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상현 기자) 정부가 저출생을 ‘국가비상사태’로 규정하고 가칭 ‘저출생대응기획부’를 부총리급 부처로 새로 만든다는 구상을 밝혔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이 많아진다.
교육·노동·복지는 물론이고 사실상 모든 행정부처와 무관치 않은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려면 ‘부처간 칸막이’부터 부숴야 한다. 부처끼리 서로 협력해도 모자를 판에 부처 신설로 풀겠다니. 공동체의 난제를 풀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걸 솔직히 인정한 셈이다. 그래서 더 착잡한 것이다.
한편으로 첫단추가 잘못 끼워진 나라 행정의 실타래를 풀 엄두가 나지 않으니 오죽했으면 저런 방향을 잡았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없지 않다. 하지만 수십조원을 투입하고도 저출생 가속화를 막지못한 지난 정부들 아닌가. 부처신설 발상을 접하고 정책실패의 ‘기시감’부터 드는 것은 비단 기자만이 아닐 것이다.
부처 신설보다 “다른 정부 부처와 협력을 잘 한 공무원들이 더 높은 인사고과를 받도록 하면 된다”는 ‘뿌리규칙(Ground rules)’을 공고히 해야 한다. 물론 조선시대이래 이어져온 ‘이호예병형공’의 카르텔을 깨는 게 쉽겠는가. 하지만 그걸 깬 효과가 나와야 실제 출생률이 바닥을 찍고 반등할 수 있다. 그게 핵심이다. 저출생 정책수립을 위해 선뜻 책상에 올려놓지 못하는 진짜 불편한 진실들이 도처에 즐비하다.
한국사회 저출생 원인으로 수도권에 집중된 일자리와 이에 따른 높은 주거비(주택가격 등),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 등이 지목된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가장 적나라한 각도(angle)에서 바라봐야만 뚜렷하게 핵심이 보인다. 핵심은 바로 ‘경제의 양극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구체적으로 해당 종사자들의 양극화가 바로 저출생 사회의 가장 적나라한 원인이다.
보험업계 사람을 만나 들은 얘기다. 국내 최상위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2023년 결산에서 나란히 엄청난 실적을 뽐냈다. 삼성생명은 7년만에 최대 수익을 달성, 생보사 중 유일하게 ‘연간 당기순이익 2조 클럽’ 목전에 섰다. 삼성화재 역시 연간 세전이익으로는 창사이래 첫 2조원을 넘어서며 ‘폭발적 성장세’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최고 보험회사들의 영예가 중소협력업체들의 헌혈로 이뤄졌다면 어떨까. 물론 어떤 미디어도, 단 한줄도 그런 불편한 얘기를 다루지 않았다.
콜센터 업무와 손해사정업무는 삼성그룹 보험사들이 외주로 진행하는 대표적인 분야다. 삼성은 이들 협력업체의 외주비용을 꾸준히 줄여왔다는 게 당사자인 외주사들의 주장이다. 낮지만 처절한 비명이다. 한국에서 삼성과 협력하면서 누가 감히 또렷하고 큰 소리로 불만을 표하겠는가.
기자와 만난 삼성 외주업체 직원은 술 몇 잔을 비우고서야 “삼성이 외주비용 총액을 깎았다”고 털어놨다. 이 직원은 “비단 삼성만 그런 게 아니다. 콜센터와 손해사정을 외주하는 대부분의 보험대기업들이 협력업체에 주는 비용을 깎아 실적잔치를 벌이고 있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소비자물가가 많이 올라 외주사 임직원들의 실질임금이 사실상 급감하고 있다. 이 와중에 원청사가 외주비(외주사 임직원의 명목임금)를 후려친다는 증언이었다.
10년째 대기업 보험사 외주업체에서 일하며 부장까지 승진한 이 직원은 40대 초반에 이르도록 ‘결혼할 결심’을 못했다. 개인사 측면도 있겠지만, 같은 기간 삼성생명이나 삼성화재 본사에서 일한 또래 직원의 인생사와는 전혀 다른 맥락일 것이다.
