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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양현근 시인의 詩 감상]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 고재종 (낭송 : 조정숙)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 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즐거움과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無明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보긴 걸어볼 참인가.

—고재종 시집,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시와시학사, 2001)

 

[詩 감상] 양현근 시인

 

백련사는 늘 푸른 동백 숲과 아름다운 호수 같은

바다 강진만을 품고 있는 천년 고찰이다.

백련사를 감싸고 있는 동백숲길은 피어나는 생애와

지워지는 소멸이 한 발자국 간격으로 어긋나는 길이다.

고재종의 시에서 동백은 계절의 장식이 아니라

마음이 통과해야 할 문장이다.

누이의 걸음마다 붉음이 환해지는 것은

순진해서가 아니라 서러움을 끝내 교환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선택 때문이다.

반면 화자의 걸음에는

붉음이 모감모감 한꺼번에 떨어진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꽃은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검푸른 잎이 손등을 치는 순간,

자연은 위로를 멈추고 윤리의 표정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움은 더 이상 감상이 아니고 판단이 된다.

앞바다는 종일 울지만 그 울음으로도

씻기지 않는 무엇인가를 시인은 남겨둔다.

사랑은 바꾸지 않겠다는 고집으로 남고

회한은 씻어보려는 어리석음으로 남는다.

동박새의 소리는 맑지만 그 맑음조차

상처를 덜어내지는 못한다.

소리는 지나가고 결심만 자리에 남는다.

저녁종이 울릴 때,

절은 구원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의 어둠(無明)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마당이 된다.

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시인은 동백의 운명이 아니라

이 뜨거운 상처의 길을 빛을 밝혀 들고

함께 걸어볼 진정한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가 묻는다.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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