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문화

[전문가 칼럼] 마한‧가야‧왜의 관계, 옹관묘와 전방후원분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한반도 남부와 일본의 큐슈는 고대 문화를 공유하면서 활발한 교류로 서로 협력했었다. 양 지역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유적이 많고, 역사적으로 풀리지 않은 흔적들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교류의 흔적으로 보이는 서로 비슷한 유물이 양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왜는 가야, 마한과 교류하면서 발전을 이루다가 4세기 중반부터 백제중심으로 바뀌었다. 고대 한반도 남부와 왜의 큐슈와 문화적으로 유사성이 가장 큰 부분이 무덤양식이다.

 

토기문화의 흔적, 항아리와 옹관묘

 

옹관은 초기 철기시대에 생활 용기에서 묘제로 변하여 전용의 U자형으로 발전했다. 세계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묘제로 기원전 6000년경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시작하여 동아시아 전역에 확산되었다. 초기 철기시대는 부장품을 묻지 않다가 3세기부터 토기, 구슬, 철기 등을 함께 사용했다. 영산강 유역은 대형 옹관과 옹관 고분이 형성되어 있다. 후에 이 지역의 고분은 석실에 옹관을 배치하는 석실분과 옹관묘의 혼합된 양식이 나타나기도 한다.

 

옹관묘는 마한지역의 보편적인 묘제로 4세기에 대형화되면서 U자형으로 바뀌었다. 여러 개의 옹관들이 한 곳에 발견되면서 가족이나 씨족의 합장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5세기 거대한 고분은 2~3미터 크기의 대형 옹관 2개를 짝지었다. 옹관의 바닥에 원문(圓文)이 음각되었고, 6세기에 U자형의 형태에서 원문이 사라졌다. 옹관 입구는 판석 1매 또는 작은 돌로 막거나 이음식 옹관은 한쪽에 구멍을 내고 판석으로 막았다.

 

반남고분군은 12기의 고분으로 원형‧방대형‧사다리꼴 등의 길이 11미터 내외(2호분)에서 47미터 내외(9호분)에 이르는 규모다. 고분은 낮은 구릉에 분포되어 있는데 8호분에서 4기의 옹관(甕棺)과 단지‧뚜껑‧대접‧유리‧옥 등이 출토되었다. 9호분은 9기의 옹관과 함께 금반지‧큰칼‧구리팔찌‧유리구슬‧토기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일본은 조몬시대에 일상 토기로 유아의 매장 혹은 화장에 사용했다. 야요이시대의 성인용 대형 옹관묘가 큐슈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베트남은 기원전 1000년부터 형성된 사후인(Sa Huynh)문화에서 옹관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화장한 시신은 U자형의 큰 항아리에 넣어서 모자 형태의 뚜껑을 덮은 후에 옹관을 세웠다. 옹관묘는 일정기간 돌 방의 석실분과 함께 혼용되다가 사라졌고, 그리고 돌방무덤은 그 형태가 장고형으로 변했다.

 

 

 

 

열쇠구멍 모양의 전방후원분

 

전방후원분은 앞쪽에 사각형(방)의 제단을 만들고 뒤쪽에 시신을 안치하는 둥근(원) 봉분을 조성했다. 사각형의 봉분과 원형의 봉분은 주위에 물로 채워서 해자를 둘렀다. 고분이 조성된 3세기 중반부터 7세기 초까지 왜의 고분시대로 부른다.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었고 고도의 토목 기술을 사용하였다.

 

3세기 중엽부터 구릉에 전방부가 낮은 형태로 조성되다가 5세기부터 평야지대에 조성되면서 대형화되었다. 전방부가 6세기부터 후원보다 커졌다. 오사카 다이센료고분(仙陵古墳)은 길이 525미터, 높이 39.3미터로 피라미드, 진시황릉과 함께 세계 3대고분에 포함된다. 큐슈의 사이토바루고분군은 해자가 없는 전방후원분 31기로 대규모 고분이다. 왜에서 대왕의 칭호가 천황으로 바뀌는 시기에 전방후원분에서 원형분으로 전환되었다.

 

 

 

나주 신촌리와 덕산리 고분은 6세기에 만들어서 해자를 둘렀다. 한편, 영광 월계고분은 산의 구릉지에 구축된 초기 전방후원분이다.

