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권영지 기자) 전라남도에 사는 위재영(51)씨는 6년차 화물기사다. 그는 안전운임제가 시행되기 전부터 시멘트 화물차를 운전했다. 안전운임제가 시행되기 전, 그는 졸음운전이 ‘일상’이었다고 고백했다. 하루 수면시간은 2~3시간이 되지 않았고, 집에 들어가지 못해 차에서 쉬거나 잠을 자는 ‘차숙’이 일상이었다. 차를 몰고 먼 거리를 이동했는데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운전 내내 졸면서 차를 몰았다.
운전대를 놓치 못한 이유는 생계 때문이었다. 화물을 운송해 받은 보수는 아이들 교육에 보험료, 식비까지 책임지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잠을 줄여 밤낮없이 운전했다. 이런 위험천만한 일상은 안전운임제가 시작되자 끝이났다. 가족과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생겼고 운전하느라 밤을 새지 않아도 아이들 교육을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위재영씨처럼 안전운임제를 적용받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안전운임제는 모든 화물차가 아니라 컨테이너와 시멘트 운송 차량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화물연대-국토부, 일몰제 폐지 합의
화물연대는 14일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와 5차 교섭 끝에 안전운임제 지속 추진에 대해 합의했다. 더불어 안전운임 적용품목확대, 즉 현재 적용 대상인 컨테이너와 시멘트 화물차량 외에 다른 화물차에도 안전운임제를 확대 적용하는 것에 대해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또 국토부는 최근 유가 상승에 따라 화물차주의 유류비 부담 완화를 위해 유가보조금 제도 확대를 검토하고 운송료 합리화를 위해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안전운임제 왜 도입됐나
안전운임제는 시멘트, 컨테이너 화물차주가 지급받는 최소한의 운임을 정해 이들의 적정 임금을 보장하는 제도다. 즉 화물차주의 ‘최저임금제’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화물차주에게 적정운임을 보장해 근로여건을 개선하고 이들의 과로와 과속, 과적 운행을 방지하는 게 안전운임제 도입의 취지다. 화물차주의 운임이 워낙 적다보니 한꺼번에 더 많이, 더 빨리, 더 자주 운행할 수밖에 없다는 게 화물차 노동자들의 목소리다.
2008년부터 최소한의 운임료 기준을 정하자는 논의가 시작돼 2018년 안전운임제가 3년 일몰제로 국회에서 통과됐고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부터 시행됐다. 안전운임제 시행으로 교통사고는 줄었을까? 줄었다. 2019년엔 690건이었던 트랙터 교통사고가 2020년엔 674건으로 2.3%p 줄었다. 부상자도 2019년 1079명에서 2020년 991명으로 8.2%p 감소했다. 반면 사망자 규모는 19%p 증가했고 과속 적발 건수도 1.8%p 증가해 다소 애매한 결과가 나왔다. 화물차주가 안전한 운행을 했느냐에 따라서는 시각차가 있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세계 속의 안전운임제
한편 안전운임제가 해외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제도라는 주장이 나온 바 있다. 이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캐나다에서는 주 단위의 최저운임제를 시행하고 있다.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는 ‘컨테이너 트럭법’을 통해 밴쿠버 항만의 컨테이너 운송에 대한 최저운임를 정하고 있다. 또 이 법에 따라 2014년 컬럼비아주 컨테이너운송감독청을 설립했다. 벤쿠버 항만에서 화물 운송 서비스를 하려는 사업자는 면허를 발급 받아야 하는데 OBCCTC가 이 면허를 발급하고 법 준수 여부를 조사 및 감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2018년 화물 운송 종사자 대파업 이후 최저운임법을 도입해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최저운임은 거리와 하역비용 등에 따라 결정된다. 브라질 최저운임법은 일반화물·냉장화물·벌크화물·위험화물 등 거의 모든 품목을 대상으로 적용된다는 특징이 있다. 브라질은 최저운임보다 낮게 계약할 경우 최저운임과 실제 계약 운임간 발생한 차액의 2배를 배상하도록 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도입된 호주의 도로안전운임제는 화물차 운전자와 소유자 사이의 분쟁으로 입법 4년만에 폐지됐다. 2012년 입법된 호주의 도로안전운임법은 특수고용과 정규직 화물자동차운송노동자의 최저 운임 및 보수와 노동 조건에 대한 기준을 규정했다.
호주의 경우 연방 차원의 도로안전운임제는 폐지됐지만 일부 주에서는 여전히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뉴사우스웨일즈(NSW)주는 노사관계법 제6장에서 안전운임제에 대한 내용을 규정하고 있는데, 계약주체들이 준수해야 하는 의무조항에는 최저운임과 최대 노동시간 등 고용조건이 세부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차량의 종류에 따라 거리 또는 시간당 최저운임을 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최저운임을 지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도로안전 강화를 위해 화물차 운송의 일일 운행시간 제한 및 휴게시간 보장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미국은 1999년 운송업체 안전개선법을 제정해 화물차 운전자가 하루에 근무할 수 있는 시간과 주당 총 운전 시간을 규제하고 있다. 미국의 화물차 운전자의 최대 운행시간은 하루 11시간으로, 이후 최소 10시간 이상 휴식을 취하도록 하고 있다. 화물차 운전자에게 고의적으로 규정 위반을 요구하는 운송업체는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EU도 마찬가지로 운전자의 근무시간과 휴식시간에 대한 규칙을 정하고 있다. 화물차 운전자는 하루 운전 시간을 9시간 넘겨서는 안 되며 주간 운전 시간은 56시간을 넘어선 안 된다. 또 4시간30분 운전 후에는 45분 이상 휴식을 취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안전운임제가 해외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화물차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설정하고 있는 나라도 있고 근무시간과 휴식시간까지 강제하고 있는 나라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안전운임제는 한국에서만 시행하는 특이한 법이 아니다.
안전운임제, 현 단계에 머물러선 안 된다
현행 안전운임제는 컨테이너와 시멘트 화물차에만 적용되고 있다. 안전운임제가 적용되지 않는 차량이 전체 화물차 가운데 94%에 이른다. 안전운임제를 적용받지 못하는 ‘나머지’ 노동자들은 여전히 밤을 새고 졸음운전을 하며 화물차를 운전하고 있다. 화물연대가 총파업을 끝낸 15일에도 충청북도 충주시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 8.5톤의 화물차가 전도돼 있던 4.5톤 화물차를 들이받아 화물차 운전자 한 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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