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박 대통령 시해사건 후에도 신군부가 정부를 장악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자율화가 논의되었다. 국보위의 경과(經科)위원장 김재익(金在益)이 경제분야를 다루면서 금융정책에 있어서도 자율, 개방의 필요성을 들고 나왔다. 더욱이 금융자율화 작업이 속도를 더해감에 따라 한국은행이 중앙은행 독립을 들고 나왔다. 이쯤 되자 금융정책을 담당한 재무부와 재무분과위원회, 그리고 한국은행과 경과분과위가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우세한 경과위 쪽에서는 김재익을 중심으로 ‘과감한 금융자율화’를 주장했고 재무위 측은 재무부와 연합전선을 펴면서 ‘점진적인 개선론’으로 맞섰다. 그러나 전두환의 경제 개인교수인 김재익이 있는 한 대세는 ‘과감한 금융자율화’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고, 재무부와 재무위가 수세에 몰렸다. 이에 더하여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하기 시작한 문희갑(文熹甲)이 운영위의 힘까지 김재익에게 몰아줬던 것이다. 신군부의 혁명의지가 가시기 전에 시중은행의 민영화도 매듭짓고, 한은법을 개정하여 재무부로부터 한국은행을 완전히 독립시키자는 것 등이 과감한 금융자율화의 골자였다. 국민에게 무엇인가 보여 주고 싶은 신군부도 과감한 쪽을 택했다. 한국은행 입장에서는 절호의 찬
떠나며 남으며 인간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유구한 세월 속에서 헤어지고 만나고 하다가 자취 없이 사라진다한들 어찌 이곳을 잊으랴 이곳은 한국금융의 고향 명예로운 곳 빛이여 영원하여라 우리도 서로 이 빛으로 살아가려니 한 마음 한 뜻, 이곳에 있으리 떠나며 남으며 1998년 말 한국은행과 분리되어 여의도에 있는 통합된 금융감독원으로 떠나며 은행감독원 임직원 이 세운 비문이 한국은행본관 서편 화단에 세워져 있다. 한국은행에서 은행감독원을 분리시키는 문제는 1997년 환란때 구제금융조건으로 IMF와 협약을 맺을 때 갑자 기 돌출된 것은 아니었다. 1950년 한국은행 탄생부터가 관치금융을 획책하는 기득권자들에게는 미운 집오리 새끼였다. 1950년 중반 한은법이 금융민주화에만 치중, 중앙은행의 권한이 너무 강하고 정부와의 정책협조가 어렵다는 불만을 늘 갖고 있던 재무부는 이 문제를 들고 나와 한은을 건드렸다. 처음 이 문제가 불거진 것은 김현철(金顯哲)장관과 김유택(金裕澤)총재 재임시절이다. 김총재는 이런 회고를 남기고 있다. “하루는 김현철 재무장관이 총재실로 왔다. 웬 일이냐고 물었더니 김 장관은 별다른 일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고 한국은행 이발소가 잘한다는 소문이
주말인 11월 8일과 9일. 강 부총리와 김 수석은 내내 머리를 맞댔다. 별다른 방안이 없었다. 11월 10일 이들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금융개혁법안과 IMF 지원요청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겠습니다.” 김 대통령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이날 하오 9시 30분 김 대통령은 이 한은 총재 집으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외환 사정을 꼬치꼬치 물었다. 11월 13일 밤. 빅 3는 라마다르네상스호텔에서 머리를 맞댔다. 보안을 지키기 위해 각자 저녁식사를 하고 모였다. 이 자리에서 ‘IMF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정부의 방침을 최종 확정했다. 다음날 14일 아침 이들은 청와대에서 ‘금융시장안정대책’을 보고하면서 정식 재가를 받았다. 김 대통령은 “나의 임기 중에 꼭 가야만 하느냐”라며 말끝을 흐렸다. 11월 14일 상오 10시 국회 재경위회의실. IMF 구제금융신청건에 대해 김대통령의 정식재가를 받은 강 부총리 는 복도에 늘어선 한은 관계자들을 비집고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금개법안 반대파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의원은 13명 중 10명, 찬성 쪽인 신한국당 민주당 의원은 16명 중 7명이 참석했다. 표결 처리할 예정이었으나 수가 부족했다. 강 부
1999년 10월 25일 하오 강경식(姜慶植) 부총리 집무실. 홍콩증시 폭락으로 외환·주식시장이 붕괴되고 외국자금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던 때였다. 윤증현(尹增鉉) 금융정책실장, 이윤재(李允宰) 경제정책국장 등 재정경제원 간부들이 속속 들어섰다. 이야기는 주로 두 사람이 했고 주제는 환율로 모아졌다. “시장 불안심리를 해소하기 위해 당국이 적극 개입해야 한다”, “가수요만 부추길 뿐이다. 자칫하면 금융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 하루 환율반등폭을 확대해야 한다.” 설전이 계속됐다. 강 부총리는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시장경제론자를 자처하는 그로서는 ‘시장 불개입’쪽. 재경원 모국장의 회고. “10월들어 환율문제로 경제정책국과 금융정책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그 자리가 처음이었다. 그전까지는 별도로 보고했다. 여기서 재경원의 금정실과 정책국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금정실은 구 재무부출신들이 핵을 이루고 정책국은 구 경제기획원 출신의 아성이었다. 기획원출신인 강 부총리는 금정실의 의견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다. 재무부 출신 모국장의 고백, “강 부총리는 간부 간담회를 하다가도 윤 실장이 들어서면 화제를 바꾸곤 했다. 금정실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