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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문가 칼럼] 향촌의 자치적 교육기관 서당의 가치, 평해구씨 집성촌 대곡서당과 구병대의 홍주의병 활동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서당은 16세기에 향촌의 민간교육을 담당하면서 특히 집성촌인 씨족 사회를 규율하고 세력을 규합하였다. 집성촌인 충남 서천군 문산면 은곡리(한실)는 400여 년 전에 대곡서당을 설치하여 지역인재를 육성하였고, 구한말 의병활동에도 참여하면서 민족정신을 실천하였다.

 

대곡출신의 구병대 선생은 민종식의 홍주의병에 대곡서당을 숙영지로 제공하였고, 강습생들을 의병에 참여시키면서 군수품 조달에 앞장섰다. 서당은 교육적 기능과 사회활동을 위한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신교육에 밀려 사라지면서 보존해야 할 서당의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도 소멸되고 있다.

 

16세기 사림파에 의한 서당의 확산

 

서당은 초등교육기관으로 설립에 필요한 기본재산이나 법률적 인가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뜻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서당을 세워서 운영하거나 사정에 따라 해체할 수 있었다. 16세기 사림파가 지역에 유교적 질서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성리학 공부나 과거 응시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주로 지역 내 유력한 가문이나 씨족을 중심으로 몇 개의 자연 부락이 결합하여 서당을 설립하였다.

 

18세기 후반기에 서당 설립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종손을 중심으로 종중에서 공동관리로 운영하였다. 따라서, 강학(講學)기능 이외 문중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집행기능도 동시에 수행하였다. 각 문중은 신분 유지에 필요한 선조에 대한 제사 기능을 두기도 하였다. 서당의 제사는 선조 또는 종족으로 한정하면서 혈연 중심의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하였다. 필요한 경비는 문중별로 갹출하고 공동관리의 토지를 소유하여 경영하였다.

 

서당의 인적 구성은 훈장‧접장‧학도로 이루어진다. 훈장은 그 자격이 천차만별이었으며, 경전의 주석과 언해를 보고 그 글의 뜻을 해석하는 정도였다. 접장은 일종의 보조교사이며, 학도 가운데서 나이와 지식이 많은 사람 중에서 세웠다. 스스로 훈장에게 수업을 받으면서 자신이 속한 ‘접’의 하급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학도(또는 학동)는 7~8세에 입학하여 15~16세까지 이어졌고, 남학생 위주의 교육이 원칙이었다.

 

일제강점기의 개량서당은 근대교육의 교과를 도입하고, 교원은 근대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선발하였다. 서당은 일본의 동화정책에 대항하는 장소로 이용되었고, 민중의 마지막 교육기관이 되었다. 일제 총독부의 통계에 1921년 서당 수 2만 5482개 소, 학동수 29만 8067명까지 증가하였다가, 1922년부터 매년 감소하여 1940년 서당수 4105개 소, 학동수 15만 8320명으로 축소되었다. 해방 이후 학제가 정비되면서 학교 교육을 보조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평해구씨 집성촌 대곡서당

 

대곡(한실)은 구맹전(丘孟傳) 선생이 1506년 중종사화를 피해 서천으로 낙향하면서 정착한 곳으로 이후 평해구씨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그 후 이곳에 대곡서당(大谷書堂)이 설치되었는데, 구희로(丘希魯, 1514~1574) 선생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의 묘지명은 “대곡서당 인근의 사방에서 배움을 청하는 자가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구경천(丘擎天, 1783~1854) 선생이 1803년에 혼탁한 세상을 개탄하고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면서 1815년 봄에 대곡서당을 재건축하고 후학을 가르쳤다(大谷書堂記, 1975). 재건축 후 50년이 지난 1875년에 훼손에 따른 기능 상실로 규모를 더 확장하여 중수하였다. 그리고, 구경천 선생의 호(號)를 따라서 운포서당(雲圃書堂)으로 고쳐 불렀다.

 

구한말 대곡서당 출신의 구병대(丘秉大) 선생은 의병활동에 앞장섰고, 일제강점기에 대곡서당은 지역 선각자들이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청년들에 대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습대상자들은 남녀 청년들로 신간회 소속의 영흥회(永興會)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신간영흥설치대회(新幹永興設置大會)를 개최하였다(동아일보, 1927.10.04.).

 

일제 강점기에 4년제 문산보통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대곡서당에서 글을 읽고 쓰는 강습으로 문맹을 퇴치하고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였다. 일제 강점기 대곡서당(구병호 선생)에서 한문학을 수학한 인재들이 해방 이후 경찰에 투신하였고, 그 중에 충남의 여러 지역 경찰서장을 최종열(崔鍾烈) 총경을 배출하였다.

 

 

대곡서당 홍주의병 구병대

 

구병대(丘秉大, 1858〜1916) 선생은 대곡(大谷, 한실, 현재 서천 문산 은곡리)부락의 대곡서당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1891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과거시험보다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에 힘을 쏟았으며, 연제 송병선(宋秉璿) 문하생들과 교류하였다. 조선과 일본간 1.2차 한일협약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참판 출신의 민종식(閔宗植)이 홍산 지티에서 2차 홍주의병을 일으킬 때 대곡서당을 의병의 숙영지로 제공하고 그도 의병에 참여하였다.

 

민종식은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청양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각처의 의병들로 조직된 연합 홍주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홍주의병은 1905년 11월 17일 체결된 을사늑약에 맞서 일어난 을사의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성공적으로 항전을 벌였다. 1906년 5월에 내산면 지티리에서 봉기하여 의병들을 홍산(鴻山)에 집결시켰고, 서천(舒川)‧비인(庇仁)‧판교(板橋)‧남포(藍浦)‧보령(保寧)‧청양(靑陽) 등 서부 일대를 거쳐서 그 중심지인 홍주(洪州)를 점거하였다.

 

구병대 선생은 민종식의 의병과 뜻을 같이하면서 대곡서당의 제자들을 포함한 1천여 명을 규합하여 서천군수 이종석(李種奭)을 감금하고, 무기와 식량 등을 확보하였다. 민종식의 홍주의병에 합류하여 홍주성을 점령하였으나 일본군대의 지원으로 실패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곡서당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민족과 국가를 위한 애국자를 키웠고, 그의 정신은 항일운동과 3‧1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서천 지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시 우세(憂世)에서 구한말 나라가 기울어가는 상황을 걱정하였다. 그가 살아가면서 어질고 밝은 임금을 만나길 원하였지만 현실을 정반대로 흘러갔다. 몸은 늙어 병들고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의기를 쫒으려 술을 마신 후 용기를 내어 호방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광풍과 세찬 비바람 속에 백성이 먹고 살아갈 언덕에 자라는 보리가 견디어주길 바라면서 나라가 없는 어둡고 즐거움 없는 암담한 세상에 대한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다.

 

憂 世

 

吾生但願聖明遭 空作多年一野曹

形容非是綠詩瘦 意氣從看借酒豪

殘花猶恐狂風損 隴麥堪忺夜雨膏

此世頓無陽界樂 所聞日日動時騷

 

대곡서당(현재 雲圃堂)은 1875년에 중수한 후 구병도(丘秉度, 1883〜1958) 선생께서 1947년 11월에 대곡서당기(大谷書堂記) 현판의 글씨를 썼고, 1954년 2월 7일에 재건축하였다. 그러나, 복원된 건물은 농촌의 노령화와 인구감소로 관리자를 구하지 못하여 관리 소홀로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지역의 인재를 육성하여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고 홍주의병 구병대를 배출한 곳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초라하고, 문화유적이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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