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구기동 교수) 중화는 유교의 이념을 바탕으로 천하와 중원의 중심을 나타내는 관념론적인 무형의 상징어이다. 서경(書經)의 필성오복도(弼成五服圖)는 기원전 6세기 고대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다.
이 그림은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따라서 중심에 작은 직사각형을 놓고 바깥에 더 큰 직사각형을 차례로 배치하여 땅을 표시하였다.
각각의 직사각형은 주요 지역을 나타내는데 중심인 황제가 사는 제도(帝都), 황제의 직할지인 전복(甸服, 경기지역), 경대부와 제후의 지역인 후복(侯服), 문무가 다스리는 수복(綏服), 그리고 동쪽 오랑캐의 요복(要服)과 남쪽 오랑캐의 황복(荒服)으로 확장된다.
중화 중심주의 속에서 중국은 지난 2000년 동안 거의 비슷한 규모로 중원을 다스렸다. 중원은 긴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종족들을 흡수하고 동화시켜 왔다.
이 지역의 지배자는 특정 한민족이 아니라 이민족이라도 중원을 통일하면 지배자의 정통성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사고가 중국이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다스려야 하는 어려움 속에도 단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또한 이것은 무력으로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한 민족이나 국가와 차별화되는 점이다. 그리고, 개별 구성원은 개인의 자치권이나 주체성보다 전체의 조화와 균형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주변 민족과의 관계는 세계의 중심으로 중화(中華)를 가운데 놓고 사방에 4개의 이민족(四夷)을 놓는다. 이민족은 사방에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구분하였다. 중원과 이민족은 유교의 위계질서 속에서 책봉과 조공을 그 작동 원리로 하고 있다. 이것이 주변 지역을 종속화하면서도 반란이나 소국의 발생을 억제하는데 기여하였다.
동이는 특정 민족이 아니라 중원의 동쪽에 살던 이민족을 지칭했지만 한나라 이후 요동, 한반도, 일본 등으로 확대되었다. 삼국지(三國志)는 동예, 부여, 고구려, 옥저, 왜를 동이로 기록하였다. 진서(晉書)는 부여, 마한, 진한, 숙신씨, 왜인 등을 동이라 하였고,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을 동이전에 포함시켰다. 중원고구려비는 신라를 동이라 칭했고, 조선은 일본을 동이라 하였다. 일본도 북쪽의 아이누족을 에조(蝦夷)라 하였고 그들의 토벌대장을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으로 불렀다.
한반도에서 소중화의식이 고조선의 기자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고려가 평양을 통치하면서 기자에 대한 역사의식이 표출되었고, 조선은 기자조선 계승의식을 중시하였다. 조선에서 단군은 동방에 처음 천명을 받은 임금이었고, 기자는 처음 교화를 일으킨 임금으로 내세웠다. 성리학속에서 기자숭배의 사대주의는 민족의 독자적인 역사 정체성을 희석시켰다. 송시열(宋時烈)은“기자로 인하여 조선의 예의 나라가 되었다”고 숭상하였고, 임진왜란 때 군사를 파견한 명나라 신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만동묘를 세웠다.
몽골어로 오량카이(Uriyanqai)는‘숲 속의 사람들’이며, 퉁구스어로‘순록치기’이다. 한반도는 소중화의식속에 중국외의 북방민족과 이민족을‘오랑캐’로 부르면서 우월의식을 표출하였다.
고려시대에 처음 오랑캐라는 언어가 나타났고, 조선 초기에 만주 일대의 거주자를 오랑캐라고 불렀다. 그 후 북쪽의 여진족들이 끊임없이 괴롭히자 오랑캐는 야만과 폭력을 상징하게 되었다. 조선은 조공과 책봉으로 소중화 의식을 얻어서 주변 민족과 차별화하려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지금도 혼재된 역사의식으로 중화주의를 차용하여 단일민족과 배달민족을 강조하고 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경희대 경영학과, 고려대 통계학석사, University of Liverpool MBA,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경희대 의과학박사과정
•국민투자신탁 애널리스트, 동부증권 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한국과학사학회 회원, 한국경영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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