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비트코인은 암호화폐인가? 디지털화폐인가? 암호화폐는 약 10분 간격의 채굴로 거래내역을 기록한 블록을 생성하고, 그 대가로 받는 코인이다. 코인의 채굴(mining)은 복잡한 연산에 필요한 컴퓨터, 코인지갑만들기(블록체인), 채굴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채굴이 시작되면 기존 거래 기록들을 전달받아서 특정 숫자의 블록을 생성한다. 생성한 블록은 블록체인에 추가되고 새롭게 채굴된 코인을 받는다. 채굴 작업 증명은 목표 값 이하의 해시를 찾아서 새로운 기록을 생성하고 분산원장시스템에 기록한다. 코인 네트워크는 시간당 6개의 블록을 생산을 생산할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난이도를 재설정하여 발행량을 줄인다. 비트코인의 경우 발행량이 4년마다 반씩 줄어드는 반감기를 가지고 있다. 최초 2009년 블록은 50비트코인씩 발행되었지만 반감기를 적용하여 6.25비트코인만 발행되고 있다. 따라서, 시간이 경과하면 채굴이 어려워져서 채굴 노력에 대한 더 높은 보상을 요구하게 된다. 이에 따라 발행된 코인의 거래 가격도 자연스럽게 상승하면서 생성과 거래의 심리적인 보상게임을 반복하게 된다. 암호화폐는 채굴에 따른 보상보다 가격변동에 따른 자본이득을 추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종교의 탄생: 동검, 동경, 동전 기원전 13세기에 시작된 유럽의 동검은 중앙아시아에서 스키타이식으로 변형된 후 요서와 한반도를 거쳐서 일본 큐슈까지 전파되었다. 초원의 동검숭배는 흑해 연안에서 시베리아 초원까지 펼쳐져 있다. 흉노의 선우는 중요한 맹세를 할 때 동검으로 백마를 죽이고 그 피를 술에 섞어서 마셨다. 사기의 기록에 흉노족은 동검을 경로(經路)라고 칭하면서 신으로 숭상했다. 북방 유목민족의 무속인이나 샤먼들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동검을 사용했다. 만주 지방은 비파형동검 문화를 남겼고, 한반도는 세형동검 문화를 남겼다. 비파형동검은 대 비파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형동검은 자루가 새 모양으로 80% 이상이 평양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한반도 남방식 고인돌은 세형동검의 분포 지역과 일치한다. 청동기 문화의 이동을 보여주는 석관묘가 몽골과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동검은 대체로 구리·주석 및 납의 평균비가 75:16:9으로 주석이 적고 납의 함량이 많다. 동경은 춘추시대에 일반화되었고, 전한(前漢)시대부터 문양을 새겼다. 태양을 상징하며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신비한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비트코인의 열기 속에 채굴 또는 마이닝(Mining)이 글로벌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자연상태에서 금속의 원석을 찾는 채굴은 노천에서 이루어질 수 있고 광맥을 찾아서 지하로 들어가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인류가 금속을 농업 활동에 이용하면서 생산량을 급격히 증가시켰고, 무기 제작에도 사용되어 계급 사회와 고대 국가 형성에 기여했다. 그리고, 초기 금속은 화폐를 제작하는데 사용되어 가치의 척도와 자본의 저장 수단으로 유통되었다. 금속에 대한 신념은 해-금, 달-은, 목성-주석, 화성-철, 금성-구리, 수성-수은으로 신성시했던 별을 금속으로 표현했다. 초기 금속인 구리, 주석은 낮은 온도에서 제련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른 시기부터 이용되었고, 더불어 합금기술이 발전하면서 구리와 주석을 혼합한 청동기를 만들어서 무기나 농기구 제작에 사용되었다. 후에 제련기술이 발전하여 더 높은 온도가 필요한 철의 제련도 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금은 초기부터 희소성과 녹슬지 않는 불멸성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철기의 출현은 사회를 분화시키고 강력한 고대국가(계급사회)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잠잠했던 채굴은 2000년대 들어서 정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보부상은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우리의 삶에서 함께 해왔다. 김홍도의 ‘평양감사향연도’에 보부상이 등짐을 지고, 초립을 착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보부상은 조선시대에 전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상인으로 시장의 활성화와 자본의 축적에 공헌했다. 상품이 지역간에 이동할 수 있는 시장의 활성화에 기여하였고, 화폐의 유통을 촉진시켜서 자본의 형성에도 도움을 주었다. 보부상의 기원과 정읍사 보부상의 기원은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의 정읍사(井邑詞)는 아내가 장사 나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면서 부른 노래다. 