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강화도는 섬이지만 섬 같지 않은 곳이다. 육지와 지척이거니와 거기에 강화대교, 초지대교 등 육지를 연결하는 두 곳의 다리까지 놓였으니, 마치 강 건너 옆 동네 다니듯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과 같은 염하(鹽河)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지척 너머 육지와는 확연히 다른 ‘강화도’만의 토속문화와 특산물이 다양하다. 강화 인삼, 순무, 새우젓 등이 강화를 대표하는 특산물들이고, 이밖에 갯벌에서 많이 잡히는 갯장어가 유명하며 밴댕이와 꽃게 역시 강화를 대표하는 수산물이다. 또한 고려시대 때부터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 화문석은 강화를 대표하는 최고의 특산품이며 회, 무침 등 밴댕이를 이용한 요리가 발달한 곳도 강화이고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젓국 갈비라는 음식도 강화에서만 맛볼 수 있다. 이렇듯 강화도에는 인삼 시장, 젓갈 시장, 전통 풍물시장, 더리미장어마을, 화문석 마을, 후포항 회센터 등 여느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특산물 전문 시장과 전문 마을이 있어 강화를 찾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강화도의 대표적인 시장과 특산품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시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제주목사였던 양헌수는 천총에 임명되어 이미 프랑스군의 휘하에 들어간 강화도를 수복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통진부에 진을 친다. 그러나 화포 등 월등한 신식장비를 앞세운 프랑스군을 상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장군 양헌수는 기병 작전 등 다양한 묘책을 세웠다. 그리고 포수 등 5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야밤을 틈타정족산성(삼랑성) 점거에 성공하였고, 그곳에서 양헌수는 성을 향해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을 대파하였다. 이 전투로 인해 프랑스군은 조선 침범 한달 여 만에 퇴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서양과의 전쟁에서 최초의 첫 승전보를 올린 전투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역사는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정묘와 병자년 호란에 조선 임금은 두 차례나 강화도로 피신을 하였고 몽골의 침입이 있었던 고려시대에는 개성에서 이곳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 이전의 시절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왜구와 해적 등 침략자들은역사적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강화도를 침략하였고 그럴 때마다 강화도에 살던 이 땅의 백성들은 목숨을 바쳐 맞서 대항하였다.이러한 흔적들은 아직도 강화도 곳곳에 생채기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다. 단재 신채호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꽃이 진다고 서러워할 일만은 아니지, 내년 봄이 오면 다시 피어날 테니까. 아쉬운 마음이야 오죽하겠냐마는.” 진해라는 도시는 조용한 도시다. 지금은 창원, 마산과 병합되어 창원시에 속한 진해구가 되었지만, 함께 병합된 원마산이나 원창원처럼 활기가 넘치거나 인근 도시인 통영, 거제처럼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도시는 아니다. 그러나 3월 말이면 달라진다. 도시 전체에 있는 삼십만 그루의 벚나무에서 일제히 꽃망울이 터트리기 시작하면 도시는 몸살을 앓게 된다. 일 년에 한번, 수만 송이 꽃망울처럼 수만의 인파가 진해 벚꽃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 진해 벚꽃 앓이가 시작된 거다. 여좌천 여좌천 벚나무는 수령이 많은 노거수가 대부분이다. 그 늙은 벚나무 그늘 아래로는 젊은 청춘들이 넘쳐난다. 잿빛 개울을 따라 늘어진 벚꽃 가지에는 솜사탕처럼 꽃망울이 열리고 바람이라도 하늘거리면 떨어지는 모습조차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그래서 여좌천은 진해 벚꽃의 1번지라 불린다. 비가 내리고 바람도 드문드문 불어댄다. 꽃잎은 하릴없이 떨어지고, 떨어진 꽃잎은 여좌천 물길을 따라 유유히 떠내려간다. 속절없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해서 물끄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 없듯 가슴 벅차 오르던 감흥도 잠시, 꽃은 처연하게 이미 지고 말았다. 섬진강, 오백여리 그 벚꽃 길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데미샘에서 시작하는 섬진강은 소백산맥 산허리를 따라 오백여 리 흘러내려 광양만에서 바다와 만난다. 