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금융신문=양학섭 편집국장) 지난 7월 3일, 기업 경영의 틀을 바꾸는 1차 상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공포된 개정안에는 이사의 충실의무 명문화, 독립이사 제도 강화, 감사위원 선임 시 3%룰 확대, 전자주주총회 의무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번 상법 개정안은 단순한 법 조항의 손질을 넘어, 기업 지배구조의 권력 중심이 경영진에서 주주로 옮겨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추가로 논의 중인 법안에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 집중투표제 확대, 배임죄 적용 요건 정비 등 주주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재벌 중심의 폐쇄적 지배구조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어 온 가운데, 이번 개정은 우리 기업 환경이 '주주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늘 그렇듯, 제도의 의도가 현실에서 그대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이사의 충실의무를 명문화한 것은 자본시장에서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다. 그간 다수의 이사들이 ‘회사를 위한 결정’이라며 무책임하게 의사결정을 내리고, 손실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해 왔던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법의 칼날은 양날이다. 충실의무가 자칫 ‘사후적 책임론’으로 비화 될 경우, 기업 경영은 위축되고 이사회의 결정은 보신주의로 흐를 위험도 있다. 따라서 제도 정착을 위해선 내부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 확보와 함께, 실무적 방어 수단도 함께 제도화해야 한다.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전원 분리 선출은 소액주주에게 실질적인 영향력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간 소수 주주가 기업의 의사결정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사회 구성의 ‘민주화’가 곧 ‘기업의 정치화’로 연결돼선 안 된다. 행동주의 펀드나 투기 자본의 단기적 이익 추구가 기업의 장기 전략을 침식할 수 있다. 소수 연합이 이사회에 진입해 전략 정보를 요구하고, 의사결정을 방해한다면 기업의 건전한 경영이 흔들릴 수 있다. 이는 주주권 강화를 내세운 제도의 취지를 왜곡하는 일이며, 결국 신뢰 기반의 시장 생태계에도 독이 될 수 있다.
자사주는 그동안 기업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이자, 때로는 지배주주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수단이었다. 이번 개정안은 일정 기간 내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고, 보유 시 주주총회 승인을 거치도록 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자사주 활용이 반드시 ‘나쁜 전략’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생기업이나 벤처, 중견기업에겐 자사주는 경영상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율성이다. 이를 일괄적 규제로 막을 경우, 대기업보다 작은 기업이 더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경영 판단의 원칙을 법에 명시해 배임죄 적용을 줄이려는 움직임도 있다. 기업이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면 성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 판단’이라는 이름 아래 경영책임이 면책되도록 만들어선 안 된다. 국민연금 등 국민 자산이 투자된 상장회사의 경영진이 공공성과 책임감 없이 움직이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 “책임의 면제”가 아닌, “책임의 명확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단순히 ‘선의였다’는 이유로 법적 판단을 면제하는 구조는 결국 공적 감시 시스템의 무력화를 초래한다. 법은 선의를 전제로 설계돼야 한다. 하지만 선의만으로 설계되어선 안 된다.
이번 상법 개정안은 기업의 폐쇄성과 기득권적 운영을 바꾸려는 시도이자, 새로운 자본시장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실험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실험이 현장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지 않은 채 진행됐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좋은 제도는 반드시 좋은 설계와 충분한 이행 기간, 그리고 현실의 수용성을 동반해야 한다. 주주 민주주의는 이상적이지만, 현실은 여전히 격차와 불균형으로 가득하다. 법과 현실 사이, 공정과 실행 사이에서 정교한 조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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