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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금융신문=김종봉 세무법인 더택스 대표세무사) 공직에서 명퇴한 친구들을 만나면 이런저런 이야깃거리가 많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했던 추억이 모두 한 보따리다. 필자에게도 신혼 초의 그때 그 시절을 반추해 보면 소담한 기억들 사이사이로 머금은 웃음이 피어오른다.

 

군대를 제대하고 세무서에 복직한 것이 1988년 초다. 이듬해 결혼을 한다. 시흥동에 터를 잡았다. 근무지와 그렇게 멀지 않은 데다 다른 곳보다 월세 부담이 적었다. 서울 하늘아래 첫 보금자리였다. 그곳에서 아들 둘을 본다.

 

우리의 신혼집이자 안식처였던 그곳은 예전에 야산도 아니지만 넓은 들판도 아니었지 싶다.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안온한 길지였던가. 집 앞에 연립주택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수령이 꽤 되어 보이는 떡갈나무, 밤나무 등이 지키고 섰다. 이맘때쯤이면 아이들은 쑥떡 색의 널따란 떡갈나무 잎사귀로 한낮 더위를 가렸고, 초저녁 밤꽃 향기가 사방을 뿌릴 때는 문을 닫고 있었겠다.

 

집주인인 아주머니가 시장에서 장사하며 어렵게 어렵게 모은 돈으로 다가구 주택을 지었다. 3층에는 주인 가족이 살았고, 반지하방(우리는 1층이라고 했다)에 두 가구, 2층에 두 가구, 모두 네 가구가 비슷한 시기에 입주를 했다. 단칸방이었다. 연배도 엇비슷했고 모두 신혼이었다.

 

주변에서 깨소금 집이라고 놀렸다. 3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한울타리 회’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한다. 쌓인 회비도 제법 된다. 부부동반으로 동남아 3박 4일은 충분하다. 신혼 초,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전업주부들은 단칸방에서 부업을 한다.

 

전자제품 조립이나 포장, 구슬 궤기, 장난감에 특정 부위를 붙이는 것을 포함하여 어떤 제품에 쓰이는지도 모르는 일도 있었다. 보통 10개당 1원을 넘나든 것 같다. 매일 일한 양을 수첩에 적어두고 중간 소개인에게 넘긴다. 통상 월 단위로 보수를 정산받았다는데 사업자가 망했다거나 중간 소개인이 사라져 한 푼도 못 받고 헛수고한 일도 더러 있었다.

 

1년이 될 즈음 아이가 태어났다. 네 가족의 첫째 아이들은 나이가 같다. 아이의 출생으로 대부분의 시간과 관심이 육아에 쏠렸다. 육아용품에서부터 교육용 교재, 게임기 등이 좁은 방 한켠을 차지한다. 누군가가 좋다고 하면 네 집이 똑같아진다.

 

두 집은 아들만 둘이고, 또 다른 가족은 딸만 둘을 낳았다. 아이가 늘면서 엄마의 시선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정부처럼 일했지만, 남편은 집안일을 돕는 데에 무관심했다"라고 회상하는 이도 있다. 아마도 전업주부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이 셋을 둔 주인집 아주머니는 그래도 늘 남편들 기죽이지 말라고 한다.

 

웃지못할 일도 있었다. 방음이 잘 안 되는 집이다 보니 옆방에서 나는 엔간한 소리는 다 들려온다. 특히, 은밀한 밤에 부부 사이의 밀어들이 이웃 방(집)으로 스며들어올 때 피곤해 몸을 뒤척이는 남편들에게는 고역이었음을 기억한다. 몸이 잠든 채 깨어있는 남편은 오죽했겠는가.

 

3년쯤 지나, 자동차 회사에 다니던 예진이네 가족이 먼저 시흥동을 떠난다. 소하리 공장에서 아산 공장으로 인사 발령이 났다. 그동안 든 정이 많다 보니 다들 아쉽고 허전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1년이 안 되어 실내건축업을 하던 낙훈이네도 관련 업체를 따라 이사를 하게 된다. 아들만 둘이었는데 우리 집 사내 아이들이 더 아쉬워했다.

 

연이어 가장 오랫동안 함께 생활했던 옆방 지기 소영이네도 간단다. 농작물 유통업을 하고 있었는데 영업특성상 지방에서 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한다. 수도관이나 보일러실 등 손이 가는 곳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내 일처럼 나서서 해결해 줬다. 참 고마운 분이었다.

 

그렇게 예진네와 낙훈네, 소영네는 로현네를 두고 떠나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에게 주인 아주머니는 좀 더 넓은 방이 비었다며, 월세를 올리지 않을 테니 그곳으로 이사를 해도 좋다고 한다. 옆방은 우리 방보다 컸다. 옆 벽을 뚫고 이사를 한다.

 

그 사이 집 앞에서 연립주택공사로 떡갈나무 잎사귀도 밤꽃 향기도 굴착기에 묻혀버렸다. 그리고 1995년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7년 간의 시흥동 생활을 뒤로한 채 지금의 고덕동에 정착했다. '푸시킨'이 한동안 머물렀던 마을을 떠나며 『용서해다오, 정직한 떡갈나무들아!』라는 시를 통해 “달콤한 추억은 이별을 위함이었던가”라고 노래한 마음을 헤아려 본다.

 

세 가족이 떠나갈 때마다 새 입주자들이 왔지만 아무도 기억나지 않는다.

 

[프로필] 김종봉 세무법인 더택스 대표세무사

 ‧ 서울청 국선세무대리인
 ‧ 중부청 국세심사위원
 ‧ 가천대학교 겸임교수

 ‧ 법무법인 율촌(조세그룹 팀장)
 ‧ 행정자치부 지방세정책포럼위원

 ‧ 가천대학교 경영학 박사/ ‧ 국립세무대학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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