강은 작은 물줄기로 시작되어 계곡과 여러 실개천물을 보듬으며 세를 불려 강이 되고 바다로 나간다. 섬진강도 그러하다. 켜켜이 얽힌 진안고원 깊은 산골 물줄기들이 개천으로 모이면서 좌포, 음수동을 지나 양화뜰에 이르러 비로소 강의 모습을 갖추어 흐른다. 그렇게 시작된 강은 오백여 리를 흘러내리며 아름다운 풍광뿐만 아니라 강변마다 사람들의 터전을 내어주고 그 사람들과 어울리며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흘러내리고 있다. 어느 곳이든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사연과 곡절이 있기 마련이다. 필자 역시 유년의 시절 십여 년을 섬진강변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의 아련함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강은 늘 그리움의 대상으로 내 안에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순례하듯 해마다 섬진강을 찾아오곤 한다. 이번 여행길은 남해를 거쳐 하동을 지나 구례 가는 19번 국도를 따라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만화방창(萬化方暢)계절이 따뜻하여 만물이 소생하니 이러함이 만화방창(萬化方暢) 아니면 그 무엇이겠는가!” 여수 밤바다 조용하고 아늑한 작은 항구였던 여수가 언제부턴가 밤이 없는 도시로 탈바꿈이 되었다. 어느 도시가 짧은 시간 내에 이처럼 변화무쌍해진 곳이 있을까? 여수를 대표하는 음식 게장백반으로 든든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여수 밤거리로 나선다. 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돌산대교며 거북선대교, 그리고 여수항 인근 전체가 화려한 조명으로 밤을 밝히고 있다. 말 그대로 불야성, 예전에는 이른 저녁이면 벌써 파장 분위기였던 수산시장도 불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수산시장을 둘러보고 낭만포차거리는 스쳐 지나간다. 발 디딜 팀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이브하듯 한적한 곳을 찾아 봄바람 일렁이는 여수 밤 풍경을 돌아본다. 요란함에 휩쓸리지 않아도 마음은 어느덧 동요되어 콧노래 흥얼거리며 발걸음조차 사뿐하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여수 밤거리, 밤풍경의 모습이다. 해를 향해 자리 잡은 향일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는 곳 가운데 여수 돌산도 끝자락에 있는 향일암을 최고로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양춘가절(陽春佳節) 따뜻한 볕 들어 엄동의 기운 몰아내니 비로소 봄이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시절도 시작되었다.” 화엄사 흑매는 피어나지 아니하고 꽃은, 때가 되면 반드시 피어난다. 다만 성급하게 찾은 발걸음과 피어날 때가 안된 매화가 서로 엇박자 났을 뿐이다. 화엄사 계곡은 흑매 뿐만 아니라 산수유를 비롯한 다른 꽃들도 꽃봉오리를 앙다문 채 터트릴 기미조차 없다. 다만 노고단으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물줄기 소리가 요란한 걸 보니 봄이 지척에 있음을 대신 알려준다. 이렇듯 화엄사 계곡으로 꽃을 찾아 떠난 이른 봄 여행은 먼발치서 마중만 하고 돌아서야 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피어날 때와 찾는 이의 발걸음이 제때여야 만개한 인연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사소함도 연이 닿지 않으면 비껴가거나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 화엄성중(華嚴神衆) 가득한 화엄사 계곡에서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순천 웃장, 넘쳐나는 인심 순천 웃장으로 간다. 순천에는 웃장뿐만 아니라 아래 장도 있다. 짐작했겠지만 웃장은 위쪽에 있는 장, 즉 순천 북쪽에 있는 장이고 아래 장은 순천 남쪽에 있는 장이다. 시장이 그러하듯 순천 웃장에도 시절보다 먼저 봄이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봉래폭포 저동항에서 성인봉 방향으로 2km 지점에 있는 봉래폭포는 울릉도 유일한 폭포이며, 그 수량은 매일 3000톤 이상 흘러내린다. 오염원이 전혀 없는 원시림에서 흐르기 때문에 물이 깨끗하고 맛이 좋아 저동과 도동 주민들의 식수원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폭포 오르는 중간쯤에는 사계절 내내 섭씨 4도를 유지하는 풍혈(風穴)이 있는데, 전북 진안의 풍혈, 경남 밀양의 얼음골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인 3대 풍혈지역으로 손꼽는 곳이다. 천연냉장고와 에어컨보다 더 시원한 자연 바람이 나오는 풍혈은 여름철 지역 주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휴식처다. 성인봉 울릉도의 주산(主山)이며 성스러운 형태를 띠고 있어 성인봉(聖人峰)이라 부르는 성인봉은 그 높이가 해발 986.7m에 이른다. 