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장 지목은 중앙정보부의 몫
은행장의 임기 3년.
그러나 시중은행 정관의 임기는 한낱 장식품에 불과하였다. 대부분의 행장이 임기 전에 사임했다. 그렇다고 모든 행장이 임기를 못 마친 것은 아니다. 2~4개 은행을 돌면서 행장만 10여년 지낸 직업이 은행장인 행운아도 있다.
‘빛 좋은 개살구’라 할 수 있는 행장이 있는가 하면, 제왕 (帝王)처럼 갖은 부귀를 다 누린 행장도 있다. 관치금융의 그림자는 은행장이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5. 16 군사혁명이 발발한 1961년. 일 년 사이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금융의 민주화가 아니라 어떻게 경제건 설에 봉사하느냐가 관건으로 변화하였고, 정부의 직접지배 하에 놓인 은행은 본격적 관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금융인들이 무소불위의 쿠데타 세력에 맞서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군정 초창기에는 살벌한 총칼의 서슬에 밀렸을 뿐만 아니라 혁명에 대한 다소간의 기대감도 작용하여 협력을 선택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한편 정부 손에 넘어간 시중은행들은 어떠했을까. 급작스런 쿠데타로 시중은행 역시 쑥대밭이 됐다. 현역 은행장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사임하고, 임원들도 대부분 퇴진이 불가피했다. 혁명정부 실세들은 우선 ‘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을 만들어, 대주주들의 권리행사를 막아놓고 행장 인선작업에 착수했다. 행장후보 명단은 김종필(金鍾 泌)이 이끄는 중앙정보부의 몫이었다.
당시 서울은행장으로 임명된 이보형(李寶衡)은 기자에게 그 내막을 담담히 밝혔다. 그는 제일은행 상무 출신으로 정재호(鄭載護)가 은행을 인수한 후 별무리가 없었음에도 쫓겨났으나 김현철(金顯哲) 재무장관의 배려로 중앙 무진(中央無盡) 사장으로 물러나 있었다.
마침 동생 이지형 장군이 박정희와 친분이 있어 5. 16 이후 국민운동본부 차장으로 있었는데, 그가 형을 박정희(朴正熙) 부의장에게 소개했다. 그 결과 중앙정보부에서 확정한 은행장 적격자 5명 중 이보형만 유일하게 제일은행 장이라는 박정희의 꼬리표가 붙었다.
은행장 명단 작성은 중앙정보부의 몫이었으나 은행배정은 김유택(金裕澤) 재무장관의 차지였다. 김유택 장관은 후보들을 모아놓고 “은행선택권은 내게 맡겨라. 자기출신 은행에는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민병도(閔丙燾), 문종건(文鍾健), 김세련(金世鍊), 이호상(李豪商), 이보형 등 5명 중 이보형만 김유택 장관과 친분이 없었다. 오후 사장실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이보형은 자신에게 제일 작고 생긴 지도 얼마 되지도 않은 서울은행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한상원(韓相元) 은행감독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른 은행은 몰라도 서울은행은 갈 수 없습니다. 내게는 박 부의장이 직접 제일은행장이라 써준 것이 있습니다.” 4시쯤, 한상원 부장의 전화가 걸려 왔다. “큰 일입니다.
이 사장이 서울은행을 거부하기 때문에 결정이 안 됩니다. 이번만 양보하시지요” 이보형은 양보할 수 없다고 맞섰다. 자존심 싸움이었다. 두 시간쯤 지나 한 부장이 직접 쫓아왔다. 제발 양보해 달라는 설득과 이 사장의 버티기 줄다리기가 30분여, 마침내 ‘막내 서울은행을 전국 은행으로 키워보자’고 마음을 돌이킨 이보형은 결국 서울 은행을 승낙했다.
그는 “박정희의 꼬리표만 없었더라도 그렇게 고집은 안부렸을 것”이라고 털어놓았고, 김 장관도 그것 때문에 그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정된 것이 조흥은행 이호상, 상업은행 문종건, 제일은행 민병도, 한일은행 김세련 그리고 서울은행 이보형이었다. 그대신 취임한지 2개월밖에 안된 조흥은행 장용태(張容泰) 행장을 비롯하여 제일은행 정곤수(鄭坤秀) 행장, 한일은행 서재식(徐載軾) 행장, 서울은행 윤호병(尹皥炳) 행장이 임기 전에 물러났다. 상업은행 이필석(李珌奭) 행장만은 산업은행 총재로 발탁, 영전되었다.
정부 손아귀 속에 놓인 나약한 금융권
이제 남은 것은 임원선임문제, 역시 적격자 명단은 중정 에서 만들고 선임은 김유택 장관이 직접 했다. 김 장관은 명단을 내놓고 행장들로 하여금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라고 했다. 각자가 친분과 능력을 고려해 차례대로 골라가고 이 행장은 나머지를 맡았다. 해당임원은 전무로 하느 냐, 상무로 쓰느냐는 은행장의 몫. 최종 선임된 임원진은 이렇다.
