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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무차별 공매매로 30억환 ‘구멍’ 금융통화위원회 개최

 

그런데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겨우 열흘도 못돼 거래소는 다시 30억환의 증권금융을 요청하게 되었다. 월말은 닥쳐오는데 수도결제자금이 없어 다시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4월 27일 거래소가 재무부에 띄운 공문은 이렇다.

“지난 번의 청산자금 및 보통거래 대행결제자금으로 20억환을 한도외로 배정해 주신데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지난 4월 20일 주주총회에서 40억환 증자결의에 의하여 35억환은 구주주에게 할당하고 잔여 5억환은 프리미엄부로 일반 공모하게 되어 최소한 50억환이 증자될 것이 예상되는바, 20억환 배정으로 자금이 다소 완화는 되었사오나 앞으로 수도결제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는 30억환 정도의 자금이 필요되옵기, 죄송하오나 당소 사정 고찰하시와 30억환을 추가로 한도외 배정해 주심을 앙원하나이다.

 

상환은 5월 상순경 20억환, 5월 하순경 30억환을 상환예정이옵기 첨신하나이다.” 무차별 공매매로 4월말 결제자금으로 필요한 금액은 114억환에 달했다.

 

그러나 증권금융 등 은행대출금을 포함하여 증권거래소 자금을 몽땅 긁어봐야 39억환, 증거금으로 받은 돈이 36억환, 각 증권사가 준비해야 할 돈이 9억환 등 총 84억환이 증권계에서 조달할 수 있는 총액이었다. 그래서 30억환이 구멍난 것이다.

 

재무부의 요구로 4월 28일 이 문제를 논의할 금융통화위원회가 열렸다.

한은 집행부와 금통위원들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은 자금담당 부총재 문상철 씨가 안건설명에 나섰다. 그는 내용설명에 덧붙여 한은 측이 보는 증권금융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첫째, 30억환을 또 금융에서 대주어야 혼란을 막을 수 있는 것인가. 꼭 금융기관이 이것을 해야 할 것인가.

 

둘째, 지금 증권계가 과열상태인데 여기에 금융이 지원을 해줌으로써 과열을 뒷받침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셋째, 꼭 한도외로 취급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이미 금통위는 시중은행에 50억환의 실링을 추가해준바 있으므로 또다시 이 방법으로 은행이 지원해 줄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그런데 시중은행으로서는 한도를 쓴다면 은행책임 하에 대출한다는 얘긴데, 제날짜에 상환하기를 기대하기 힘든 증권금융을 자기 책임으로 내줄 수 없으니 한도외로 지정해 주면 정책자금이 되므로 무리해서라도 지원해 주겠다는 입장이었다.

 

“지금 상태로 가다가는 5월말에도 결제자금이 모자랄 게 뻔하다. 그렇다면 돈을 갚기는커녕 또 꿔달라고 손을 내밀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책임으로 증권금융을 해달라는 것이냐”는 것이다.

 

한은으로서도 한도외 증권금융 30억환은 무리한 요구였다. 그렇다고 거부하자니 ‘한은 때문에 증권시장이 깨졌다’는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회의에 참석한 금통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액면 50전짜리가 50환에 거래되고 있으니 100배가 됐는데 이를 유지할 도리가 있느냐”

“고무풍선을 한껏 늘려놓았는데 이를 안전하게 하려면 차차 줄여서 고무풍선이 지탱할 정도로 작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터질 것이다.”

 

“불이 타고 있는데 휘발유를 대주는 격으로 정부에서 뒷받침했다가 만약 수습이 잘되지 않아서 터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식 값을 올려놓은 투기사들은 다 빠져나가고 결국 일반대중만 손해를 볼 것이고 한 번 파탄이 나고 보면 증권시장을 정상화시키는데 수년이 걸릴 것이다.”

 

저마다 증권금융 한도 외 취급의 부당성을 꼬집었다. 유창순 한은 총재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30억환을 내가지고 증권시장이 안정된다고 하면 찬성하겠지만 아무도 안정된다는 확신을 주는 사람이 없으므로, 확신이 설 때까지는 찬동하기 힘듭니다.”

 

회의에 참석한 차관과 이재국장은 증시안정화방안을 갖고 있지 못했다. 결국 재무부장관과 증권거래소 이사장의 출석을 요구, 두사람이 급히 달려왔다. 이들은 참석했지만 회의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강직한 성품의 유창순 총재는 천병규 장관과 설전을 벌였고 복도 밖까지 고성이 오가는 굳은 분위기였다. 결국 천재무가 증권시장 안정화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함으로써 일단락됐다. 회의는 오전 10시 15분에 시작, 오후 2시 30분에 끝났다. 장장 4시간에 걸친 격론이었다.

 

5월 증권파동 그리고 한은 총재 사표 제출

 

금통위 의장석에 앉은 한은 총재.

유 총재는 “대단히 장시간 논의하는 중에 모두 일을 잘 하자니 서로 언성도 높였습니다마는 재무부장관께서 전적으로 책임진다고 했으니까 30억환을 한도외로 취급하는 것을 통과하겠습니다”라고 의사봉을 두들겼다.