고려사악지(樂志)에 기록된 백제의 여러 노래들 중에서 유일하게 전하고 있다. 고려사는 정읍(井邑)을 반주하면서 2명의 춤꾼이 춤을 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악에서 정읍사는 수제천(壽齊天)으로 정읍(井邑) 또는 빗가락정읍(橫指井邑)으로 연주되고 있다. 남편이 행상을 나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아내가 근처 산바위에 올라가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고 있다. 정읍사에서 행상하는 남편은 초기의 상인인 보부상의 존재를 알려주는 중요한 표현이다. 보부상은 교통의 중심지에 장시(場市)를 세워 행상(行商)을 했다. 보상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도가사상은 노자와 장자, 민간신앙, 음양오행설, 신성설 등이 복합적으로 합쳐져 확립되었다. 우리나라의 도교의 발전과정을 정리한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신라말 최승우(崔承祐), 김가기(金可記) 등이 당나라에서 종리권(鍾離權)에게 도교 사상을 전수받은 이후 최치원(崔致遠), 고려의 이명(李茗), 조선의 김시습(金時習)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의상대사의 선법(仙法)이 권청과 설현 등을 통해 김시습으로 이어졌고, 김시습은 홍유손, 정희량, 윤군평 등에게 전했다. 또 다른 도교를 정리한 조선시대의 청학집(靑鶴集)은 도인들의 행적과 담론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 근원을 환인, 환웅, 단군에 두고 있다. 혼란했던 19세기 말에 도교에 기반을 둔 단군신앙과 정감록 사상이 신흥종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교에 입문했던 인물들은 그 시대의 권력과 자본을 초월하여 신선 사상과 풍류 생활을 추구했다. 최치원의 풍류와 김시습의 수련 당나라에 갔던 김가기는 과거에 급제하고 신선에 이르는 복기법(服氣法)을 수련하여 수행에 힘썼다. 그의 비석인 ‘종남산신라김가기석각(終南山新羅金可紀石刻)’는 그가 수련에 성공하고 천상의 선계로 올라간 것으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1870~1913년까지 경공업을 기반으로 상품수출이 증가하면서 중국을 능가했다. 1900년대 초 일본 경제는 산업혁명을 이루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상품수출액은 1913년 세계 16위에서 1929년 7위 규모까지 상승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이웃 지역들이 원료 공급과 소비지의 역할을 했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 정책은 산업의 발전과 침략전략에 따라서 무력 통치기(1910~1919년), 문화 통치기(1919~1931년), 민족 말살 통치기(1931~1945년)로 구분하고 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에 진출한 일본은 1905∼1911년 사이에 조선의 화폐제도를 정리하여 인위적으로 상업자본을 파괴했다. 1911년 회사령을 제정하여 상품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하면서 민족자본의 산업자본화를 통제했다. 그리고, 일제는 1910∼1918년까지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다수의 토지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면서 농촌경제를 파괴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의 경제는 상업, 산업, 농업이 모두 일본인과 친일세력에게 넘어갔다. 그러면서 조선과 일본의 거래에 대한 관세가 대부분 폐지되고 1920년대 단일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지식은 원리를 통해서 맥락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총체적 접근으로 특수성과 유사성을 찾아서 신뢰성과 객관성을 확보한다. 과거를 말하는 철학과 미래를 이야기하는 과학, 인간의 본능과 경험(실험, 관찰 등) 등이 합쳐질 때 의미있는 지식을 만들 수 있다. 초기값이 결과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출발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첫 정보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미래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반대로 역사는 오랜 기간의 유물, 유적이나 사건들의 빅데이터를 통하여 그 기원을 찾아간다. 자료가 많을수록 그 원인이나 현상을 빨리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도 존재하기 때문에 실제로 근본적인 실체를 찾기는 어렵다. 인류는 불확실성에 확률을 부여하고 네트워크로 그 기원을 찾으며,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여 지식자본을 축적해 간다. 