조흥은행 전무 박용삼(朴容三), 제일은행 전무 정우창(鄭遇昌), 상무 이예철(李禮喆), 박노성(朴魯聖), 류기흥(柳基 興), 감사 김성탁(金性鐸), 윤홍규(尹弘奎), 서울은행 전무 전신용(全信鎔), 상무 이창근(李暢根), 강대봉(姜大鳳), 감사 김민호(金敏鎬), 상업, 한일은행은 임원개선이 없었다.
이것이 쿠데타 이후 정부소유로 바뀐 시중은행의 첫 번째 임원진으로서, 5개 시중은행은 6월 30일 일제히 주총을 열어 이를 추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에 대해 김유택(金裕澤) 장관은 끝내 말없이 작고했다.
그는 한국은행 총재시절과 그 이후 외교관 생활까지는 회고록에서 밝혔으나 5. 16 이후 재무장관, 초대 경제기획원 장관, 국회의원 시절 등 더 중요한 시기의 기록은 후일 기약했으나 이를 이행하지 못했다.
한편 제일은행장이 된 민병도는 회고에서, “김유택 씨로 부터 내가 제일은행장으로 전임된 사실을 통고 받았다.
이 인사 역시 내가 예상치도 않았던 일이었으니, 매번 나의 인사는 ‘밖에서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었고 내가 스스로 움직여 그렇게 되도록 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쿠데타 정국의 살벌함 속에서 금융계는 너무나 나약한 존재였다.
더욱이 실세들이 공화당 창당 등 정권창출을 위한 자금 조달과 개인적 사리사욕에 의한 부정부패에 사로잡히는 군정후반기에 갈수록 금융인들은 정도(正道)를 걸을 수없었다. 누구든 밉보이면 즉시 목이 날아갈 뿐만 아니라 감옥으로 가는 세상이다.
이렇게 선임된 당시 은행장들의 재임기간을 살펴보자.
조흥은행 이호상 행장 4개월, 한일은행 김세련 행장 7개월, 제일은행 민병도 행장 11개월, 서울은행 이보형 행장 4.5개월 등등 이중 김세련, 이보형만이 승승장구 영전했 고, 민병도는 한은총재로 영전 후 1년 만에 퇴진했다. 한마디로 파리 목숨이었다.
이런 가운데 상당수의 금융인들이 최고회의로 중정으로 실세와 요로를 들락거리며 보신에 급급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며 이는 자유당 시절에도 별로 없었던 새로 생겨난 서글픈 풍속도가 이후 일반적 관행으로 굳어져 갔다. 이런 형편인지라 혁명에 은근히 기대를 걸었던 당초의 순수함은 차라리 순진했다고나 할까. 일련의 금융계의 수난과정 끝에 초토로 남은 것은 금융은 정부의 정책과 정치 환경에 휩쓸릴 수밖에 없으며, 금융기관은 이에 저항할 수없다는 사고방식이었다.
금융민주화 이상과 마지막 세대 순교자들을 여럿 남긴 채, 3공 이후 정부에 공식적으로 반기를 드는 금융인들은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시중은행마저 완전히 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은행의 정부 예속화를 거치면서 결정적이 었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관영은행시대, 관치금융시대의 시작이었다. 그 누가 감히 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은행장 해임 결정은 누구의 몫이었나
해방 후 조흥은행의 정관을 보면 은행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취체역(取締役) 3명 이상, 감사역(監査役) 2명 이상을 두는데 주주총회에서 이를 선임하고, 취체역의 임기는 3 년, 감사역의 임기는 2년으로 한다.”
그리고 취체역 중 1명은 회장이라 하여 취체역 회의와 주주총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이 제도는 1978년도까지 있었 다. 또 취체역 중 수장(首長)을 두취(頭取)라 하였다. 두취는 일본식 명칭으로 취체역의 머리(頭)라는 뜻이다. 두취 라는 명칭으로 1955년 12월 16일까지 불려졌다.
당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당시 조선 은행 최순주(崔淳周) 총재를 ‘최 은행장’이라 부른데서 ‘은 행장’이란 이름이 탄생했다고 한다. 어쨌든 은행장은 퍽 많은 뉘앙스를 낳으면서 오늘까지 이르렀다.
오늘날 시중은행의 정관은 ‘취체역’을 ‘이사’라고 상법에 따라 바꾸어 부를 뿐 달라진 것이 없다. 은행장도 이사(理 事) 중에서 호선(互選)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은행 장을 5. 16 쿠테타 이후 청와대에서 임명해 왔다. 최근 1993년부터는 ‘은행장추천위제도’를 만들어 은행장을 추천하여 주주총회에서 선임하도록 하고 있지만 배후에서는 정부가 입맛에 맞도록 조종하고 있다. 은행장의 임명은 정부가 최대주주니까 주주권을 행사하는 차원에서 그렇다고 하자. 그러면 은행장의 해임은 어떠한가.
