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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문가 칼럼] 모두 궁금해 하지만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던 18세기 영국의 심장 영란은행의 하루

Anne L Murphy, Virtuous Bankers: A Day in the Life of the Eighteenth-Century Bank of Englan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3.

 

 

(조세금융신문=송종운 경제학박사) “영란은행의 업무는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여름에는 아침 6시, 겨울에는 아침 7시가 되면 정문 경비원인 윌리엄 왓킨스는 은행 내 아파트 주방 근처에 걸려 있던 열쇠 세트를 꺼내 정문을 열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왓킨스가 정문을 열자 두 그룹의 직원, 즉 아웃 텔러와 하우스 포터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전자는 자신의 집이나 사업장에서 고객과 청구서를 협상하는 일을 하는 사무원이었습니다. 아웃 텔러는 정오 전에 작업을 완료할 수 있도록 청구서를 수집하고 일찍 출발했습니다. 포터는 일찍 도착하여 배정된 사무실을 청소하고 세팅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 남성들은 5시에서 6시 사이에 일어나 먼 길을 걸어서 출근했을 것입니다. 사무원들은 연간 50파운드의 은행 초봉에서 주당 2실링 6펜스 정도의 임대료를 내고 가구가 비치된 방에서 잠을 청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은행에서 오랜 경력을 쌓으면 승진의 가능성이 있고 보수가 크게 향상되었지만, 후배 남성들은 사치품을 거의 누릴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앤 L. 머피가 최근에 출간한 『고결한 은행가들: 18세기 영란은행의 하루』의 1장 첫구절이다. 머피는 이 책을 통해 1783년 영란은행의 하루 일과를 매우 소상히 그려내고 있는데, 이 책의 가진 큰 묘미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까지 출간된 영란은행에 관한 대부분의 책들은 머피처럼 극사실주의에 입각한 영란은행의 모습을 담아내지 못했다. 머피가 자신만의 영란은행 세밀화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1783년부터 다음해인 1784년까지 거의 1년여간 은행조사위원회의 검사결과 덕분이었다. 은행조사위원회가 어떻게 영란은행을 검사하였는지 잠시 들어보자.

 

“1783년 3 월 14일, 사무엘 보산케, 토마스 디아, 벤자민 윈스롭 등 세 명의 영란은행 이사가 기관 업무의 모든 측면을 ‘검사’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감사위원회는 ‘자신들에게 가장 편리한 시간에 모이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장부 및 서류와 함께 모든 사무실의 경영을 검사’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업무를 돕기 위해, 그들은 은행의 사무원이나 다른 직원들을 그들 앞에 불러낼 수 있었습니다.

 

동료 이사들의 간섭은 없었지만, ‘수시로’ 재무위원회에 조사 결과와 권고 사항을 보고하고 이후에 이사회에 보고하도록 요청받았습니다. 이들의 최종 보고서는 8만 단어가 넘는 분량으로 지폐발행부터 공채소유권 기록, 매일 은행 문을 여는 것부터 하루를 마감하는 최종 장부 폐쇄에 이르기까지 은행 운영 및 관리의 모든 측면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는 또한 은행의 가치와 미덕에 대한 감사원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이사회에 결론을 발표하면서 이 기관이 ‘상업의 진흥과 확장에 매우 필수적인 점에서 런던시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기관’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은행이 ‘공공 신용의 그랜드 팔라듐(이 말은 공공신용의 위대한 수호자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에 다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유서깊은 도서관의 오래된 문서를 뒤지면 보석같은 기록들이 잔뜩 나올 것이라는 말은 수년동안 허탕을 쳐본 사람만이 으스댈 수 있는 말이다. 누구도 첫 방문에서 이렇게 진귀한 보물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머피는 찾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이 과연 한국어로 번역될 수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 다만 어느 분 밝은 출판사의 용기있는 시도가 있기 전에 잠시나마 머피가 전하는 이야기의 한 대목만이라고 선보이고 싶다.

 

“페이 홀에서 일하던 창구 직원들은 ‘매일 아침 창고에서 요구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의 지폐를 수거하여 가방과 함께 전날 밤에 창고에 보관’해야 했습니다. 업무 특성상 오전 9시에 고객이 도착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창구 직원들은 오전 8시에 은행에 도착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상사인 캠페 씨는 오전 8시 30분까지 정기적으로 사무실에 출근했습니다. 캠페 씨는 아마도 매일 아침 은행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상급자 중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켐페가 도착했으니, 이제 비로소 회계 장부와 다른 서류들이 밤새 보관되어 있던 금고에서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할인된 지폐가 들어 있는 상자는 오전 9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자물쇠를 풀립니다....

 

화재에 대한 예방책으로, 매일 밤에 작성된 주식 및 부채 이체의 사본은 매일 저녁 은행 밖으로 보내져 이사 중 한 명인 에드워드 페인의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매일 이를 회수하여 관련 사무실로 돌려주는 것이 포터들의 임무였습니다.