역사에 대한 해석, 네트워크에 의한 자본의 형성 과거를 찾아가는 역사는 지나온 과정의 인과관계나 종속관계로 설명하려고 한다. 역사 데이터를 연결하면 개별 정보나 지식이 발생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네트워크 분석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상호 연결성을 확인할 수 있다. 1940년대부터 영국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인류는 수렵·채집생활에서 시작하여 유목생활과 농경활동으로 발전하였다. 유목생활은 가축을 키워서 식량으로 사용하거나 농업수단, 이동수단, 단백질 공급원, 자원 등으로 활용되었다. 사육되는 가축은 성질이 온순하면서 성장이 빠르고, 한 세대가 짧으면서 수직적인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유목생활은 넓은 북방의 초원지대를 배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고, 기후변화에 식량을 찾아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약탈경제가 발전하였다. 유라시아는 동서 횡축으로 이동하면 식량작물(보리, 쌀, 밀)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농업은 소비하고 남은 식량을 저장하여 잉여경제를 형성할 수 있다. 식량이나 토지의 소유는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사회가 분화되고 계급이 형성되었다. 경작지가 커질수록 농사에 필요한 남자들의 노동량은 증가하였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여자들은 더 많이 출산해야 했다. 몽골초원과 흥안령에서 시작된 유목사회와 약탈경제 몽골고원, 시베리아와 만주는 바다 난류의 영향이 적어서 동일한 위도의 타 지역보다 춥고, 인접한 한반도에 북서계절풍으로 추위를 전달하고 있다. 만주 이북의 흥안령(興安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1970~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사망의 원인은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연탄가스는 일산화탄소(co)로 이루어진다. 일산화탄소는 폐에서 혈액 속의 헤모글로빈과 결합하여 카복시헤모글로빈을 생성한다. 카복시헤모글로빈은 산소를 운반할 수 없기 때문에 혈액의 산소운반능력을 떨어뜨린다. 사람이 일산화탄소에 중독되면 혈액내 산소부족으로 질식 상태에 빠진다. 일산화탄소의 구성은 ‘탄소문명’에서 제시하는 가장 유용한 원소인 탄소(C)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산소(O)로 구성되어 있다. 탄소가 다른 원소와 결합될 때 대단히 유용한 화합물을 구성하면서도 가장 유용한 두 원소가 결합되어 해로운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탄소는 인류의 생명을 지탱해준 녹말, 설탕, 방향족 화합물, 글루탐산 등에서 주요 구성물이다. 인류에게 중독 현상을 일으킨 니코틴, 카페인, 요산, 에탄올 등이나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니트로, 암모니아, 석유를 구성한다. 특히 사람을 흥분시키는 뇌의 전달물질인 도파민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디지털 세상으로 전환되면서 디지털 매체나 사이버 거래(전자오락, 비트코인, 사이버거래)가 도파민 배출을 자극하고 있다. ◈ 정제기술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인구는 국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그 규모에 따라서 한 국가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인구 규모가 크고 지적 능력이 뛰어날 경우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경제와 제도의 안정화를 통하여 발전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다민족 국가나 계급 사회는 사회적인 변화의 약화로 정체되는 특성을 나타낸다. 현대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서로 다른 사회시스템 속에서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고 있다. 그동안 각 국가간 인구성장과 이동정책에서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중세 동아시아 국가의 인구변화에 따른 국력의 변화 기원전 1세기의 한서(漢書)에 낙랑 지역이 6만 2812호, 인구 40여만명이었다. 삼국시대의 인구는 자연출생과 함께 전쟁에서 포로로 끌려가거나 잡혀와서 인구의 변화를 이루었다. 삼국유사에 5~6세기의 인구는 고구려 69만호, 백제 76만호, 신라 17만호로 약 380여 만명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기까지 인구 변화는 크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인구는 약 550만명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농업기술이 발전하면서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던 시기까지 인구는 계속 증가하였다. 