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공적자금 규모는 얼마나 될까
2001년 9월 공적자금 백서가 발표되기 전에는 재경부와 금감원, 그리고 예보공사는 공적자금규모가 64조 원이라고 했다. 그러던 것이 규모가 부풀어졌다. 이에 대하여 한나라당에서 발표한 공적자금보고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난해 정부가 발표한 ‘공적자금 백서’를 통해 입증된 공적자금 규모가 국민이 알고 있던 64조 원이 아니라, 공공자금이라는 명목으로 국민들 몰래 동원한 자금까지 포함 109조6,000억 원을 사용하였다는 충격적 사실이 나타났다. 정부 발표 공적자금투입액 109조6,000억 원은 2001년도 정부예산 100조 원보다 많을 뿐만 아니라, 1999년도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483조 원의 23%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이다.”
최근의 공적자금 잔액을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공적자금관리위원회의 인터넷 사이트를 열어보면 된다. 2002년 3월 31일 현재 공적자금은 156조2,000억 원이다. 4,700만 명의 국민 1인당 332만 원이 되고, 가구당 1,085만 원씩 우발채무를 보증 서주고 있다.
한나라당 이한구(李漢久) 의원은 숨겨진 공적자금이 더 있다고 한다. 공적자금백서에서 구조조정전담기구가 아닌 정부기관을 공적자금의 지원주체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동일한 목적이라면 공기업, 국책은행들도 포괄해야 한다.
즉, 1998년 4월 14일 경제대책조정회의에서 ‘금융·기업구조개혁촉진방안’의 일환으로 토지공사가 기업보유토지를 매입토록 결정한 3조 원과, 1999년 11월 산업·기업은행이 투신사에 출자한 것, 또한 정부가 사실상 관장하고 있던 투신안정기금도 금융구조조정촉진용으로 사용했다면 포함해야 한다. 이 돈이 1조 3,000억 원. 구조조정전담기구들에게 발행채권의 이자를 재정자금으로 융자(3년간 무이자)하는 몫, 만일 재정융자 안 하면 구조조정전담기구(예보공사, 자산관리공사)들이 채권발행(공적자금)을 증가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구조조정전담기구들의 재정융자원리금 상환능력에 의문(정부부담으로 귀착)이 있으므로 사실상 공적자금으로 보아야 한다. 2000년 말까지 원금에 대한 이자 10조9,000억 원.
예보공사의 자회사인 한아름종금, 한아름금고가 금융구조조정을 위해 투입한 금액 중 예보공사가 아직 지원해주지 않고 자체부담한 경우는 정부의 공적자금투입통계에는 반영이 안 되어 있다. 특히 결과적으로 손실(11~13조 원)을 보아 한아름종금 해산 시 예보공사가 떠안게 된 부분은 무자본특수법인인 예보공사의 경우 별도 재원이 없으므로 1차적으론 예보공사가 부담하고 최종적으로 정부에 의한 공적자금투입밖에 해결책이 없다. 이 돈이 11조4,000억 원.
구조조정전담기구들이 정부지급보증의 채권발행 이외의 방법(자산관리공사, 국책은행 등으로부터 차입)으로 자금을 동원해서 금융구조조정에 사용한 경우에는 자금사용 목적상 당연히 공적자금으로 포함시켜야 한다. 7조7,000억 원.
산업은행이 자금난을 겪고 있는 현대그룹을 위해 신용평가에 불구하고 정책적으로 대신 회사채상환을 해주는 경우, 심각한 상황에 빠진 금융시장의 안정을 통해 예금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이라면 ‘변칙적 공적자금’으로 계상해야 한다. 10조 원 이상. 이러한 공공자금 투입부문까지 합산하면 220조 원을 상회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적자금은 언제부터 생겨난 걸까
1997년 11월 21일. 재경원은 5,000억 원 상당의 한전주식을 산업은행에 현물 출자하였다. 성업공사(자산관리공사)에 금융기관 부실채권정리기금으로 출연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공적자금의 시발점으로 공적자금백서는 보고 있다. 부실채권관리기금이란 도대체 무엇에 쓸려고 만든 것일까.
1997년 4월 2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경원은 금융기관채권 및 부실징후기업의 효율적 처리를 위한 전담기구설치방안을 마련하고 기금 15조 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전담기구는 성업공사를 지칭하는 것이고, 재원은 금융기관 출연과 채권 발행으로 조성한 뒤 5년간 한시적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 기구설치를 서두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1조2,000억 원 규모의 부동산 매각 등 자구책을 제시한 뒤 실제론 부도를 내고 금융기관과 부도방지협약에 의해 연명하고 있는 진로그룹 지원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원초적으로 부실채권전담기구인 성업공사의 탄생도 기이하다.