생각할수록 더 불편해지는 얘기도 있다. 건설 대기업인 부영그룹이 2021년 이후 출산한 임직원 70명에게 ‘출산장려금'으로 각각 1억 원씩 총 70억 원을 쐈다. 기획재정부는 출산장려금을 비과세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며 반겼고, 그 약속을 ‘칼’ 같이 지켰다. 1억원 지급 때 증여세·근로소득세·법인세 등으로 최대 약 4000만원의 국세가 부과될 수 있었지만, 정부가 출산장려금에 대한 관련 세금 전액을 면제해주기로 한 것이다. 실제 부영그룹 이중근 회장이 방송에 나와 “10% 증여세 물 각오로 본인(아기)에게 직접 줬는데, 정부가 잘 조치해줘서 아이 낳은 부모(직원) 소득세로 잘 처리했다”고 밝혔다.
1억원을 받으면 ‘자녀 낳을 결심’을 할 수 있다는 사람이 꽤 된다고 하는 정부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하지만 이 얘기는 생각할수록 불편하다. 자녀 낳은 부모 실수령액 기준 1억원을 줄만한 대기업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전체 국내기업 중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99.9%, 종사자 비율은 81%에 이른다. 2022년 기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는 이미 2.1배다. 이미 2배 남짓 더 버는 대기업 종사자가 자녀출생 축하금으로 1억원을 받는다. 정부는 이 축하금에 대한 세금을 깎아준다. 누군가 덜 낸 세금은 반드시 다른 누군가가 더 내야 한다. 근로소득세만 보자면, 대기업 종사자가 감면받은 축하금에 대한 세금을 중소기업 종사자가 대신 내는 셈이다.
공동체 인구가 유지되는 합계출산율이 2.1명이라고 한다. 20%의 대기업 종사자만 지원하는 한국사회에서 80%의 중소기업 종사자가 ‘결혼과 자녀출생을 도모할 결심’조차 못한다면, 대기업 종사자 1인당 얼추 10.5명을 낳아야 인구가 줄지 않는다.
다른 불편한 얘기는 좀 조심스럽다.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12월 역내 시장점유율 1위를 자랑하던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했다. 대신 미국에서 자동차를 많이 팔아 지난해 역대급 실적을 자랑했다. 그런데 지난 4월 기자가 만난 한 국세청 고위공무원은 “현대차 러시아공장에 부품을 납품해온 2차 협력업체 사장이 ‘작년 영업이익이 전년대비 60억 원이나 줄었다’며 깊은 한숨을 쉬더라”고 귀띔했다. 이처럼 외교·안보 문제에 따른 충격은 대기업 본사보다 협력업체에 더 직접적이다.
정리해 보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종사자간 명목임금 격차가 이미 2배다. 자녀출생축하금 세제혜택은 대기업만의 얘기다. 편중된 세제혜택은 두 집단간 실질가처분소득 격차를 더욱 벌린다.
외교·안보상 이유로 대기업이 매출 기회를 잃으면 국가가 대체판로를 마련해준다. 해외투자 효과가 사라져 국내로 되돌아오는 기업(U-turn)을 위한 보조금도 책정된다. 대기업 종사자가 자녀를 낳으면 세제혜택을 준다. 반면 99.9%의 중소기업 종사자 80%의 근로소득자들은 대기업에 견줘 반토막인 명목임금을 받으면서 세제혜택 받을 일이 없다. 게다가 줄어든 세수를 메워야 한다.
정부는 이런 와중에 세금 쓸 일을 늘리는 거대 부처를 신설하려고 한다. 국무조정실 중심으로 부처끼리 잘 협조해 국가적 난제(저출생)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말이다. 종합부동산세 폐지, 상속세 인하 등 세수 감소가 불보듯 뻔한 상황에서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누군가 덜 낸 세금은 나머지가 더 내야 한다. 서민들만 죽어난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 문제를 통찰적으로 보는 전문가도 언론인도 별로 없다. 이게 2024년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한국의 저출생 문제는 이런 문제들이 중첩, 누적된 결과다. 따라서 해법도 복합적, 단계적이어야 한다.
단언컨데, 부처간 칸막이를 부수지 않는 정부는 저출생 문제를 풀 의미도 능력이 없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를 막지 못하는 정부가 저출생 문제를 풀 매듭을 풀 가능성은 희박하다.
국가는 외교·안보적 사건때문에 손해를 본 중소기업들에게 확실히 보상해야 한다. 80%의 중소기업 종사 자들이 ‘모든 면에서 차별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회는 신뢰가 바닥 난 사회다.
전문가와 언론인은 인기와 돈을 위한 셈법 대신 스스로 공동체의 문제를 통찰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을 갖췄는지 새삼 되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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