그렇지만 임진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인류는 빙하기가 끝나자 아프리카를 떠나 세계 각지에 정착하였고, 각자 이룩한 문명교류의 흔적은 실크로드(바닷길, 오아시스길, 초원길)을 따라서 이루어졌다. 초기에 문명의 이동은 한 쪽에서 다른 쪽에 일방적으로 전달되다가 후기 문명이 성장하여 초기 문명을 앞지르는 문화의 역전현상을 보이면서 상호 발전해 왔다. 고대 동아시아의 문명(비단, 종이, 화약, 나침반, 도자기 등)이 실크로드를 따라서 유럽에 전달되었고, 이러한 혁신을 이용한 중세의 아라비아인과 유럽인들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서 동양으로 역수입되었다. 동서문명은 초원길과 오아시스길을 통하여 다양한 문화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장기적인 발전의 자본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특히, 고대 동아시아는 화폐를 유통하고, 조류와 해류를 이용한 해양길을 따라서 교역으로 자본을 축적했다. 실크로드의 발달과 문명의 동서교류 문명 교류에서 실크로드는 아시아, 아프리카 및 유럽을 서로 잇는 동서 교통로였다. 독일의 지리학자였던 리흐트호펜(F.Richthofen)이 19세기 후반에 중국에서 인도로 수출되던 비단의 교역로를 ‘자이덴슈트라센(실크로드)’이라 했다. 그 후 독일의 헤르만(Hermann)이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투자자는 기대수익률과 위험을 고려하여 투자를 결정하는데 투자자 권유준칙을 따라야 한다. 이 때 판매회사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서 상품을 설명하고 투자자가 선택한 상품에 대한 핵심설명서를 제공한다. 투자기간에 자산운용사, 수탁회사, 일반사무관리회사 및 판매회사 등이 투자자 보호와 투자자산관리에 참여한다. 사모펀드는 소수의 특정인을 상대로 투자자 수 50미만, 최저 투자한도 1억 이상, 운용자산의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며, 고위험고수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고위험의 자산운용과 유동성의 부족에 따른 상환 불이행의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다. 투자자가 사모펀드 투자를 결정하고 상환하는 과정에서 유동성의 부족에 따른 환매불이행과 계약을 위반한 고위험 자산에 대한 투자손실에 따른 펀드가치 하락으로 라임사태와 옵티머스사태가 발생하였다. 투자위험에 따른 투자권유준칙의 준수 기대수익률(expected return)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명목 이자율과 대상 자산의 리스크 프리미엄으로 예상되는 미래의 수익률이다. 만일 투자자의 기대수익률이 상응하는 리스크(risk)를 초과한다면 투기(speculation)가 될 수 있다. 리스크는 예상되는 투자 손실의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건강한 몸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침입에 면역체계를 동원하여 방어한다. 사람의 호흡과 심장의 박동에 의한 혈액순환과정에서 항상성을 유지한다. 건전한 금융도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 따른 화폐순환에서 신용을 창조하여 지속한다. 그렇지만 바이러스 같은 투기꾼이 공격대상을 찾아서 신용창조를 방해할 때 금융불안이 발생할 수 있다. 다양한 금융조치가 시장을 빠르게 안정화시키지만 유사한 유형의 투기에 자기방어적인 면역체계를 형성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탐욕 때문에 투기를 원천적으로 근절하기 어렵다. 생물학적인 면역체계는 반복되는 혼란을 줄일 수 있는 구조적인 해결방안일지 모른다. 혈액과 화폐의 순환 구조는 유사한 과정을 가지고 있다. 다만 외부의 침입에 대등하는 방법은 서로 다르며 인간의 대응은 실수를 반복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혈액과 화폐의 순환구조 혈액은 몸의 기능과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산소와 면역물질 등을 운반한다. 뼈에서 만들어진 혈액은 심장을 통하여 폐로 가서 혈액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호흡으로 들어온 신선한 산소와 결합하고, 다시 심장을 통하여 온몸에 깨끗한 혈액을 보낸다. 이 과정에서 혈액은 다양한 인체의 물질을 혈관을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인류는 따듯한 기후를 찾아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였고 식량을 찾아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다. 빙하기에 따뜻한 아프리카가 인류의 생존에 가장 적합한 자연환경이었다. 