 

한반도 전방후원형분의 유래로 왜인설은 축조 세력의 주체로 왜계 백제관료, 현지에 이주한 왜계 집단, 마한계 왜인 등으로 구분한다. 재지수장설은 백제와 독립된 현지 수장 세력이 왜의 문화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이 왜와 교류하면서 독자적인 거대한 고분을 축조했다.

 

한반도에 전방후원분이 먼저 조성되었다는 증거를 찾아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반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은 일본보다 늦은 5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되었다. 백제가 지방통치제제를 정비하고 영산강 유역을 지배하면서 전방후원분도 사라졌다.

 

 

 

왜의 전방후원분에서 출토된 토기가 영산강 유역에서도 발견되었다. 전방후원분인 후나야마(船山)고분에서 발굴된 금동신발이나 금동관은 무령왕릉이나 익산고분에서 나온 유물과 비슷하다. 백제와 가야 양식의 은도금 환두대도가 일본 기리시마산 횡혈식 고분에서도 발견되었다.

 

고분의 양식은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고대에 문화적으로 교류한 흔적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 큐슈 지역은 발굴하지만 아스카 지역은 고분의 발굴을 금지하고 있다.

 

고대 한반도와 큐슈는 남해를 중심으로 마한, 가야, 왜가 서로 문화를 전달하거나 공유하면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복하고, 목라근자가 가야 7국을 평정하면서 백제가 중심이 되었다.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옹관묘와 전방후원분도 사라지고, 백제에서 유행한 횡혈식 석실분이 큐슈를 비롯한 일본열도에 나타났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배너

전문가 코너

더보기



[데스크칼럼] 관치금융의 덫에 걸린 농협금융
(조세금융신문=양학섭 편집국장) 최근 농협금융지주와 대주주인 농협중앙회가 NH투자증권 사장 인선을 놓고 갈등을 빚은 바 있다. 여기에 금감원까지 가세하면서 관치금융에 대한 논란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NH투자증권 정영채 사장의 연임 도전과 관련이 있다. 정 전 사장은 옵티머스 펀드 사태를 일으켜 금감원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은 장본인이다. 여기에다, 폐쇄적인 조직운영, 개인 사법리스크 등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6년간 장기 집권에 성공한 저력을 보였다. 그러나 증권사태가 범농협 차원의 규제 리스크로 확산되는 가운데 정영채 전 사장이 4연임에 도전하자, 대주주인 농협중앙회가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쟁점을 살펴보면, 농협중앙회는 이번에는 농협 출신 인사를 추천해 NH투자증권의 내부통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반면, 이석준 농협금융지주 회장은 자본시장 전문가를 앉혀야 한다고 반발하면서 농협중앙회와 마찰이 일어난 것이다. 전문성이 중요하다는 이석준 지주회장의 말도 일리가 있고, 범농협 차원의 리스크관리가 중요하다는 대주주의 판단도 일리가 있다. 참고로, 농협중앙회는 농협금융지주 지분 100%를 소유한 1인 최대 주주다. 문제는
[인터뷰] 임채수 서울지방세무사회장 권역별 회원 교육에 초점
(조세금융신문=이지한 기자) 임채수 서울지방세무사회장은 지난해 6월 총회 선임으로 회장직을 맡은 후 이제 취임 1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임 회장은 회원에게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지방회의 가장 큰 역할이라면서 서울 전역을 권역별로 구분해 인근 지역세무사회를 묶어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 회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올해 6월에 치러질 서울지방세무사회장 선거 이전에 관련 규정 개정으로 임기를 조정해 본회인 한국세무사회는 물론 다른 모든 지방세무사회와 임기를 맞춰야 한다는 견해도 밝혔다. 물론 임원의 임기 조정을 위해서는 규정 개정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임기 조정이라는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처음이라 주목받고 있다. 임채수 회장을 만나 지난 임기 중의 성과와 함께 앞으로 서울지방세무사회가 나아갈 길에 대해 들어봤다. Q. 회장님께서 국세청과 세무사로서의 길을 걸어오셨고 지난 1년 동안 서울지방세무사회장으로서 활약하셨는데 지금까지 삶의 여정을 소개해 주시죠. A. 저는 1957년에 경남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 그랬듯이 저도 가난한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때의 배고픈 기억에 지금도 밥을 남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