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호에 이어서>
수서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던 장병조(張炳朝) 씨는 88서울올림픽을 치르며 알게 됐다. 자신이 1983년부터 대한하키협회장으로 있으면서 86아시안게임에서 남녀하키가 우승하고 88서울올림픽에서 여자하키 준우승의 실적을 올리자 자연스레 체육계 인사들과 관계를 맺었다. 특히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결성된 ‘올림픽 마피아’를 통해 장병조 비서관과 깊은 인연을 맺었고 장씨는 이후 수서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러나 장씨는 결코 정씨를 원망하지 않는다. 당시 수사과정에서 그가 입을 열어 자신이 구속됐다고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장씨는 150억원을 받은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의 보호막이었을 뿐이다. 장씨는 현재 서울 강남에서 정씨의 주선으로 마련된 철강대리점을 경영하고 있다.
그의 사람 관리는 철저하면서도 독특하다. ‘문제가 생겨서 로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평소에 돈독한 교분을 쌓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로비가 아니라 부탁하는 것’이란 로비관이다. 그래서 전직 장관 등을 비롯해 전·현직 관료들의 ‘뒤’를 꾸준히 봐준다는 것이다.
그는 제대로 하면 약속한 이상을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시쳇말로 ‘국물도 없는’ 성격이다. 주택건설사업에 매진하던 1977년 무렵 한번은 정씨가 근로자들의 태만을 이유로 노임을 제때 지불하지 않았다. 그러자 근로자들이 몽둥이를 들고 정씨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눈 하나 깜짝 않고 ‘당신들이 무엇을 잘했다고 큰소리냐? 일만 잘한다면 지금이라도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호통을 했다.
이같은 사람관리는 정년퇴직 후에도 1억원의 연봉을 종신토록 지급하는 평생사원제를 도입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자물통 같은 입도 넓은 의미의 사람관리방식. 1991년 수서사건에 연루돼 여야 의원 5명과 건설부 고위관리가 구속되는 등 파동을 일으키고도 재기한 것은 바로 자물통 입 덕분으로 해석되고 있다.
철저한 비밀관리가 인정돼 여전히 로비행각이 가능했고, 이번 거액대출을 받아내 철강보국의 꿈을 이루려다 좌절된 ‘한보게이트’로 비화된 것이란 분석이다. 실제 그는 검찰수사에서도 확실한 증거를 들이대야만 인정할 뿐 먼저 진술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푼 만큼 돌아오고,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게 그의 경영철학인 점으로 미뤄 짐작이 가는 얘기다.
금융기관들은 한보그룹에 큰 액수를 어떻게 대출해줬는가
3공에서 시작해 5공과 6공을 거쳐 문민정부에서도 뚝심을 앞세워 덩치를 키우다 다시 좌초의 위기를 맞고 있다. 1993년 한보정보통신, 승보철강, 승보엔지니어링, 한보관광을 설립했고, 상아제약을 인수했다. 1994년엔 삼화신용금고, 영동전문대를 사들였고 1995년에는 한맥유니온을 세우고 유원건설을 인수하는 등 가지를 계속 뻗어 나갔다.
한보그룹은 1996년 당시 외형상으로 재계 매출 랭킹 14위에 올랐다. 22개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1996년에 5조 4000억원의 매출을 올렸으며, 1997년에는 7조 1000억원의 매출목표를 세웠다.
재계 관계자들은 정 총회장이 도대체 무슨 재주로 무려 5조원의 은행 빚을 끌어썼고, 금융기관은 무엇을 믿고 밑빠진 독에 물 붓듯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대출을 해줬는지 궁금해하고 있다.
당초 2조 7000억원 정도로 예상했던 당진제철소 공사비가 2배가 넘는 5조 7000억원 규모로 불어났는데도 은행들은 계속 돈을 대주다가 은행관리, 위탁경영, 제3자인수 등을 검토하는 등 부산을 떨었는데,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 국회 속기록을 열람해 본다.
한보그룹이 철강산업에 진출한 이유
1997년 2월 국회에서는 한보사건국정조사활동에 들어갔다. 국회 속기록을 중심으로 한보사건을 재구성해 본다. 정태수 총회장이 철강산업에 손을 댄 것은 1984년 부산금호철강 공장을 인수하면서부터다. 애초 철강사업을 생각한 게 아니라 공장 부지에 아파트 지으려던 것이었다고 한다.