먼 인류의 조상이 케냐, 탄자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고대 화석으로 발견되는 이유다. 한반도에 호모에렉투스가 80~70만년 전인 구석기 중기부터 거주했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또한 간빙기에 유목민족은 초지와 경작지를 찾아서 유라시아의 초원길을 이용하여 동서로 이동했다. 기후변화는 지구의 역사 속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원인에 대해서 여러 이론과 가설이 존재하는데 ‘자연적인 대기순환이론’은 고기압대에서 강수량의 부족으로 사막화가 일어난다고 제시하고 있다. 사하라사막과 고비사막은 다양한 식물과 공룡이 살 정도로 온난했고, 한반도 중부에서 아열대성 양치류 식물의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 ‘지구 판구조 운동’에 따르면 지구의 판이 매년 약 2~15센티미터정도씩 움직일 때 판과 판이 충돌하면서 습곡과 단층, 지진과 화산폭발로 기후변화가 일어난다. 또한 태양의 흑점이 많으면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고, 태양의 흑점이 적으면 기온이 하락한다. 흑점이 거의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한자는 중화사상(유교 이념)을 확산시키고 고대 동아시아의 동질성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자는 황하 뿐만 아니라 요서, 만주, 산동 등에서 살던 소수민족들이 언어를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은나라의 갑골문은 예리한 도구로 딱딱한 거북이 등뼈나 소뼈에 새기면서 글꼴이 직선이면서 네모(方形)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갑골문은 1899년부터 발굴하여 수십만 편의 갑골에서 3,500의 글자를 찾아서 1,800정도내외 판독했다. 또한 주(周)나라 때 청동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청동 솥이나 그릇에 글자를 새기는 금문(金文)이 등장한다. 금문은 직선이 아닌 부드러운 형태로 수 많은 청동기에 글자를 주조하였는데 총 3천여자에 2천자 정도를 판독했다. 주나라가 멸망하고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이었던 진(秦)나라는 기존의 글자 쓰는 법을 정돈한‘대전’을 확립하고, 더 간결한‘소전’으로 발전시켰다. 진시황제는 중원을 평정한 후에 다른 제후국의 문자를 폐기하고‘소전’으로 통일했다. 공식문서에 사용되던 ‘소전’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일반인들은 더 간결하게 만든‘예서’를 사용했다. 한나라는 새로운 글자보다 ‘예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작위(爵位)또는 제후(諸侯)는 봉건제 사회에서 일정한 영토를 가지고 그 영내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귀족이나 호족에게 수여하던 칭호였다. 중국은 세상의 중심인 중원(천자국)에서 천자를 지배자로 세우고 주변(제후국)의 군주를 제후로 책봉했다. 이러한 직위를 받은 제후들은 천자에게 공물을 바치거나 군사를 파견하여 충성하면서 영지의 치안유지, 노동력 징발, 조세징수, 도로와 성곽의 보수 등을 관리했다. 기원전 11세기 주나라의 무왕은 왕(王)과 공(公), 후(候), 백(伯), 자(子), 남(男)의 오등작(五等爵)을 공신들에게 나눠주고 영토를 분배했다. 공(公)과 후(候)는 사방 100리, 백(伯)은 사방 70리, 자(子)와 남(男)은 사방 50리의 땅을 받았다. 주나라의 신분제가 제후(諸侯), 경(卿), 대부(大夫), 사(士)로 더욱 세분화되었다. 사士)는 춘추전국시대에 세습하는 관직이나 토지가 없었지만 지식과 힘을 가진 지배층을 형성했다. 제후들이 왕권에 도전하면서 주나라가 멸망하자 진시황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를 실시했다. 군주의 호칭도 천자에서 황제로 바꾸었다. 그리고 한나라는 봉건제와 군현제의 중간 형태인 군
(조세금융신문=구기동 교수)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강대국과 주변 소국 간 조공(朝貢), 봉책(封冊), 견사(遣使), 청구(請求), 전쟁(戰爭), 회맹(會盟) 등의 관계로 유지됐다. 중국은 중앙의 ‘성(城)이나 나라(中央之國)’로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으로 ‘中原(중원)’이라고 불렸다. 조공은 중심국(종주국)인 중국에 대하여 제후국(번국)인 속국의 충성을 요구하는 위계구조이다. 중국은 주변지역을 직접 다스리거나 정복하지 않은 국가를 조공으로 관리했다. 조공은 불평등한 관계였지만 중국 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상호 인정을 기초로 이루어졌다. 황제는 번국의 조공을 통하여 상징적인 통치권을 인정받았고, 제후국은 종주국의 인정을 통하여 지배 영역의 지배권을 확인 받았다. 제후국들은 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황제에게 승인을 요청했다. 또한 정기적으로 중국에 조공하여 친선관계를 확인했다. 지리적으로 가까울수록 그 관계는 밀접했다. 특히 한나라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는 제후국에 군신의 질서를 요구했다. 황제는 조공한 국가에 왕이나 후(侯)라는 작위나 장군이라는 관직을 부여하는 책봉으로 주변국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중국이 무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봉책으로 국제질
