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방영석 기자) 보험사들의 수익성 저하의 원인으로 꼽혔던 실손보험에 대한 금융당국의 대처가 사실상 '갈아타기'를 허용한 면죄부라는 지적이다.
비급여 보장이 넓고 자기부담금 비중이 낮은 기존 실손보험의 보험료는 약 10% 인상하는 대신 보장범위를 줄이고 보험료를 낮춘 신(新) 실손보험료는 10% 가량 인하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
이로인해 보장 범위의 차이로 좀처럼 기존 실손보험 가입자를 끌어들이지 못했던 신 실손보험 가입자가 늘어날 수 있을지에도 보험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3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보험사들에게 표준화 이전 실손의료보험(구실손보험)과 표준화 실손보험의 보험료를 각각 약 10% 인상하도록 하고 신실손보험은 기존 실손보험 인상률 만큼 인하하도록 하는 의견을 전달했다.
극도로 악화된 실손보험 손해율로 소비자 부담을 이유로 보험료 인상을 억제하는데 한계가 다가온 금융당국이 상품별로 보험료를 차등 변동하도록 하는 해결책을 제시한 것.
실손보험은 2009년 10월 표준화 이전에 판매된 구실손보험과 2009년 10월부터 2017년 4월까지 판매된 표준화 실손보험, 2017년 4월부터 판매되기 시작한 신실손보험 등 총 3가지 종류로 나뉜다.
구실손보험의 경우 소비자의 자기부담금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표준화 실손보험 역시 자기부담금이 10%에 머물러 있어 보험사의 부담이 컸다.
실손보험은 기본적으로 보험료를 납부한 소비자에게 실제로 발생한 손해를 반복해 보장하는 상품이다. 연령에 따라 보험료가 할증되기는 하나 소비자의 보험금 청구에 따라 할증이 구별되지는 않는다.
소비자 입장에선 실손보험료를 많이 청구하든 단 한번도 청구하지 않든 연령대별 손해율에 따라 보험료가 할증된다.
기회가 될 때마다 보험금을 받지 않으면 보험료만 납부하고 이득은 보지 못하는 만큼 보험료를 많이 청구할수록 ‘똑똑한’ 소비자가 됐었던 셈이다.
이 같은 상품 구조는 자연스레 실손보험 손해율의 급격한 상승을 이끌었다. 작년 상반기 기준 13개 손해보험사의 실손보험 손해율은 129.6%로 130%에 육박했다. 이 기간 보험사가 실손보험에서 기록한 손실액만 1조 3억원에 달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실손보험 판매 자체를 포기하는 보험사들이 속출했다. 국민 대다수가 가입하는 특성상 ‘연계상품’의 위상이 굳건했음에도 막대한 손해를 감담하지 못하고 두 손을 드는 보험사들이 적지 않았던 셈이다.
이 같은 상황은 소비자 보호를 위해 보험료 인상을 억제해왔던 금융당국의 골머리를 앓게했다. 소비자 권익도 중요하나 자칫 기형적인 시장 환경을 방치한다면 실손보험이란 상품 자체가 시장에서 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7년 출시된 신 실손보험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승부수’였다. 해당 상품은 일부 과잉 진료가 빈번한 비급여 항목(도수치료•비급여주사•비급여MRI)을 특약으로 분리하고 자기부담금 비율을 30%까지 높였다. 대신 보험료는 낮춰 소비자 부담을 덜어냈다.
신․구실손보험의 차이점은 역설적으로 보험사가 비급여와 자기부담금 문제 해결을 위해선 보험료 수입을 충분히 포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장기적인 보험금 지급 부담을 감안할 때 기존 실손보험 대비 보험료 수입이 25% 가량 줄어드는 신실손보험으로 고객을 ‘갈아 태우는’ 선택을 내렸던 셈이다.
문제는 신실손보험이 기존 고객에게 내세울 수 있었던 ‘저렴한 보험료’라는 장점이 수많은 손실을 반복 보장 받을 수 있다는 기존 상품의 장점을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점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 기존 실손보험 가입자는 전체 실손보험 가입자 3396만건 가운데 3145만건으로 92.6%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7.4%만 신실손보험에 가입된 것이다.
보험료 인상 억제 기조를 유지했던 금융당국이 올해 상품별로 보험료 인상․인하폭을 달리 조정한 것은 신실손보험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미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는 기존 상품과 신상품의 보험료 격차는 금융당국의 이번 결정으로 약 20% 추가로 벌어진다. 이론상 두 상품의 보험료 격차가 50% 가까이 벌어지게 된 셈.
연령에 따라 보험료가 급격히 늘어나는 소비자들이나, 사고가 상대적으로 적게 발생하는 젊은 소비자들이 신실손보험으로 계약을 전환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란 분석이다.
과거 상품의 손해율을 이유로 소비자의 계약을 강제로 신상품으로 전환할 수도, 그렇다고 보험사에게 마냥 손해를 보면서 상품을 팔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금융당국의 고민의 결과가 드러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실손보험은 국민 대다수가 가입한 방대한 시장을 지녔으나 과거 상품의 경우 보장범위는 무제한에 가까우면서도 보험료가 개별 할증되지 않아 결국 보험료를 많이 청구 할수록 ‘가성비’가 좋아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낳았다”며 “보장범위를 좁힌 신실손보험으로 고객을 유도하기 위해 저렴한 보험료를 앞세웠지만 현재까지 그 효과는 크지 않았던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올해 보험료가 상품별로 달리 조정될 경우 신실손보험이 지닌 유일한 장점인 저렴한 보험료라는 강점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며 “본인이 납부하는 보험료 수준과 보장 범위, 자기부담금 등의 상황을 종합 분석해 기존 계약을 유지할지 신실손보험으로 전환할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된 소비자에게 선택권이 주어진 셈”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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