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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동아시아 자본의 빅데이터, 부여백제 여행]⑫고대 동서자본의 형성과 실크로드의 역할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인류는 빙하기가 끝나자 아프리카를 떠나 세계 각지에 정착하였고, 각자 이룩한 문명교류의 흔적은 실크로드(바닷길, 오아시스길, 초원길)을 따라서 이루어졌다. 초기에 문명의 이동은 한 쪽에서 다른 쪽에 일방적으로 전달되다가 후기 문명이 성장하여 초기 문명을 앞지르는 문화의 역전현상을 보이면서 상호 발전해 왔다.

 

고대 동아시아의 문명(비단, 종이, 화약, 나침반, 도자기 등)이 실크로드를 따라서 유럽에 전달되었고, 이러한 혁신을 이용한 중세의 아라비아인과 유럽인들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서 동양으로 역수입되었다. 동서문명은 초원길과 오아시스길을 통하여 다양한 문화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장기적인 발전의 자본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특히, 고대 동아시아는 화폐를 유통하고, 조류와 해류를 이용한 해양길을 따라서 교역으로 자본을 축적했다.

 

 

실크로드의 발달과 문명의 동서교류

 

문명 교류에서 실크로드는 아시아, 아프리카 및 유럽을 서로 잇는 동서 교통로였다. 독일의 지리학자였던 리흐트호펜(F.Richthofen)이 19세기 후반에 중국에서 인도로 수출되던 비단의 교역로를 ‘자이덴슈트라센(실크로드)’이라 했다. 그 후 독일의 헤르만(Hermann)이 1910년 중국의 견직물이 발굴된 시리아까지 이 길을 연장했다. 동서문명의 교류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스탄불과 로마까지 더 연장되었다.

 

실크로드는 초기에 유목민족에 의하여 개척되었다. 유목민족들은 초원지대(Steppe)인 북위 40~50도 사이의 산림지대와 사막지대를 동서로 이동하면서 생활했다. 교역로가 중앙아시아의 여러 오아시스를 연결하였기 때문에 ‘오아시스길(Oasis Road)’이라고 했다. 한편, 실크로드뿐만 아니라 새로운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지대를 지나는 초원길(Steppe Road)과 지중해에서 말레이반도, 중국에 이르는 해양길(Sea Road)도 실크로드에 포함되었다.

 

유목민족은 부족 여인들의 다산을 통하여 노동력을 확보하면서 전쟁과 정복에 의한 노예로 보충하였다. 모계사상과 여성숭배로 비너스상(Venus)을 만들고 이들이 지났던 초원길에 그 흔적을 남겨 놓았다.

 

비너스상은 약 2만 5000년 전부터 르네상스시대까지 제작되었고, 다양한 모습으로 유라시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1979년 요녕성에서 발굴된 비너스상은 임산부의 모습으로 약 5000년 전에 제작되었고, 시베리아 유목민족인 홋카이도 아이누족도 비너스 여신상을 남겼다. 또한 동아시아의 고유한 상징물인 세발달린 까마귀인 삼족오(三足烏)가 동유럽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해양길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양에서 아라비아반도 또는 대서양에서 유럽에 이르는 길이다. 계절풍과 해류를 이용하는 항해술이 대항해시대 이전부터 동아시아에서 아라비아까지 이어져 있었다. 계절풍은 밀도가 작은 뜨거운 물이 올라가고, 밀도가 큰 차가운 물이 내려가는 대류 현상으로 발생한다. 겨울에는 대륙에서 해양으로, 여름에는 해양에서 대륙으로 계절풍이 분다. 또한 해류도 따뜻한 물이 올라오고 찬물이 내려가면서 이동한다.

 

일시적으로 추위가 남하한 당나라시대는 비단길이나 초원길보다 해양길의 활용이 활발했다. 항해는 주로 겨울철의 북동계절풍과 한류를 이용하여 동아시아에서 아라비아로 이동했고, 여름철 남서계절풍과 난류를 이용해 반대로 아라비아에서 동아시아로 회항했다. 아라비아에서 한반도까지 오는 비단길은 9000킬로미터로 편도 6~7개월 걸리지만 해양길은 훨씬 이동 기간을 단축시켰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중국 동남부에 정착하여 대규모 이슬람공동체를 형성했다. 당나라에서 신라인 거주지는 ‘신라방(新羅坊)’이라 불렸고, 아라비아인 거주지는 ‘번방(蕃坊)’이라 했다. 일부 아라비아 상인들이 한반도까지 와서 광범위한 물물교환을 했다. 그 교역의 흔적은 경주에서 발굴된 다양한 서아시아 교역품과 양식 기법, 괘릉의 이방인 석상, 처용 설화 등으로 알 수 있다. 비단길, 초원길, 해양길은 자엽스럽게 동서자본의 형성을 촉진하였다.

 

인도양 항로의 개척과 말라카의 번성

 

동아시아와 아라비아간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유럽은 중세의 암흑기와 십자군 전쟁으로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었다. 그 당시 교역은 이탈리아 상인이 지중해에서 아라비아 까지를 담당했다. 그리고, 아라비아 상인이 홍해나 페르시아만에서 순다열도 까지를 맡았다. 대다수 유럽인들은 이탈리아 상인들과 아라비아 상인들이 가진 교역의 독점을 해소하고 싶었다.

