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이런 속빈 강정 같은 재벌은 차관도입 러시 이후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심화됐다. 손쉬운 축재수단 앞에서 기업인들은 빈약한 자본과 유치한 경영 및 기술수준을 향상시키려하기보다는 정부에 기대 차관도입권과 각종 특혜를 따내는 데에만 혈안이 됐다.
무작정 차관만 도입해 놓고 보자는 사고방식은 경영의 부진, 국제경쟁력 단위를 무시한 시설규모, 독점을 위한 기업공개 회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채 늘이기 등 불건실한 기업경영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무분별한 외자도입러시로 외채규모가 급증하자 일각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고 차관 망국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한 비판도 높아졌다.
정부는 1966년 8월 3일 공포한 신외자도입법 제26조에서 ‘정부지급보증의 조치로 인한 매년도 원리금상환액이 당해연도의 외환 수입액의 100분의 9를 초과할 수 없다’고 차관도입의 적정규모를 제시하고, 이에 근거해 외채는 현재도 앞으로도 큰 걱정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시중은행 지급보증의 상업차관을 합치면이 9%를 훨씬 넘고 있었으며, 1969년부터는 공공차관을 제외한 상업차관의 원리금상환액만으로도 안정수위인 9%선 금액을 넘어섰다.
재정차관과 상업차관도 정부지급보증과 마찬가지로 외채임에 틀림없는 데다 시중은행 지급보증차관은 정부보증차관과 똑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안정수위 계산에 정부지급보증만 포함시킨 것은 외채급증에 대한 비판론을 잠재우기 위한 호도책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차관업체가 빚을 갚지 못하면 지급보증을 해준 시중은행은 산업은행과 마찬가지로 외환은행에 대해 원화대금을 대신 물어주게 되며, 해외차주에 대해서는 외환은행이 자동적으로 외환지급을 하게 되므로 결국 외환은행을 창구로 하는 대내 보증이라는 점에서 정부보증이든 은행보증이든 똑같은 내용을 갖기 때문이다.
아무튼 차관 한 케이스를 얻어내기만 하면 재벌도 될 수 있고, 망해보았자 본전이라는 투기사들과 차관을 이권화 시킨 여당의 정책가들 그리고 관료가 벌려놓은 사태였다.
여론의 표적이 됐던 것은 현금차관. 5~6% 금리의 현금차관을 들여와 공장을 짓는데 쓰는 게 아니라 당시 25%이상의 고금리인 은행에 넣어두기만 해도 부가 굴러 들어왔다. 심지어 차관액의 절반가량이 정치자금과 각종 리베이트 등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실제사업에는 반만 투자되는 경우도 생겨났다.
자금조달 분량 확대 위한 은행법 제15조 조문 개정
차관도입을 돕기 위해 금융기관은 뱃속에 바람을 넣다 터진 개구리 우화처럼 헛배를 한없이 부풀렸다. 혁명정부 실세들은 1962년 5월 24일 은행법 제1차 개정을 하였다. 이 은행법의 개정에서 특히 주목할 일은 1962년부터 처음 실시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금융면에서 뒷받침하기 위하여 아파트의 내력벽과 같은 은행법 제15조 한도를 겁 없이 허물어 내렸다.
이 15조 한도란 무엇인가.
금융기관의 자산운영한도를 그 자기자본을 기준으로 규제하는 규정이다.
즉, 금융기관의 위험자산에 대한 자기자본의 비율을 종래의 100분의 10에서 150분의 10으로 확대한 것이다. 이를 개정함으로써 경제개발계획 수행상 필요로 하는 자금조달의 분량을 확대하였다. ‘100분의 10’과 ‘150분의 10’ 이 두 지표사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IMF관리체제하에서 5개의 일반은행과 지방은행을 퇴출시킨 BIS자기자본비율과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BIS 자기자본비율은 8% 이상을 요구하였다. BIS자기자본비율과는 운영자산 항목에 리스크 가중치를 곱하는 방법만 다를 뿐, 100분의 10은 자기자본비율이 10% 이상을 의미하고 150분의 10은 6.7% 이상을 말한다.