금호철강은 계속된 불황으로 인해 연산 60만t 규모의 철근공장에, 재고 60만t이나 쌓아 놓고 있을 정도로 심각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1985년 이후 엔고와 함께 일본 철강산업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중국 수출길이 트이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공장인수 2개월 만에 재고를 모두 다 처분했다. 그래서 1986년 말에는 5천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하는 등 그룹 내 주력회사로 자리잡아 나갔다.
금호철강 인수로 뜻밖에 재미를 본 정태수 총회장은 본격적으로 철강산업에 몰두했다. 부산공장을 연산 100만t으로 증설하였다. 그러나 곧 생산한계에 다다르자, 1986년 3월에는 부산공장 이전을 위한 입지 선정위원회를 구성해 약 1년 동안 남해안, 서해안 등지를 둘러본 후 1988년 8월에 당진땅을 공장부지로 선정했다.
당시 공장부지는 아산만 종합개발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지역만을 제외시켜 제철소 부지로 만들어 주었다는 풍문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는다.
한보그룹은 1988년 9월 공유수면 매립계획 변경을 건설부에 요구했고, 건설부는 77만평의 매립을 허가한다는 변경안을 마련하고 모든 절차를 중단 없이 진행시켜 1989년 6월에 확정 고시했다.
한보그룹은 1990년 12월 29일 당진공장에서 철강단지 매립 및 공장건설 기공식을 가졌다. 1조 2000억원이 소요되는 대규모 공사였는데, 1992년까지 1단계 매립공사가 끝나면 1993년에 부산공장을 이전하고 중후판 및 냉연공장 등을 신설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업계 일각에서는 한보의 철강단지 건설계획에 대해 별로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1조원이 넘는 막대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1991년 수서사건도 당진제철소 건설자금 조달을 위해 무리하게 추진하다 불거진 비리라는 견해도 있다. 당시 수서지구는 공영개발키로 했던 자연녹지였는데, 한보가 사전 매입한 땅을 서울시로부터 주택조합택지로 공급결정을 받아 조합원 아파트를 건설해 주고 약 1000억원 정도를 챙기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한보가 당진제철소 프로젝트를 당초 구상한 대로 추진했다면 그런대로 꾸려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94년 5월 이 프로젝트는 1개월 동안 검토한 끝에 열연강판 연산 500만t, 냉연강판 200만t, 철근 100만t 규모로 대폭 확대하였다. 당초 계획은 열연강판 100만t, 철근 100만t이었다. 이에 따라 사업비도 대폭 늘어났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그런 무모한 결정을 내렸을까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1997년 3월 10일 국회 한보사건국정조사특별위원회 나온 한승수 경제기획원장관의 답변을 통하여 알아보자.
“한보철강에 최초로 자금이 지원되던 1990년대 초에는 200만호 주택건설 등에 따른 건설경기 호황으로 철강수요가 급증하고 철강산업의 장래가 유망하게 평가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한보의 철강산업 진출은 국가 경제적 차원에서 바람직하다고 평가하였고 은행들도 과거 포항제철의 경험 등에 의거하여 철강산업이 국가기간산업으로 유망한 업종이라고 판단하였으며 외환수수료 수입도 있어서 산업은행, 서울은행의 외화대출 취급을 시작으로 자금지원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1990년 11월 당시 1조 2000억원 수준이던 투자예상액은 생산시설과 규모의 확충 설계변경 등으로 9차례에 걸쳐 변동되어 1996년 말에는 5조 7000여억원으로 크게 늘어났으며 특히 1994년과 1995년에 걸쳐 300만t 규모 코렉스설비 증설을 위해 4개 공장의 건설을 동시에 착공함에 따라 1994년 1월에 1조6000여억원이던 투자비가 1994년 9월에 3조 7000여억원으로 불과 9개월 사이에 2조원 이상의 투자비가 증가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보 측은 소요자금을 개별공장별로 여러 금융기관에 요청하였고 각 금융기관은 전체 사업계획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공장별로 자금을 지원하다 보니 한보철강의 총여신규모가 크게 증가했던 것입니다.”