 

이 때 마르코폴로의 중국 여행기(1271~1295년)인 ‘동방견문록’이 나오면서 더 넓고 부유한 땅인 동아시아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 결과 15세기 말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라비아를 거치지 않는 인도양 항로를 개척하려고 노력했다.

 

말라카 해협(Strait of Melaka)은 인도와 페르시아를 거쳐서 지중해를 연결하고, 다시 베트남을 거쳐서 동아시아를 잇는 중심지였다.

 

말라카는 15세기 중반이후 아시아 무역의 중심지로 동서양의 상인들이 몰려들면서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자본가가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고 전문 판매상이 무역품 판매를 담당했다. 말라카 왕족들은 고대 아랍문자로 장식된 비석을 대량 수입하여 여기에 왕들의 역사를 기록했다. 명나라의 정화는 계절풍을 이용하여 1405~1433년까지 7차례 인도양을 원정하였는데 원정대 일부가 말라카에 정착하였다.

 

 

또한 콜룸버스도 이 지역을 가기위해 대서양을 출발하였다가 1492년 서인도제도를 발견했고, 바스코 다가마가 1498년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면서 아시아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포르투갈은 1505년 말라카를 정복하였고, 1543년 일본 히라도(平戶)에 무역기지를 세웠다. 또한 1577년 마카오를 조차하여 중국 교역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말라카는 스페인의 마드리드, 멕시코의 아카풀코, 필리핀의 마닐라, 그리고 중국의 장주와 마카오를 연결하는 교역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었다.

 

그 당시 후추(pepper)가 해상길의 가장 중요한 거래 품목이었다. 유럽인들은 후추의 획득과 상품 판매의 소비시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아시아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 중심지였던 말라카는 포르투갈 130년(1511~1641), 네덜란드 160년(1641~1795, 1818~1824)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네덜란드는 1795년까지 말라카를 다스리면서 중국인을 현지인의 중간자역할로 활용했다. 네덜란드가 물러나고 영국이 말라카를 156년(1795~1818년, 1824~1957년)간 지배했다.

 

해양길을 이용한 일본의 자본 형성과 조선의 소외

 

이러한 국제적인 교역로와 별도로 동아시아도 황해를 중심으로 고대부터 근세까지 활발하게 교역을 하였다. 구리로 만든 화폐(동전)가 동아시아의 국가 형성이전부터 교역이나 이동에 사용했다. 그 해상 네트워크였던 산동반도, 요동반도, 평양, 부여, 김해, 큐슈, 류큐, 그리고 복건성 등에서 서로 동일한 화폐가 동시에 발견되고 있다. 동아시아의 항해는 내해의 성격을 갖는 해양적 특성으로 계절풍보다 해류와 조류를 이용하였다. 그 중심지였던 제주도는 중국, 한반도, 일본, 동남아 지역을 연결하는 중간 기착지였다. 또한 완도와 흑산도도 중국이나 일본으로 항해하는 배의 중간기착지로 이용되었다.

 

그렇지만 고려와 조선은 왜구의 노략질과 침략전쟁으로 일본과의 거래가 침체되었다. 조선중기부터 시작된 사화와 당쟁으로 국제적인 변화를 수용하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일본으로 항해하던 베트남 배가 제주도에 표류(1612년)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양과 조선의 교류는 거의 없었고 세계사의 흐름에서 조선은 소외되어 있었다. ‘하멜표류기’는 조선이 소외된 정도를 나타내는 단적인 사례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소속의 하멜(H. Hamel)은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에 난파되어 제주도에 도착했다. 조선에서 13년간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여 1668년 네덜란드에 귀국했다.

 

하지만 일본은 히라도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국제교류로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다. 히라도는 해양 항로의 요충지로 성장하여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교역을 했다. 선교사인 하비에르 신부가 히라도에서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했고, 유럽인의 교두보가 되었다. 16세기 초까지 베트남의 호이안을 왕래하면서 철과 총을 동남아시아에 공급했다. 일본인 거주지가 베트남에 형성되었고, 유럽문화를 모방한 다양한 도자기를 만들어서 국내산업을 활성화시켰다. 도자기산업은 중세 일본의 자본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도 4년(1941~1945년)간 말라카를 지배했했다.

 

실크로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개통과 기후변화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러시아는 카스피해 연안을 잇는 중앙아시아 횡단철도를 1894년 완공하고, 1905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개통했다. 스탈린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횡단 철도를 이용하여 1937년 연해주의 18만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1998년 9월 아제르바이젠의 수도 바쿠에서 유럽연합과 중앙아시아 12개국이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도로망인 트라체카(Traceca)의 건설에 합의했다.

 

이러한 추세에 남북간 경의선과 경원선이 복원되면 한반도종단철도(TKR)가 완성되고,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중국횡단철도(TCR)를 연결하여 신비단길시대을 열어 갈 수 있다. 글로벌화된 국가와 산업 속에서 시대적인 변화에 이제는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기후변화는 시베리아의 동토를 녹이면서 초원길을 대체하는 ‘횡단철도’를 활성화시키고, 북극의 해빙으로 해양길을 대체하는 ‘북극항로’ 시대를 열고 있다. 문을 잠그면 면역력 약화로 생존에 취약하며, 문을 열면 면역력을 높일 수 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경희대 경영학과, 고려대 통계학석사, University of Liverpool MBA,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경희대 의과학박사과정

•국민투자신탁 애널리스트, 동부증권 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한국과학사학회 회원, 한국경영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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