 돈이 한 곳에 더 고일 것이란 비판도 만만치 않다. 우리의 행동은 앞으로 수년,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1000조에 가까운 사내유보금이 풀려 경제회복을 이끌어낼지 감세 조치로 인한 재정건전성에 미치는 영향은 없는 것인지 조세·재정 전문가이자 시장경제주의자의 진단을 들어봤다. 법인세 Q. 시장주의 입장에서는 돈이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제일 나쁘다고 본다. 윤석열 정부의 첫 세제개편이 고여 있는 돈을 풀리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다. 돈이 고이는 거는 촉진하는데 돈이 빠지는 것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Q. 정부는 법인세를 내리면, 투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보는데. 개인적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말씀드리자면 감세를 해도 장단점이 있고 증세를 해도 장단점이 있다. 감세를 했을 때 장단점이 무엇인지 국민에게 정확하고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장점은 기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