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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한국경제 비화 ⑫]이상한 한국은행 독립 1950~1998년

흥업은행 인수과정도 의혹의 베일에 싸여 있다.


설경동, 윤석준, 정재호 등 내로라하는 재계실력자들을 포함한 18명이 몰린 입찰에서 이병철(李秉哲)씨는 3위로 응찰했으나 최고 입찰자를 제치고 낙찰돼 36만3,500주를 매수하여 지분 83%로 지배권을 완전 장악했다.


그가 써낸 가격은 주당 2,866환으로 1위인 주당 4,400환, 2위인 3,300환 보다 후순위여서 당연히 최고입찰자에게 낙찰돼야 마땅했던 것이다. 다만 1, 2위 응찰자의 주수가 50주, 100주에 불과한 것이 빌미가 됐다.


“1위와 2위 응찰자는 다른 응찰자에 대한 짓궂은 행동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주(株)가 분산되면 금융시장의 정비를 기할 수 없으므로 묶어서 불하하려는 것이 정부의 의도인 것 같았다. 입찰가격 제2위인 주당 3,300환으로 사주기 바란다는 정부의 요청이 있어 낙찰에서 빠진 잔여 주까지 합해서 그 가격으로 사들이게 되었다. 총액 11억9,000만환 상당의 규모였다” 이병철(李秉哲)씨의 주장이었다.


또, “은행주 대량 매각방침에 따라 실력 있는 기업인이 불하를 받아야 한다”는 게 당시 정부의 변이다.
“대주주입장을 이용하여 임의로 금융기관을 운영하고자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시중은행주를 매수한 것은 이 나라 금융의 근대화를 기필코 실현하자는 일념에서였다”


훗날 이병철씨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최고 권력자와 최고 재벌과의 인연


흥업은행주 불하 후 또 다른 화제가 있다면 인태식 재무장관이 동행소유 상호주인 조흥은행주 1만6,431주를 윤석준씨에게 수의계약으로 매각하라고 종용했던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저축은행 최고입찰자 윤석준씨를 조흥은행으로 돌리고 저축은행은 정재호씨에게 맡기려는 공작의 일환이다.


그러나 이병철씨는 이를 거부했다. 상호주는 귀속재산이 아니며, 은행소유로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성질이라는 이유다. 이에 따라 한때 그와 재무당국과는 난기류가 흘렀다.


산업은행법을 개정하여 한국은행 재할을 허용하려는 기도에 시중은행이 앞장을 서 반대운동을 벌인 것도 이병철씨의 흥업은행이었다.


어쨌든 삼성의 은행주 절반장악은 화려한 정상가도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같은 눈부신 성공과 석연찮은 은행주 매점매석에는 자체만의 힘과 능력에 의한 것이었던가.


이병철씨와 이승만 대통령의 인연은 1946년 대구에서 시작


이병철씨는 당시의 친자유당 재벌 중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정치재벌이고, 훗날 부정축재자 중에서도 제1호 거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배경은 정계실력자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이기붕씨도 아니었다. 절대권력 그 자체였던 경무대였다. 그러기에 재무장관의 말씀은 간단히 무시해버릴 수 있었을 게다.


이병철씨과 이승만 대통령의 인연은 1946년 가을 대구에서 시작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구폭동 진압 후 대구를 방문했다. 대구 유력자들이 조경규(趙瓊奎)씨를 중심으로 황급히 환영위원회를 구성하고, 왜관까지 30여명이 영접을 나간 자리였다.


이병철씨가 부친이름을 들어 자기소개를 하자 이 대통령의 반응이 달라졌다.


양조업을 한다는 이병철씨의 말에 이 대통령은 “서양 술은 오래될수록 좋다는데 우리 것은 그렇지 못하다. 만일 서양에 술을 수출하려한다면 우선 장기간 보존할 수 있는 고유의 좋은 술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라고 격려했다.


또 서울에 오면 꼭 들르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이듬해 이병철씨는 상경 길에 이화장(梨花莊)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갔다.


연락도 없어 불쑥 나타난 이병철씨를 이 대통령은 흔쾌히 맞아주고, 당시 좌우합작 남북협상론(左右合作南北協商論)을 비판하면서 남한만의 단정론을 설파했다.


이병철씨는 “이 박사의 모습은 마치 큰 불덩이를 솜으로 싼 것 같았다”며 사업보국의 신념을 더욱 굳혔다는 것이다.


최고 권력자와 최고 재벌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이처럼 당시 은행을 불하 받았던 이병철씨, 정재호씨는 모두 세간의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고 그것은 권력핵심과의 튼튼한 줄 덕분이었다.