성인봉 기점에서 세 방향으로 흘러내린 산맥을 따라 서면, 남면, 북면으로 울릉도의 경계가 나뉜다. 성인봉에는 300여 종의 식물이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정상 부근의 원시림은 여럿 희귀수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천연기념물 제18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도동이나 사동을 출발하여 정상 너머 나리분지로 내려오는 산행길은 울릉도 여행의 백미로써 빠뜨리지 말아야 할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울릉도의 진면목, 서남쪽 해안 길 나리분지를 돌아서 나와 서남쪽으로 향하면 또 다른 울릉도의 진면목을 만나게 된다. 현포항을 거쳐 현포전망대를 지나면 오르막 산길로 이어진다. 길은 마치 깊숙한 산중으로 들어가는 기분마저 들 정도로 구부렁 길이다. 길은 현포령을 넘어 사동으로 가는 길 내내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그 너머로 펼쳐지는 울릉도 서남해안의 풍경에 감탄사는 연발하고 발걸음 또한 느려진다. 대한민국 10대 비경으로 꼽히는 태하전망대를 비롯하여 만물상전망대, 사자바위와 통구미해변, 그리고 통구미터널과 산으로 오르려는 거북바위도 만난다. 또한 울릉도 최고의 낙조 명소가 서남해안 부근이다. 울릉도 낙조는 현포, 만물상전망대 뿐만 아니라 서남해안 어느 곳에서든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암벽을 뚫어 만든 해안 터널도 이색적이며 아찔한 일주도로를 한참 지나고 나면 사동항이 나타난다. 이곳 사동항 인근에 울릉도 주민의 오랜 염원이었던 공항이 조만간 들어설 예정이라 하니 관광객 접근성뿐만 아니라 현지인 육지 나들이 또한 용이해 질것을 기대한다. 현포전망대 현포항을 지나 사동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르막 왼쪽으로 팔각정과 전망대 데크가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울릉도를 여행하려면 최소한 2박 3일 정도의 일정을 잡고 와야 한다. 특히 독도까지 둘러볼 계획이라면 1박 2일 일정은 빠듯하다. 더욱이 울릉도 날씨는 사시사철 변화무쌍하여 자칫 발이 묶이기에 십상이고 파도가 조금만 높아도 독도는 유람선 접안이 어렵기 때문에 울릉도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적 여유를 갖고 오는 게 좋다. 울릉도 여행은 크게 세 군데로 나눠진다. 첫 번째 코스는 최근에 완성된 섬 일주 도로를 따라 저동항을 출발하여 관음도, 삼선암, 나리분지, 통구미터널, 사자암을 둘러보는 섬 일주 코스다. 반대 방향으로 시작해도 첫 출발지로 되돌아올 수 있으니 어느 방향으로 출발할지는 현지 상황과 시간 등을 고려하여 결정하면 된다. 두 번째 코스는 봉래폭포를 비롯하여 저동 촛대바위, 내수 전망대,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독도 전망대, 그리고 행남등대 해안 트레킹 길이다. 세 번째 코스는 울릉도 관광에서 빠뜨릴 수 없는 독도방문이다. 하지만 기상 상황에 따라 배가 출항하지 못하거나 접안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방문하는 날 날씨가 좋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50여 년 만에 완전한 섬 길이 열리다 울릉도 일주도로 건설을 계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켜켜이 놓인 섬들은 대부분 그 중심에 산을 품고 있다. 통영에 속한 섬들도 마찬가지다. 미륵도의 중심에는 미륵산이, 사량도에는 지리망산이, 욕지도에는 천황산이 그리고 한산도에는 망산이 섬의 주축으로 우뚝 서 있다. 섬에 속한 산들의 특징은 능선이 잘 발달하여 정상을 오르는 내내 시원스레 펼쳐진 바다 조망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통영의 섬들이 아름다운 데는 섬이 품고 있는 산이 한몫한다. 산은 높지 않으나 기암과 바위가 능선을 이루고 있어 절경인 곳이 많고 그 모습이 바다와 조화를 이루면서 찾는 이들에게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게 한다. 산과 바다를 동시에 여행할 수 있다는 점이 섬 산을 등반하는 또 다른 매력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길 나섬조차 망설여지는 요즘, 전염병이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질 만큼 안전함과 쾌적함을 아낌없이 건네주는 곳이 자연의 품이다. 생활 일부가 돼 버린 마스크를 잠시 벗어 놓고 심호흡 마음껏 하면서 올 가을, 다도해 곳곳에 둥실 떠 있는 통영의 섬 산 능선을 걸어 보기를 권한다. 걷다 보면 고단했던 마음도 치유될 뿐만 아니라 자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륵도의 중심 미륵산(彌勒山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동해를 지나 육지로부터 160km 떨어진 망망대해에 저 홀로 우뚝 서 있는 섬이 울릉도다. 