 

이렇게 해서 수도결제자금 30억환은 방출됐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 달 후에 또 230억환이 나갔는데도 구멍이 새서 그만 고무풍선이 터져 버린 것이다.

 

바로 5월 증권파동이다. 그리고 6월 1일 또 100억환이 추가로 의결돼야 했다.

한편 이날 언성을 높여가며 격돌했던 천 재무와 유 총재는 감정의 앙금이 쌓이게 됐다. 회의장에서 수모를 당한 재무부는 기필코 금통위와 한은을 장악해야만 한다고 결심을 굳히고, 기왕에 추진 중이던 한은법 개정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당시 금통위원이던 라익진 씨는 이렇게 회고한바 있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재무부의견을 따랐으나 너무나 상식에 어그러진 엄청난 일이 계속되므로 우리는 거의 전원이 이것을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어느 날 천병규 재무부장관이 직접 나와 사회를 하고 계속 자금공급을 요구하였지만 유창순 총재를 비롯하여 모두가 반대를 하니 그도 딱하게 되었다….”

 

재무부와 금통위원은 아마 이 위원회가 생긴 이래 처음 있었던 정면대결을 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재무부는 한은법을 개정하여 금융통화위원회제도를 폐지해 버렸다.

 

그리고 그 대신 얼마 후에 금통위는 둔갑하여 금융통화운영위원회로 되었고 증권자금 공급은 계속할 수 있었으나 그 결과는 증권업계를 아주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참가하였던 수많은 시민은 막대한 피해를 입어 패가망신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아마도 정부 지원 하에 이 같은 사기도박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잠시나마 재무부장관은 옥고를 치러야 했다.

 

물론 1962년 5월 24일의 한국은행법 개정이 증권금융과 관련,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 재무부와 한은의 오랜 줄다리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증권시장문제도 어느 정도 촉매역할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증권금융문제로 정부와 충돌, 입장이 난처해진 유 총재는 이 같은 한은법 개정이 겹치자 이에 반대해 사표를 던졌다.

 

그의 사표는 5월 24일 개정 한은법이 공포된 이틀 후 5월 26일자로 수리됐다. 후임 총재로 임명된 사람은 명문 은행가 출신이자 당시 제일은행장이던 민병도 씨.

 

“1962년 5월이 됐다. 5·16 군사혁명이 있은 지 만1주년이 가까워지면서 사회는 차츰 안정세를 보였고 구태의연하던 정치풍토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듯 했다. 그런데도 금융가의 표정은 어둠침침했다. 이유는 당시 소위 증권파동으로 야기된 막대한 자금융자를 놓고 재무부와 금융계가 팽팽한 대립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어느 구석에서 시작했는지 금융가에서는 유창순 씨가 한은총재직을 물러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은 거기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내가 한은 총재에 임명되리라는 데까지 번졌다. 나는 당황했다. 나도 유 총재와 정부 간의 심각한 의견차이 때문에 그가 머지않아 퇴임할 결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 총재가 물러난다는 소문에는 별반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임에 내가 임명된다는 소문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병도 씨의 회고 내용이다.

이 회고에서는 증권과 동 문제에 관한 한 금융이 간여돼서는 안 된다는 유 총재의 소신에 그도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자신은 총재가 되는 것이 죽어도 싫었고 천 재무를 찾아가 따지기도 했다고.

 

그러나 자신과의 의사와 관계없이 앉아버린 금융인 최고의 영예인 한은 총재 자리, 민 총재가 취임식을 올린 그 순간에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나락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신임 총재로 증권파동의 오물을 뒤집어쓰고도 모자라 끝내 정부와의 갈등으로 전임자와 같이 사표를 던질 운명을 맞게 된다.

 

시중은행 한도외 특별융자 결의로 겨우 급한 불을 끌 정도로 증시는 4월말에 이미 과열될 대로 과열돼 있었다.

 

증권거래소는 은행돈을 억지로 빌려다가 통일 일흥 동명 등 윤응상 계열증권사들의 매수자금을 겨우 메우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 바람에 4월말 수도결제는 이틀이나 연기되어 5월 2일 완결됐다. 이쯤 됐으면 위험경보가 깜박거리고 있음을 누구나 감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증시참여자들은 이미 눈이 멀어있고 귀가 먹었고 반쯤 미쳐있었다. 한번 뜨거워진 쇳덩이는 쉽게 식지 않았다. 증권시장은 벼랑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와 같았다. 파국의 날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거액 자금 미결제 사태

 

1962년 5월이 되자 증권거래소의 증자납입금 180억환의 조달이 증권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하여 여론이 분분했다. 또 프리미엄이 얼마나 될 것인가 궁금해했다.

 

거래소의 대주주인 통일, 일흥, 동명 등 매수 측 증권회사는 일찍부터 대증주의 시세를 올려 보통거래와 청산거래를 이용한 차금이득을 취하는 동시에 매도 측 증권회사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고, 대증주의 일반공모에 있어서도 프리미엄을 높게 책정하려고 시도했다.