산업은행은 해방 후에는 부흥자금, 한국동란 후에는 재건자금을 원조자금과 국가재정을 자원으로 산업체에 투융자해왔다. 융자를 받은 산업체들은 산업은행 돈은 미국에서 원조 받은 돈이므로 공돈으로 인식하고 상환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대출은행은 차주와 끈끈한 관계가 있기 마련이므로 야박하게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이런 대출금을 회수하려면 다른 별도 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1961년 7월 산업은행은 정부 출자 50억 환(5억 원)으로 가칭 ‘한국정리공사’라는 기구를 만들기 위해 독립법 제정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이를 부결하고 산업은행법을 근거로 성업공사령을 만들어 산업은행의 고질 연체대출금과 유입물건을 인수받아 그 가치만큼을 자본금으로 출발하도록 하였다. 유입물건이란 은행이 대출금을 회수하기 위해 법원경매를 신청하였으나 경락자가 없어 부득이 은행자산이 인수한 담보물을 말한다.
재기불능 또는 타 업종 전환이 불가능한 38개 기업과 법적절차 중인 108개 기업의 연체대출금과 유입자산 25건, 담보처분하고 남게 된 미수이자, 특수채권이라고 하는 것, 총 83억 환을 인수하였다. 성업공사는 1966년까지 5년간 부지런히 처분하여 연체 대출금은 85%를 받아냈고. 쓸만한 유입물건은 모두 팔아 치웠다. 다른 일거리가 없으면 문을 닫을 판이다.
1966년에 ‘금융기관연체대출금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산업은행으로부터는 악성연체대출금과 유입물건을 인수해 오고, 기타 금융기관의 연체대출금도 회수위임을 받아 법원에 법적절차처리 업무를 맡았다.
그리고 1970년에는 모든 금융기관과 협약을 체결하여 유입물건을 매각 위임받아 처리해 주었다. 1976년에는 특수채권을 받아주는 업무를 자청해서 맡았다. 특수채권이란 은행이 담보물건을 처리하고 발생한 잔존채권과 결손 처분한 이자채권을 말한다. 은행에선 이미 떼인 돈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받아 내기만 하면 수수료율이 높았다.
1978년에는 은행뿐만 아니라 보험회사와 종합금융회사 등 제2금융권의 부실채권 받아 주는 일을 맡았고, 1980년에는 부정축재자의 국가환수재산도 재무부로부터 위촉을 받아 처분해 주었다. 그야말로 부실채권정리에는 국내 유일한 전문기관이었다.
5공과 6공을 거치면서 일거리가 줄어들어 그 동안 적립한 돈으로 연명을 하게 되었다. 자구책으로 1997년 1월 성업공사는 기능활성화를 위한 설립조직법 정비입법방안을 재경원에 제출했다. 성업공사로서는 활로개척을 한 것인데, IMF 환란과는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어쨌든 1997년 11월 23일에는 성업공사법과 시행령이 공포 시행되었고, 기금규모도 10조 원으로 늘었다.
1997년 이후 기아, 삼미 등 대기업의 연쇄부도 등으로 부실채권이 급증함에 따라 금융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가능한 한 처리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정부는 이미 1997년 8월 25일 ‘금융시장 안정 및 대외신인도 제고대책’에서 문제가 심각한 제일은행에 대한 우선 지원방침을 발표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24일 새로운 신 성업공사 출범식에 참석한 재경원 강경식 부총리는 제일·서울은행 부실채권의 우선 매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성업공사도 이들 은행들의 긴박한 상황을 고려할 때 부실채권의 매입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이들 은행의 부실채권을 매입하였다.
성업공사는 1997년 11월 24일 부실채권정리기금이 설치된 이후 최초로 제일·서울은행으로부터 총 4조3,943억 원의 부실채권을 2조9,103억 원에 매입하였다. 매입대금은 기금채권으로 70%를 지급하고, 나머지 30%는 현금으로 지급하였다. 이에 앞서 한국은행은 9월 8일 제일은행에 대하여 1년간 1조 원 규모의 한은특별대출을 실시하여 부족한 유동성을 지원하였다. 제일은행의 계속되는 예금이탈로 발생한 자금부족현상을 해소하기 위하여 취해진 조치였다.
이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경기침체로 인해 제일·서울은행의 부실채권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으며 특히 국제기준에 의하여 부실채권규모를 재산정할 경우 문제는 훨씬 심각할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으므로 제일·서울은행의 자금부족상황은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찾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1997년 11월 정부가 IMF의 자금지원을 받기로 결정하고 자금지원조건에 대한 IMF와의 협의를 하는 과정에서, 부실문제가 심각한 제일·서울은행의 처리문제가 제기되었다는 내용이 시중에 알려지면서 두 은행의 예금이탈현상이 가속화되었다.
