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나단(Nathan) 작가)
子夏問;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자하문; ‘교소천혜, 미목반혜, 소이위현혜’. 하위야.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자왈; 회사후소. 왈 예후호.
子曰; “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
자왈; 기여자상야. 시가여언시이의.
자하가 여쭈었다. “(시경에) 어여쁜 미소에 팬 보조개, 아름다운 눈에는 눈동자가 빛나니, (얼굴이) 하얀 것 위에 더 곱구나’라고 하였는데, 무슨 뜻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먼저 흰 바탕을 만든 이후의 일이다.”
자하가 여쭈었다. “예는 그 후에 오는 것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깨우치는 것은 상商이구나. 비로소 더불어 시詩를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 팔일八佾 3.8
자하(子夏, 기원전 507년~420년(?))는 공자의 제자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공문십철’ 중 한 명입니다. 이름은 복상이고, 자는 자하입니다. 공자보다 44살이나 연하여서 그런지 말년에 가장 아낀 제자 중 한 명입니다. 그는 학문에 뛰어났고, 공자는 그를 진정한 선비로 인정했습니다.
이 일화에서 제일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회사후소(繪事後素)입니다. 회사(繪事)는 ‘회화에 관한일’이고, 소素는 ‘흰색, 바탕’을 의미합니다. 즉,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흰 바탕을 만든 이후라는 것입니다. 흰 바탕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야 더 빛이 납니다. 화려한 색상 위에 그림을 그리면, 당연히 그림의 주제가 잘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 예를 통해서 자하는 ‘인’이 그림의 흰 바탕, ‘예’가 그림이냐고 질문했고, 공자는 감탄하면서 대답했습니다. 이제 너와 시詩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70대의 스승이 20대인 제자의 실력을 인정한 것입니다.
공자는 속안에 감춰진 ‘인’의 정신과 겉으로 드러나는 ‘예’를 모두 중요시했습니다. 스스로 예를 지키면서 모범을 보였습니다. 《논어》에서 수없이 ‘예’를 언급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가 경계한 것은 허례허식(虛禮虛飾)이었습니다. 진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 없이 겉치레에만 신경 쓰는 예를 부정했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인仁하지 않으면 어찌 예가 닿겠는가. 사람이 인仁하지 않으면 음악이 어찌 미치겠는가?” - 팔일편(3.3)
겉으로 드러나는 ‘예’보다 중요한 ‘인’의 마음
우리나라에도 유학(儒學)이 삼국시대에 전해졌지만,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것은 조선시대부터입니다. 유학이 학문의 기본이면서 통치 이념이 되었습니다.
다만 공자의 기본 이념인 ‘인仁’에 대한 중요성이 일부 퇴색하고, 오히려 ‘예禮’를 중요시하면서 이를 강제화 시킨 점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지나치게 복잡한 예절과 의식이 대표적입니다. 진심으로 그것을 원하고 필요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예법이라는 것으로 정해지면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멋진 예식을 보이면서, 주위에 과시하고픈 마음도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후대에 과도한 예식에 대한 부담과 거부감이 생긴 이유입니다.
공자는 무엇보다 ‘검소함’을 중요시했습니다. 임방(林放)이라는 사람이 예의 근본에 대해서 질문하자, 공자는 “예는 사치스러운 것보다는 오히려 검소한 것이 낫고, 장례는 능숙하게 처리하는 것보다 오히려 슬퍼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인’을 ‘예’보다 중요시한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자신의 아들과 제자 안연이 세상을 떠났을 때입니다. 안연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을 내던지고, 통곡을 하면서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아! 하늘이 나를 죽이는구나! 하늘이 나를 죽이는구나!” - 선진편(11.8)
이러한 공자의 다른 모습에 제자들은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께서 너무 애통해 하십니다.” - 선진편(11.9)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너무 애통해 한다고? 내가 그를 위해 슬퍼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슬퍼하겠느냐?”
제자들이 섭섭해할 수 있는 말인데도, 공자는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솔직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인仁’의 정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이를 실현할 사람은 안연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다른 훌륭한 제자들도 많았지만, 그들은 안연만큼 ‘예’를 초월한 ‘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안연의 학문과 삶의 자세는 유가(儒家)의 형식을 비판하던 도가(道家)에서도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중용의 도’를 지킨 예란 무엇인가?
안연이 죽자, 제자들은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고 싶었습니다. 평소 그의 언행을 보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반대했습니다. 검소하게 치를 것을 주장했습니다.
안연이 평민이어서 그에 맞춘 장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자식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공자의 외아들 공리(孔鯉, 기원전 532년~483년)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조용히 그리고 소박하게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놀랍게도 스승의 말을 무시하고 안연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공자는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는 나를 아버지로 대했지만, 나는 아들처럼 대하지 못했다. 나 때문이 아니다, 몇몇 제자 때문이다.” - 선진편(11.10)
공자는 지나친 예절보다는 ‘중용의 도’를 지킨 예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공자를 신격화하고, 그의 진정한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가 주장하던 핵심인 ‘인仁의 정신’을 잊고, 사람들은 예절과 의식에 지나치게 얽매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상하의 예의는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예를 표해도, 속으로 상대방을 욕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가 아닙니다. 겉만 번드레한 예절입니다.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합니다.
마치 ‘인’과 ‘예’에도 순서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인’이라는 흰 바탕을 마련한 후 ‘예’라는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림이 제대로 빛납니다.
[프로필] 조형권(나단) 작가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논어를 읽다》 출간, 교보문고 MD의 선택
•《적벽대전 이길 수밖에 없는 제갈량의 전략기획서》 출간, 교보문고 북모닝 CEO도서 선정
•《공부의 품격》 출간
•(현)SK그룹 내 마케팅 임원
•성균관대학교, EMBA 석사 졸업
•고려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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