떨어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방직 설경동씨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방직의 강일매씨도 경무대 이 대통령과 연분이 깊은 정치재벌이었다. 치열한 막후 파워게임이 벌어졌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윤석준씨도 만만치 않았다. 재무장관 김현철씨와 밀착돼 있었다. 그러나 막상 입찰단계에서는 인태식 장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김장관은 롤빽해서 그를 도와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더욱이 권력 상층권의 힘은 주무장관인 그로서도 당해낼 리 만무였다. 결국 윤석준씨는 저축은행을 눈뜨고 빼앗기고 마지못해 차선으로 선택한 조흥은행에서도 밀려나는 쓴잔을 마셔야 했다.


인태식 당시 재무장관의 회고록에는 이렇게 기술돼 있다. “입찰과정에서 최고가로 입찰한 사람을 제쳐두고 다른 사람에게 낙찰시켰다해서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조흥은행의 민씨는 조선맥주 하나만으로도 경영에 힘겨운 상황이었고, 저축은행의 윤씨는 조선제분이라는 귀속재산을 안고 있는 처지여서 한 개인이 두 개 이상의 귀속재산을 가질 수 없다는 당시의 법규정에 사실상 위배되어 있었다.”


변명임은 이미 밝혀졌다. 정치배경을 엎고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과정에서 검은 정치자금이 얼마나 흘러 들어갔을까.


이병철씨는 은행주 불하과정에서 흥업은행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조흥은행 지분 55%, 흥업은행 신탁부의 상호주를 매개로 상업은행 지분 33%까지 합해 4대 시중은행 주식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돈줄 그 자체이자 경제의 혈맥인 금융기관을 지배하게 된 것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었다.


해방 후 우리나라 은행의 소유 구조


이병철씨가 어떻게 전 은행을 지배할 수 있었는가. 당시 우리나라 은행의 소유구조를 알아보자.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국토의 분단으로 말미암아 불가항력으로 이북에 소재하고 있던 각 은행의 지점과 자산은 소련군정하에서 새로이 설립된 북조선중앙은행에 통합되었다.


당시 남한에는 일본계 금융기관인 조선은행, 식산은행, 저축은행, 신탁회사, 무진회사, 금융조합연합회 등과 민족계은행인 조흥은행, 상업은행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금융기관은 일본기업체에 대한 대출금의 회수불능, 무수익 자산이 된 일인의 회사채 및 주식보유로 거의 은행간판만 남았었다.


1946년 미군정청은 특수은행인 저축은행을 일반은행화하였고, 신탁회사를 신탁은행으로 무진회사를 상호은행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47년에는 222개의 은행지점 중 30%와 401개의 금융조합 중 60%를 적자경영을 이유로 폐쇄하였다.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각 은행 주식은 모두 미군정이 환수하여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국고로 귀속되었다. 이것이 소위 귀속주(歸屬株)이다.


여기서 은행끼리 서로 지분을 소유한 상호주(相互株)는 신탁은행 64.4%, 저축은행 56.5%, 조흥은행 41.0%, 상업은행 35.4%, 상호은행 24.8%, 조선은행 20.3%, 식산은행 14.1%이었고 특히 환금은행은 자본금 전액이 상호주였다.


이 같은 실정이었으므로 일제하의 한국인 지분을 이어받은 민간소유주는 조흥은행 53.7%, 상업은행 35.6% 등을 제외하고는 모든 은행이 10%도 못되었다.


귀속주를 매입하면 상호주가 덤으로 붙게된다. 더욱이 이병철씨에게 불하된 흥업은행은 신탁전문은행이었다.
그러나 시중은행 중 정치권에 가장 가까웠던 것은 정치재벌 정재호(鄭載護)씨가 지배하는 제일은행이었다.


재벌사유 은행의 몰락


이기호(李起虎), 1960년 당시 제일은행장. 이기붕씨의 6촌동생이기도 했다. 그는 온갖 부정으로 선거자금 50억환을 긁어모아 한희석의 ‘韓’ 박용익의 ‘容’, 자신 이기호의 ‘虎’자를 따서 한용호란 가명으로 제일은행에 입금시키고, 선거자금을 조달했다. 그래서 1961년 2월 11일 시중은행장으로서 유일하게 구속됐다. 이기호는 검찰에서 내무부 최병환(崔炳煥) 국장이 제일은행 예금 2억3,000만환을 선거자금으로 각도(各道)에 배정하여 지출한 것을 시인했다.


“박용익이 전화로 선거자금을 내주도록 연락해 왔다. 그 이유는 도금고를 제일은행이 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기호씨의 주장이었다.