 

한편 매도 측 증권회사들은 높은 가격에 매도하여 많은 이익을 얻은 후 투매로써 최대한 주가를 하락시켜 매수 측을 약화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무모한 책동전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5월 22일 대증주의 공모가격이 14환50전으로 결정되자 이 주식의 거래량이 급증했다. 매수 측은 높은 가격에 책정된 공모주가 원활히 소화되도록 하기 위해 더더욱 시가를 끌어올리는 작전을 폈다.

 

반면 매도 측 증권사들은 거래소 증권납입이 끝나면 증권시장의 자금이 고갈돼 주가가 폭락할 것이라고 여론을 조성하면서 투매를 서슴지 않았다. 밀고 당기는 사수전의 결과 5월 23일부터 말일까지의 청산거래 총액중 대증주가 70~80%를 차지할 정도였다.

 

당시 거래소 직원들의 보수는 금융기관 중 최고였다.

1년 1200%의 보너스가 지급됐고 어린이날에 특별보너스를 줄 정도였다. 대학졸업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직장도 은행이 아닌 증권거래소였다고 한다. 이런 증권거래소의 증자는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4월 혁명과 5·16쿠데타의 와중에 실직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퇴직금은 물론 집판돈까지 싸들고 몰려왔다.

 

청약창구 주변여관은 웃돈을 주어야 들어갈 정도였다. 서울에선 이렇게 대증주 공모의 인기가 고율 프리미엄에도 불구하고 매일 값이 오르고 있어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지방에선 공모주 소화가 여의지 못했다. 지방배정분과다와 액면의 28배라는 프리미엄으로 청약마감 결과는 전체 공모물량의 67%를 소화하는데 그쳤다. 당시 지방은 서울과는 여러모로 격차가 심했던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윤응상씨 계열은 실권예상분의 완전소화를 위해 또다시 고주가작전을 전개, 사흘만에 200여억환의 건옥을 세우고 말았다.

 

5월의 거래대금은 4월의 2배가 넘는 2520억환에 달해 거래소 개설이래 6년동안의 총거래대금 2740억환에 육박할 정도였다. 이중 절반이 매수 측 5대 증권사가 기록한 것이었다.

 

무슨 일이건 한계가 있는 법, 윤응상 씨 측 매수사들의 지나친 과욕에서 상대방 매도 측이 약점을 찾아낸 것이었다. 이미 4월말에 수도결제자금이 없어 한 번 부도상태가 되었던 일이 있는 데다 프리미엄부 공모주의 완전소화를 겨냥한 그들의 무리수를 지켜보던 매도 측은 더욱 적극적인 매도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수량이 많은 샘도 무작정 퍼내기만 하는 데야 당할 수 없다. 윤응상의 자금력도 밑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매수 측의 건옥은 날로 늘어났다.

 

매도 측의 23개 증권회사들이 5월 25일부터 총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의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당시 60여개의 증권회사 대부분이 졸지에 매도 측으로 돌아버렸다.

 

윤응상은 상대방의 공세를 누그러뜨려 보고자 막강한 중앙정보부의 힘을 동원, 매도 측의 유력업자를 소환케 하여 심리적 압력을 주기까지 하는 등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매도 측은 윤응상 씨 측의 패배와 시세폭락이 임박했다는 확신을 더욱 굳힐 따름이었다. 무모한 매수전에 끝까지 남은 회사는 통일, 일흥, 동명, 대양의 4개사 뿐이었다. 총공격을 개시한 매도 측은 25일부터 28일까지 사흘간 300억환 어치의 매물을 쏟아내면서 매수 측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다시 29일에는 175억환, 30일에는 66억환, 31일에는 75억환을 계속해서 풀어놓았다.

 

5월 중의 거래액 2520억환중 보통거래와 청산거래액이 2210억환에 달했다. 그 90%를 동명, 통일, 일흥증권의 3개사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거래액이 순조롭게 결제될 리 만무하다. 매도 측이 거두어간 거액의 자금은 행방이 묘연하고, 246억8000만환의 미결제를 발생시켰다.

 

윤응상은 수도결제를 독촉하는 거래소에게 ‘거래소의 계산착오’라고 주장, 한때 증시에는 ‘계산착오’라는 말이 유행되기도 했다. 거래소가 청산거래 수도결제를 대행해야 할 금액이 691억환이고, 여기서 증거금을 뺀 결제자금 필요액은 276억환에 달했다. 이 거액의 미결제 사태는 파국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5월 증권파동이었다.

증권거래소는 276억환의 수도결제자금 중 자기자금과 은행차입금 및 증권금융 잔액을 뺀 나머지 금액인 183억환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또다시 재무부를 통해 180억환의 증권금융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연합증권금융주식회사는 50억환의 증자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증자불입금이 이미 은행에 들어와 있으나 법적 문제로 당장 쓸 수 없으니 50억환의 증권금융을 요청했다.

 

결국 5월말 수도결제자금조로 거래소에 180억환, 연합증권금융에 50억환 등 총 230억환의 증권금융을 재무부가 금융통화위원회에 요청하게 되었다.

 

<다음편에 계속>

 

 

[프로필] 이 국 영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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