1950년 5월 5일 은행법 제정 당시의 규정을 보자.
“금융기관이 불법 또는 금융통화위원회가 정당히 발포한 명령, 지시, 규정을 고의로 위반하는 경우에는 금통위는 당해 금융기관의 주주총회에 대하여 중역(重役)의 경질을 권고할 수 있다.”
은행장의 목을 자르는 권한은 형법(刑法)의 규정이 아니면 금통위에서 발하는 그 은행 주주총회에 통지해서 은행 장을 바꾸라고 권고하는 정도 밖에 없다. 물론 주주들이 자신의 이해에 반하는 은행장이 있다면 주주총회에서 경질할 수 있다. 그러나 절차가 있는 것이다.
군사혁명정부는 은행장 문책에 관한 한은법 내용을 이상스럽게 고쳤다. 한은법 제30조에서는 금융기관 임원의 비위사실에 대하여 은행감독원장이 금통운위 앞으로 조치건의하고 금통 운위는 조치명령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은법 제114조 밑에 제114조의2를 신설하여 금융기관 은행장을 비롯한 임원의 비위사실에 대하여 은행 감독원장의 문책요구권을 규정하여 서로 상충되게 개정하였다.
그래서 한국은행은 이를 억지로 해석해서 운용하였다.
즉, 금융기관 임원에 대한 문책은 한은법 제30조에 따라 금통운위의 권한사항으로 해석되며, 임원에 대한 경고 및기관경고만은 금통운위의 권한 위임에 따라 은행감독원 장이 조치할 수 있다라고.
또 금융기관의 임원은 직원과는 달라 고용관계(雇傭關 係)가 아니라 위임관계(委任關係)인데도 면직(免職), 정직 (停職), 감봉(減俸), 견책(譴責)으로 직원과 같이 징계하도록 되어 있어 등 실효성이 없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은행의 대표자는 은행장인데 누가 은행장을 문책할 수있는가. 은행장을 정직시킨다고 정직(停職)이 되는가. 결국은 은행장에 대한 문책은 은행장독원장이 경고장 밖에줄 수 없었다.
정부가 먼저 은행장의 옷을 벗기고 난 다음에 은행감독 원장이 은행장에 대한 문책성 경고장(問責警告狀)을 주는 넌센스도 있었다.
군사정권 집권자의 사고방식에는 은행장이 예하부대장 (隷下部隊長)으로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후부터는 시중은행 은행장을 정부 마음대로 경질하거나 사임시키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특수은행 총재나 은행장은 비록 임명권자 임의대로 바꿀 수 있다고 하지만 주식회사인 시중은행 은행장은 최소한 주주총회에서 해임을 건의해야 하고 은행장도 타의에 의해서 물러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 아닌가. 5. 16 쿠데타 정권도 집권 초기에는 주주총회를 열고 적법한 절차를 거쳤다. 그만큼 순진했다고나 할까.
1965년 10월 편타대출사건 사후수습 과정을 보자.
화신산업 삼호 등에 대한 편타대출사건이 일단 마무리 되자 정부에서는 금융특혜의 사후 수습책으로 10월 주총 에서 시중은행장의 경질을 시도한다.
그러나 정작 변태금융의 책임자로 지목된 제일은행 이보형 행장은 유임시키고, 오히려 아무런 관련도 없는 상업은 행의 주총에서 은행장의 경질을 내놓았다. 당시에는 시중 은행 정기주주총회가 4월, 10월 두 차례 있었고, 이 때 상업은행이 다른 은행에 앞서 주주총회를 개최하였다.
편타대출로 말썽이 되었던 조흥은행장 서병찬(徐丙讚) 을 자퇴시키고 그 후임으로 상업은행 문종건 행장을 기용 토록 하는 정부의 복안이었다.
그러나 조흥은행장이 자퇴할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자리를 고수하였다. 그래서 상업은행 주주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 상업은행장을 사퇴하려고도 하지 않는 조흥은행장 자리로 전출시키려 한다고 격분하여 주총은 정회(停會)되었다.
이에 정부는 당황하여 10월 27일 밤 임시 각의(閣 議)를 소집하였다. 재무부는 궁지에 몰렸다. 가까스로 조흥은행 서 행장으로 하여금 사표를 제출케 하고 주주를 무마하였다. 그러나 군소주주들은 낙하산식 인사에 불복 하여 인사 문제를 비롯한 모든 토의를 10월 30일까지 미루었다. 그래서 10월 28일 이후에 개최되는 시중은행 주주 총회에서 연쇄반응을 일으켜 큰 곤혹을 치렀다.
[프로필]이 국 영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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