제일은행은 4월 혁명이 터지자 친자유당계 은행으로 부정에 대한 추궁을 면하기 어려우리라는 예금주의 불안으로 소위 ‘뱅크럽시(bankruptcy)’현상을 빚었다. 불과 12일 사이 35억환의 예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것이다. 4월혁명의 폭발은 삼호의 성장배경이던 이기붕씨의 권력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렸다. 또한 5·16쿠데타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그는 결정적 철퇴를 맞았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에게 그토록 집착을 보였던 은행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3억6,000만원의 벌금을 내놓았다. 짧지만 영어(囹圄)의 신세가 되기도 했다.


일련의 정치적 격변이 정재호씨에게 안겨준 진정한 치명타는 특유의 사업가로서의 안목과 민첩한 판단력, 두뇌회전, 불굴의 집념과 의욕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군사정권이 경제건설을 위해 과거의 부정축재자들과 손잡고 외국차관을 끌어다 기간산업건설을 추진할 때, 이병철(李秉哲)씨를 비롯한 다수 자유당계 재벌이 재빨리 변신의 기회를 잡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시대에 뒤떨어진 방직업에 연연하여 기간산업의 열차를 놓쳐버렸고 1964년의 환율폭등과 면방업 불황을 이기지 못해 1963년 산업은행의 자금관리에 까지 이르렀다.


더욱이 새로운 권력인 군사정권에 줄을 찾지 못하고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권력과 유착으로 성장한 재벌이 줄서기에 실패하면 벼랑 끝만이 기다릴 뿐이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삼호에 대한 당국의 배려는 거의 전무에 가까웠다. 일세를 풍미한 대재벌의 흔적은 1970년대 초 이미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은행의 민영화는 잠시, 1961년 10월 25일 시중은행 최대주주의 주식은 또다시 정부에 귀속되었다. 새천년이 되어도 종식되지 아니하고 지속되는 관영은행의 출발이자 관치금융의 본격적 시발점인 것이다. 시중은행이 정부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 것은 부정축재처리과정의 부산물이었다.


쿠테타 정부의 시중은행 주식 환수


4년 전 은행의 귀속주를 매수한 이병철, 정재호, 이한원, 이정림 등이 거의 그 독점적 지배력을 강화하여 5개 시중은행이 이들 재벌의 사금고화 됨으로써 정부의 금융정책상의 문제는 물론 국민으로부터 크게 논란이 되었던 것이며 금융의 민주화 내지는 기회균점을 요망하는 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6월 14일 제정된 부정축재처리법은 부정 이득자와 부정 공무원에 대한 부정축재분의 환수조치를 규정하였으며, 시중은행 주식은 최우선 회수대상이었다.


먼저 1961년 6월 20일 ‘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을 공포, 일반은행 대주주의 의결권을 묶고 은행주식에 대한 양도를 금지했다.


이어 10월 하순에는 부정축재환수절차법을 통해 대주주의 주식을 국고로 환수되었다.


이 환수조치 이전과 이후의 은행주식 소유비율 분포를 비교해 보자.


정재호씨가 갖고 있던 제일은행은 1961년 3월말 현재 정재호씨 개인소유 지분율이 52.3%이고 정부 31.5% 법인단체가 15.1%이었다.


그런데 1년 뒤에는 정부가 67.9%로 압도적 일인 대주주로 등장했고 개인 19.5%, 법인단체 12.5%로 바뀌었다.


이병철씨 소유의 한일은행은 1959년 9월말에는 이병철씨의 지분이 43.9%에 달하고 정부소유주는 39.5%이었으나 1962년 9월에는 순수정부주 33.5%에 조선은행 청산인 6.5% 식산은행청산인 4.9% 등 정부소유지분이 64%에 달하였다.


이정림씨의 서울은행은 창립당시 정부주식은 전혀 없었고 개인지분이 91.9%에 달하였으나 이 조치로 총 주식 20만주의 39.7%가 국고로 귀속됐다. 한편 조흥은행의 정부귀속주는 총 주식 30만주 중 46.7%이었다.


이 같은 초헌법적 정책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현재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부정축재자의 엄중 조치와 부정 이득의 환수라는 명분 하에 특권재벌의 대표적 전리품으로 손꼽히던 시중은행 주식을 다시 환수한다는 데야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더욱이 쿠데타정부는 이를 일단 국고에 환수한 다음 적당한 시기에 민간 불하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있었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소요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전액 공매 내지 재불하한다는 발표를 의심하는 측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지켜졌던가.


정부의 주주권 행사에 의하여 인사와 경영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관치금융이라는 테두리에서 금융산업의 낙후를 면치 못했다.


[프로필] 이국영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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