IMF와 자금지원에 합의한 12월 2일 이후 1주일간 제일은행은 1조405억 원, 서울은행은 9,580억 원의 예금이 빠져나갔다. IMF요구에 따라 정리대상으로 지목된 은행은 부실정도가 심한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이었다.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을 퇴출시키는 방안, 소매금융부문만 떼서 우량은행에 인수시키고 도매금융부문은 베드뱅크를 설립하는 방안, 정부가 공적자금을 신속히 지원하여 처리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에 현물출자로 BIS자기자본비율 8%를 유지하는 선에서 이들 은행의 퇴출을 막아보려고 했다. 공적자금백서에서는 정부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한다.
“정부는 두 은행의 예금인출사태를 방치할 경우 은행의 도산 가능성이 현실화될 뿐만 아니라 다른 시중은행에까지 예금인출사태가 확산되어 금융시장 전체가 마비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본격적인 금융구조조정을 추진하기에 앞서 먼저 두 은행의 예금인출사태를 진정시키고 금융시장의 안정을 회복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두 은행의재 개선하여 신뢰도를 회복하고 정상적인 영업이 가능해지도록 자본 확충을 추진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정부출자방안을 마련하게 되었다.”
정부는 ‘국유재산의 현물출자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12월 9일 두 은행에 대한 정부출자방침을 결정하였다. IMF측 정부지원은 국제적으로 인정된 방법에 따라 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부담을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함에 따라 정부는 구체적인 출자방안을 마련하고 1998년 1월 3일 정부의 현물출자와 감자를 동시 추진하되 정부출자 후 이 지분을 국내외 투자자에게 투명하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공개 매각한다는 처리방침을 발표 하였다.
1998년 1월 15일 금통운위 명령에 따라 제일·서울은행은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되었고, 정부와 예보공사는 두 은행이 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8% 이상으로 충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출자를 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리고 금통운위 명령에 의하여 제일·서울은행은 각기 발행주식을 8.2:1로 병합하여 현재의 납입자본금 8,200억 원을 은행법상 최저자본금인 1,000억 원 수준으로 감자하였다.
정부와 예보공사는 각각 1조5,000억 원씩 총 3조 원의 재원을 마련하여 두 은행에 각각 1조5,000억 원씩 출자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두 은행의 자본금은 각각 1조6,000억 원, 주주는 정부 46.9%, 예보공사 46.9%, 일반주주 6.2%의 정부출자은행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출자재원은 예보공사가 예금보험기금채권을 발행하고 이를 한국은행이 전액 인수하여 현근재원을 마련하였고, 정부는 국유재산관리특별회계가 보유하고 있던 한전주와 담배인삼공사 주식(평가액 1조5,000억 원)을 현물로 출자하였다. 이리하여 종로네거리 전신신연쇄가 자리에 우뚝선 제일은행건물에는 정부출자확정이라는 대형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1998년 6월 29일. 금감위 민간인 12인으로 구성된 은행경영정상화평가위원회 평가를 바탕으로 대동, 동남, 경기, 충청 등 5개 은행에 대한 퇴출을 발표하였다. 금감위의 계약이전 결정에 따라 5개 정리은행의 자산과 부채 등은 5개 우량은행(국민, 주택, 신한, 하나, 한미)으로 이전하는 절차를 밟게 되었다.
김재천(金在千)위원은 재경위에서 문제점을 적시한다.
“첫 번째, 금감위 은행퇴출은 시장원리에 반하는 위헌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은행의 퇴출은 시장원리에 의해 자유스럽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정상적인 영업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은행 스스로 시장에서 물러날 수도 있도록 해야 합니다.
두 번째, 금감위의 5개 은행에 대한 퇴출판정은 월권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즉, 금번 은행퇴출의 경우 최종적으로 재경부장관의 인가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금감위에서 최종적인 판정을 내렸습니다.
세 번째, 금번 5개 은행의 퇴출은 치밀한 사전 준비없이 이루어진 졸속행정의 표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영평가위는 부실은행의 경영정상화계획 평가 및 조치사항을 금감위에 보고하였고, 금감위는 불과 이틀 후에 퇴출을 발표하였습니다.
네 번째, 고용승계문제에 대한 고려없이 퇴출이 결정되어 혼란을 가중시켰다고 봅니다. P&A방식은 M&A방식과 달리 고용을 승계할 의무가 없습니다. 다섯 번째, 퇴출은행 선정과정의 공정성 문제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정부는 은행퇴출 판정을 채무가 재산을 초과하는 은행에 한하고 있어 경영평가위원회가 정상적인 영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평화은행을 퇴출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또한 강원은행과 충북은행은 경영평가위원회가 평가한 결과, 강원은행은 BIS비율이 가장 낮고 충북은행의 경우도 퇴출대상인 충청, 동남, 동화은행보다 낮습니다.
정부가 제출한 금융산업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금감위가 지난 6월 29일 단행한 5개 은행의 퇴출과정을 사후에 합리화하기 위한 조치로 생각됩니다.”
1998년 9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공적자금 20조 원에 대한 보증동의안이 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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