우리나라 섬 가운데 그 크기로는 8번째이며, 부속된 섬으로 독도와 우도 등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500년대 우산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신라 장군 이사부가 신라로 귀속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한때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되기도 했었지만 오랜 기간 대부분은 육지로부터 이주해간 선조들이 터전을 일구고 뿌리를 내려 오늘에 이르렀다. 섬 전체가 화산섬이며 섬을 대표하는 성인봉은 그 높이가 해발 984m에 이른다. 화산으로 인해 형성된 섬이다 보니 해안가는 대부분 절벽으로 최근에 일주도로가 생길 만큼 섬 전체가 험준한 지역으로 이뤄져 있다. 울릉도는 파도와 풍랑이 심한 동해안에 위치한 까닭에 그동안 육지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포항뿐만 아니라 강릉과 묵호 등지에서도 쾌속선이 운항되고 있어 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또한, 몇 년 후면 울릉도에 공항까지 들어설 예정이어서 접근성이 한결 나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예부터 도둑, 공해, 뱀이 없고 水(물), 美(미인), 石(돌),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비단결처럼 고운 남해와 함께 통영 뭍 건너에는 570여 곳에 이르는 아름다운 섬이 보석처럼 촘촘히 뿌려져 있다. 손을 내밀면 닿을듯한 미륵도가 지척에 있고 서쪽으로는 사량도, 남쪽으로는 욕지도, 그리고 동쪽에는 한산도와 매물도까지 이어진다. 통영의 섬들은 바다와 어우러진 천혜의 풍경이 모두 아름다워 1968년 국립공원 4호로 지정되어 ‘한려해상 국립공원’으로 불린다. 통영에서 섬 여행은 빠뜨리지 말아야 할 필수다.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세세히 들여다보면 섬마다 각기 다른 특징과 개성을 지니고 있어 여행지로서 어느 한 곳이라도 빠뜨리기 아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곧 가을이 다가온다. 긴 장마와 8월의 뙤약볕을 지나 갈바람 부는 9월에는 아름다운 통영의 섬들로 휴식 여행을 떠나보는 게 어떨까? 손 내밀면 닿을듯한 섬 미륵도 미륵도는 육지와의 거리가 불과 수백여 미터에 불과하다. 육지와 섬 사이가 가깝다 보니 이미 일제 강점기에 육지와 연결하는 해저터널이 동양에서 최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인근 주민들은 지금도 해저터널을 통해 걸어서 섬과 육지를 왕래하고 있다. 미륵도 중심에는 461m에 이르는 미륵산이 있는데, 이곳에는 미륵산 정상부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도깨비불을 보았다. 긴 꼬리를 단 가오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비석 고개, 낮에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뜨음했다. 시구문에는 유약국이 살았다. 그 집 둘째가 청마 유치환 行而不言(행이불언)이라 밤을 새워 말술을 푸되 산군처럼 그는 말이 없고 서느렇던 이마, 海底(해저) 터널 너머 해핑이로 가는 신작로 그 어디 길섶 푸르스름한 패랭이꽃 그리고 윤이상 각혈한 핏자국이 한참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늘 보는 바다 바다가 그날은 왜 그랬을까 뺨 비비며 나를 달래고 또 달래고 했다. 을유년 처서 조금 전의 어느 날. _김춘수 시인의 詩 [통영읍] 통영만큼 여러 별칭을 가진 도시도 드물다. 한국의 나폴리, 한려수도의 심장, 바다의 땅이라고도 불린다. 이렇듯 통영을 다양하게 불리는 까닭은 통영이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남해에 보석처럼 촘촘히 박힌 150여 개의 섬을 품고 있으며, 그 섬들과 섬들을 이어주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이자 관문인 곳이 바로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이라와디강을 끼고 만달레이 남서쪽에 위치한 사가잉은 아바 왕조의 수도로서 백색의 탑들이 사가잉 힐을 정점으로 사방에 흩어져 있다.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하나의 점처럼 도드라지게 드러내고 있는 사가잉의 파고다들은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바간의 탑들과는 달리 백색과 금색의 탑들이 대부분이어서 그 모습이 멀리서도 확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사가잉은 11세기 무렵 샨족에 의해 사가잉 왕국이 들어서며 수도가 되었고, 이후 아바 왕국 등 수세기 동안 고대 미얀마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중세기 한때 미얀마의 수도였던 도시는 하지만 만달레이가 행정의 중심도시가 되면서 쇠퇴해져 갔다. 지금은 파고다 외에 도시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일찍이 고대국가의 틀을 완성했던 곳으로 현재도 많은 파고다와 사원들이 산과 강가에 즐비하게 남아있어 그 화려했던 시절의 면목을 짐작케 한다. Hill_사가잉 힐 사가잉 힐은 만달레이에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언덕이다. 