한보철강의 연산 200만t 박슬래브 캐스팅 법에 의한 열연공장을 먼저 1단계로 추진한 것이 결정적 실패 원인이었다고 한다.
1995년 10월 가동을 시작한 박슬래브 열연공장은 단가를 맞추지 못해 큰 짐이 되었다. 판매가보다 제조원가가 t당 13만원이나 더 소요돼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 공장이 연산 200만t 규모임을 감안하면 열연공장에서만 매년 26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한다는 계산이었다.
박슬래브 공법은 미국 뉴코어사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공법으로, 고철을 이용하여 전기로에서 판재류를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종래에는 전기로에서는 철근이나 봉강, 형강 등 저급 철강재만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원료인 고철가가 비싼 데다 열연강판값은 세계 최저 수준이어서 박슬래브 공법이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았다.
이와 관련, 한 때 한보철강이 건설하는 코레스 공장의 성공여부에 논란이 많았다. 박태준 전 포철회장이 대량생산 체제에 적합하지 않은 데다 기술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코레스 설비를 정부가 허가해준 것은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고 발언함으로써 한보철강의 코레스 설비도입 배경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보철강이 도입한 코레스 설비는 연산 75만t급 2기. 한보철강 코레스 설비도입에 앞서 1995년 말 연산 60만t급공장을 완공한 바 있는 포철 코레스 공장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97년 2월 26일 제183회 국회 제8차 본회의에서 질의답변 요지
정우택(鄭宇澤) 의원: 기술공법 결정문제는 과장전결이라서 박재윤(朴在潤) 전 장관은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막대한 비용이 드는 기간산업의 기술채택문제를 검토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철강업계는 한보철강이 완공 후에도 채산성이 없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완공 후 흑자실현이 안 되면 결코 경영정상화라고 볼 수 없습니다.
김충조(金忠兆) 의원: 철강산업의 많은 노하우를 갖고 있는 포철에서도 연구 시험수준에 머물러 있던 코렉스설비를 기초연구직도 없는 한보가 그것도 연산 150만t 규모로 도입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혹입니다. 또한 1991년부터 코렉스공법이 조세면제대상 고도기술 및 당해제품에 포함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이는 제철기술에 국한되는 것이지 상용설비는 아닌 것입니다. 정부의 고시내용에도 명백히 용융환원제철기술로 명기되어 있으며 설비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통산부도 연구과제로서의 기술이지 상용기술로 인정한 것은 명백히 아닌 것입니다.
또한 한보에 앞서 1992년 12월 오스트리아 훼스트알피네(Voest Alpine)사와 기술도입계약을 맺은 포철도 당시 세 차례의 임원토론회와 기술토론회에서 이에 대한 심각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또 기술 자체의 논란보다는 연구설비성격으로 60만t의 규모가 너무 큰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994년 10월 포철은 포스코비전 2001에서 연산 300만t 규모의 코렉스와 DRI설비를 건설하겠다고 계획을 세웠다가 1995년 6월 고로방식으로 계획을 변경하였습니다. 지금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코렉스설비의 경제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통상산업부 안광(安光) 장관 답변이다.
“코렉스 기술도입에 관해 말씀드리면 코렉스공법은 1987년 훼스테 알피네사가 건설한 남아공 이스코사의 코렉스 설비가 정상가동 중이고 포항제철이 1995년 11월 준공한 코렉스설비도 가동초기에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었던 것이 사실입니다마는 현재는 94% 수준으로 정상가동 중에 있고 뿐만 아니라 인도와 남아공에서 코렉스공장의 추가건설계획도 추진하고 있는 등 세계적으로도 코렉스기술의 상용성을 인정받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외자도입법령에 따라 한보철강이 훼스테 알피네사로부터 도입한 기술도입신고서를 접수 검토한 바 이미......”
통상부장관은 코렉스공법에 대해서 질문 때마다 앵무새처럼 똑같은 설명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정태수 총회장은 6공화국 때부터 공들인 것도 있고, 밀착관계로 든든한 배경이 있을 때 승부를 내자는 생각에서 무리하게 추진했다. 그리고 한보철강이 시키는 대로 정부는 맹목적으로 따라간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무모한 사업확장이 결국은 정태수 씨 자신을 옭아매는 덫이 돼버렸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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