(조세금융신문=구기동 교수) 중화는 유교의 이념을 바탕으로 천하와 중원의 중심을 나타내는 관념론적인 무형의 상징어이다. 서경(書經)의 필성오복도(弼成五服圖)는 기원전 6세기 고대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다. 이 그림은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따라서 중심에 작은 직사각형을 놓고 바깥에 더 큰 직사각형을 차례로 배치하여 땅을 표시하였다. 각각의 직사각형은 주요 지역을 나타내는데 중심인 황제가 사는 제도(帝都), 황제의 직할지인 전복(甸服, 경기지역), 경대부와 제후의 지역인 후복(侯服), 문무가 다스리는 수복(綏服), 그리고 동쪽 오랑캐의 요복(要服)과 남쪽 오랑캐의 황복(荒服)으로 확장된다. 중화 중심주의 속에서 중국은 지난 2000년 동안 거의 비슷한 규모로 중원을 다스렸다. 중원은 긴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종족들을 흡수하고 동화시켜 왔다. 이 지역의 지배자는 특정 한민족이 아니라 이민족이라도 중원을 통일하면 지배자의 정통성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사고가 중국이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다스려야 하는 어려움 속에도 단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또한 이것은 무력으로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한 민족이나 국가와 차별화되는 점이다. 그리고, 개별 구성
(조세금융신문=구기동 교수) 풍수지리에 따라서 월출산 도갑사는 도선이 창건하였으며 국사전에 도선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도선수미비에 도선국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도선은 순천의 선암사(仙巖寺)를 중창하면서 사찰 입구에 강선루(降仙樓)를 세워서 선암사를 감아도는 개울이 양쪽으로 갈라질 때 기가 빠지는 것을 보완하였다. 1712년 광양 옥룡사에서 간행한 도선(道詵, 827-898)비문은 도선의 수행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도선은 왕건의 부친인 용건에게 집터를 정해주면서 왕건의 탄생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왕건에게 땅의 이치와 하늘의 섭리에 따라서 왕지(旺地)와 순지(順地)를 택하여 거주할 것을 제안했다. 개경 송악산이 오른쪽 백호와 왼쪽 청룡이고, 주변의 안산과 조산이 어우러진 천하 명당이라고 하였다. 월출산 무위사의 형미선사 비문은 형미선사와 왕건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왕건은 영암세력으로 후백제를 견제하면서 불교와 풍수사상으로 혼란기의 민심을 통합하였다. 따라서 왕건이 개국 초기에 서남해 해양 세력을 이끌고 후삼국의 통일을 만든 토대를 마련하였지만 풍수지리를 근거로 왕도는 개경을 선택하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도 풍수지리를 근거로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지속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회는 정의롭고 공정한 기회를 통하여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했는데 이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지 못할 경우 불평등을 인식하게 된다. 언제부터인지 중산층이 줄고 사회의 양극화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였다. 국가경제가 발전하면서 극단적인 최상층을 제외하고 개인별 소득 격차를 세금으로 조정하기 때문에 엄청난 차이를 인식하기 어렵다. 다수의 인식은 근로소득에 관계없이 부동산을 보유한 규모나 위치하는 지역에 따른 가치의 절대평가액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보유하는 부동산의 규모와 위치가 계층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는데 보유하게 된 원천과 지역적인 가격차별의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편집자주 고대부터 이뤄진 토지의 세습 고대 사회는 대가족에 의한 개별 경작의 발전으로 경작지의 상속을 통하여 소규모의 개별 경작이 성립하였다. 정전제(井田制)는 주나라에서 정방형의 토지를 우물(井)모양으로 9등분하여 중앙을 제외한 바깥 8군데를 사전(私田)으로 경작하였다. 중앙의 토지는 공전(公田)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세금으로 바쳤다. 이 과정에서 세습되는 토지가 발생하였는데 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