이라와디강가 높이 240미터의 구릉지대를 일컫는 사가잉 힐은 고대도시 사가잉의 중심부이며 언덕에 올라서면 멀리 만달레이뿐만 아니라 미얀마의 젖줄 이라와디강과 수백여 기의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만달레이는 미얀마의 대표 부족인 미얀마족이 꼰바웅 왕조 민돈왕 시절에 세운 도시다. 미얀마 고대를 대표하는 왕이자 미얀마의 흥망성쇠와 함께한 민돈왕은 1857년, 만달레이 언덕에 불교의 설화를 기반으로 도시를 세우고 이곳을 왕조의 수도로 삼는다. 하지만 1885년 발발한 미얀마-영국 간의 전쟁에서 패배로 인해 식민 지배를 받게 되며 만달레이는 왕조시대 최후의 수도로 남게 되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하는 등 굴곡진 역사를 겪어온 만달레이는 흉터처럼 지금도 도시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라와디강을 끼고 있는 만달레이는 미얀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부호들이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200여 년 채 안 되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도시 전체가 하나의 역사공원으로 불릴 만큼 많은 오늘날까지 많은 유물과 유적이 남아있다. 이는 미얀마인들에게 만달레이는 침략자들에 대한 저항의 상징 도시이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신앙의 중심지로 여겼기 때문에 쿠도도 파고다를 비롯한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고, 지금도 미얀마인들은 이곳을 가장 신성한 순례지 가운데 한곳으로 여긴다. Mahagandhayon kya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양곤에서 북쪽으로 500km 떨어진 바간(Bagan)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와 함께 세계 3대 불교 유적지 가운데 한 곳이다. 동남아시아 최대의 불교국가를 이룩하고자 했던 고대 미얀마 왕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수 세기 동안 수많은 파고다와 사원이 건축되었으나 몽골과 서양의 침략, 그리고 대지진으로 인해 많은 유적지가 소실되거나 피해를 당하였다. 흥했던 시기는 11세기 무렵이다. 미얀마 족이 세력을 떨쳤던 바간 왕조 시대 아나와라하따 왕이 이 지역을 정복한 후 불경을 들여오면서 바간 지역에 2세기가 넘도록 수 많은 파고다와 사원이 세워지게 된다. 불국정토를 염원하며 건설되었던 파고다의 도시는 13세기 몽골군의 침략으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까지 이어지는 수십여 차례의 지진이 많은 파고다와 사원을 붕괴시켜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유실되었음에도 5천여 개의 파고다와 사원이 현존하고 있다 하니 그 방대한 규모를 어림짐작하기에도 벅차기만 하다. 이곳은 현재 세계 최대의 불교문화 유적 지역으로 인정받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인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Shwezigon P
(조세금융신문=황준호 여행작가)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반도와 인도 대륙 사이에는 미얀마(옛 이름: 버마)라는 나라가 있다. 일찍이 찬란한 고대 국가를 건설했던 나라이지만 현재에는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는 태국과 인도 등 주변 국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나라다. 동남아의 대부분 나라가 그러하듯 미얀마 역시 서양 열강들의 침략과 식민지 통치를 거쳐 50여 년 넘도록 군부 세력이 나라를 장악했던 격동기를 거치게 된다. 우리에게는 1983년 랑군(지금의 양곤)에서 자행된 아웅 산 테러 사건으로 더 알려진 나라이기도 하다. 오랜 군정 끝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정이 들어서면서 개혁과 개방이 급속도로 이뤄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신변벽두부터 군부 쿠데타로 인해 다시 혼란으로 빠져들고 있는 모습이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다. 미얀마를 다녀온 지는 5년 전의 일이다. 당시만 해도 가난하지만, 신앙심으로 내재하여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평화’로운 모습을 느낄 수 있었는데, 쿠데타세력과 맨몸으로 맞서는 오늘 그들의 모습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기가 느껴졌다. 하루빨리 평화를 되찾고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그들의 얼굴에 다시 따뜻한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