 

은행의 업무가 기록된 기본 장부도 금고의 야간 보관소에서 반환되었습니다. 총계정원장, 재무부 장부는 경비원들이 꺼내서 부회계사인 에드워즈가 도착하여 담당할 때까지 회계사 사무실에 노출된 채로 놓여 있었습니다. 에드워즈가 사무실에 도착한 시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위직 중 한 명인 그는 오전 9시 이전에는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아마도 그 이후에 출근했을 것입니다. 은행의 하루를 준비하는 것은 주로 후배들이었습니다.

 

이 과정이 이루어지는 리듬과 루틴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무원들에게 너무 익숙해서 별다른 생각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상의 위험, 보안의 허술함, 이른 아침 내내 비어 있는 사무실에 방치된 장부, 상급자의 감독 부족 등은 검사 전에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사관들은 절차가 개선되어야 할 부분을 재빨리 알아차렸고, 2장에서 살펴볼 것처럼 고위직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여러 번 다시 제기되었습니다.

 

오전 9시가 되면 은행과 기관 주변은 그 자체로 활기가 넘쳤을 것입니다. 런던은 볼일이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찼을 것이고, 은행은 상업 지구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은행 건물 안에서는 직원들이 사무실의 지정된 공간에서 하루 업무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고, 고객들도 은행을 방문하기 위해 은행 홀에 도착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른 아침의 일상은 은행의 업무를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수준으로 설정합니다. 은행이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은 질서 있고 정중한 상업적 교류의 장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은행 업무의 실제적인 일상만큼이나 고결한 은행 업무의 수행이 중요했음을 보여줄 것입니다.”

 

영국 자본주의 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영란은행’

 

간혹 사람들은 왜 하필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을까? 라는 질문을 곧잘 하는데, 질문하는 수만큼이나 답변도 다양하다. 필자의 답은 영란은행이다. 조금 더 길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영란은행은 영국 자본주의의 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중앙은행이다. 그렇다면 중앙은행이 어떤 역할을 했길래 산업혁명을 가능케 했을까? 간단히 설명해 보자. 기술력과 인력이 풍부하더라도 그것을 돈으로 사서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대규모 자본밖에 없다. 자본이 없으면 누구도 대규모의 생산에 필요한 자재와 노동력을 공급하지 않는다. 상식이지만, 대규모자본이 있는 곳은 은행이다.

 

그러나 한 두 개 은행 갖고는 국가전체의 생산을 일으킬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아담 스미스가 말한 대로 “국가경제의 엔진”으로서 은행이 자리잡을 수 있으려면 모든 은행들에게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중앙은행이 존재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중앙은행이 전국에 걸쳐 일어났던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영란은행은 1760년 시작해서 1840년 즈음에 끝났던 산업혁명시기를 가히 혁명적으로 보냈다. 비록 머피가 세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영란은행 사람들이 고결한 일을 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으로서 영란은행의 역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바로 정부의 은행으로서 영란은행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영란은행이 중앙은행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1844년 로버트 필 수상이 만든 이른바 필조례에 의해서 였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때문에 영란은행의 설립을 1844년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설립은 한참 전인 1694년이다. 1844년의 의미는 영란은행이 잉글랜드 지역에 한해서 스털링 파운드를 독점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던 것을 말한다).

 

영란은행은 1694년 설립부터 정부의 자금줄 역할을 했다. 당시 영국은 네덜란드의 ‘오라녜의 윌리엄 3세’가 벌이고 있던 루이 14세와의 전쟁(1689~97년)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이 절실했다. 당시 영란은행이 빌려준 금액은 120만 파운드로 그리 크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대출 빈도가 많아지고 운영도 잘되다 보니 계속해서 성장세가 이어졌다. 1720년에 들어서는 10배가 넘는 1100만 판운드를 빌려주는 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1100만 판운드는 영국 정부 부채의 약 70%에 해당하는 규모다. 1763년에는 누적부채로 약 1억 33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규모로 영국 정부와 거래하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국가의 엔진”이 된 것이다. 1694년 설립 당시 직원 수 17명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성장세였다. 은행조사위원회가 가동중이던 1783년에는 300명 이상의 규모였다.

 

머피는 오늘날 은행원들은 “지옥의 창자” 속에 살고 있지만, 과거 영란은행 사람들은 “신용의 성당”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금융가 출신인 머피가 내린 평가이니 여느 아카데미 약력이 전부인 사람들의 평가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머피는 금융시장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마냥 치켜세우는 시장출신 연구자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영국제국주의의 돈줄이었던 영란은행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다.

 

 

[프로필] 송종운 경제학박사

•(현)금융경제연구소 초빙 연구위원

•(현)지방의정센터 센터장
•(현)한국사회경제학회 이사
•(전)백석예술대 초빙교수
•(전)울산과학기술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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