은행업은 일반 제조업이나 기타 영리기업과는 달리 자기자본에 비하여 운용자산의 규모가 현저하게 크다는 데 특색을 갖는다. 그것은 은행업이 원래 자기자본의 수십 배에 달하는 타인자본을 조달하여 이를 재원으로 대출 등 자산으로 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산운용의 위험도는 곧 타인자본의 위험과 직결되는 것이며 예금자를 주축으로 하는 타인자본 공급자에 대한 최종적 보증자금으로서의 자기자본규모는 이 의미에서 중대한 뜻을 갖게 된다. 금융기관의 자기자본 충실화문제가 은행 경영에 있어서 항시 강조되고 있는 취지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자본의 10배 한도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운용할수 있었던 것을 15배까지 확대한다는 것이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추진되고 있던 1960~70년대는 금융 기관의 규모가 팽창일로에 있어 자기자본 비율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더욱이 경제개발과 무역확대로 인하여 금융자금 수요가 날로 늘어나게 되자 그 보전책으로 수시 임시한도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는 비정상적인 임기응변책이 반복되어 왔다.
법과 현실의 괴리를 좁힐 수 있도록 제도상의 보완을 가한다는 이유로, 1969년 1월 28일 은행법 개정으로 위험자산규제 방식을 지급보증규제방식으로 전환함으로써 대출, 투자 등자산의 운용에 관하여는 15조의 규제범위에 포함시키지 않고 금융기관의 채무보증 및 인수에 한하여 자기자본을 기준으로 규제토록 하였다.
왜 지급보증만을 15조의 규제대상으로 하였을까.
한은의 발권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원화로 운용된 대출, 투자자산은 위험대상에서 제외하고 지급보증만을 규제한다는 것이다. 원화지급보증은 융자담보, 관세담보, 석유류구매대금 보증 등으로 취금금액이 미미했고, 문제는 외화지급보증에 초점이 모아졌다.
외화지급보증은 ‘채무의 보증’과 ‘채무의 인수’를 총칭한다.
채무의 보증은 외화융자담보, 화물선취보증서발급, 전대신용장, 수혜자를 위한 신용장개설은행 앞 L/발급, Stand-by L/ C의 발급형태로 이용된다.
채무의 인수는 차관과 수입 신용장 발급시에는 별도로 장부에 기입(B/S 각주표시)하여 두었다가 선적서류가 도착하면, 채무가 확정된다. 일람불 조건 신용장은 선적서류가 도래한 다음, 대불이 발생하지 아니하면 곧 결제되어 채무가 소멸되므로 외화지급보증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따라서 연불지급하는 차관이나 수입과 지급보증대불금만이 한도의 규제를 받게 되므로 은행법 제15조를 폐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차관도입이 급증하자 이 규제의 임시 변경조치가 비일비재로 발생하였다.
은행법 제15조 조문을 개정한다고 은행업의 메커니즘이 달라지는가. 혁명정부실세들은 군사(軍事)밖에 모른다고 치고, 엘리트를 자처하는 관리나 정책실무자들의 맹종과 무지는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10여개의 신설은행과 외국환전문은행 신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추진되는 사이에 여러 개의 새로운 은행들이 설립됐고 수많은 지점이 생겨났다. 점포만 개설하면 내자가 조달된다고 보았다. 사실 행원 1인당 1억원 이상의 예금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중소기업은행, 국민은행, 농협중앙회에 이어 1960년대 중반이후 외환은행과 주택은행이 닻을 올렸고, 대구은행을 필두로 10개 지방은행들이 잇달아 출범한 것이다.
그중 외환은행은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필요성이 제기됐고, 경제에 미친 영향이 컸으며 설립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던 은행이다. 외환은행이 신설되기 이전 외국환업무는 한국은행이 담당했었다.
한국은행은 중앙은행이자 한국 유일의 갑류 외국환은행으로서 모든 외환업무와 원조물자도입에 따른 외자업무 및 차관도입관련 지급보증업무를 독점적으로 취급했다.
그러다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실시된 1962년부터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 5개 시중은행이 을류 외국환은행 인가를 받아 외환업무를 개시했다. 이에 따라 무역 금융은 시중은행이 맡게 되었다. 즉, 무역업자는 한국은행에 내도한 신용장을 시중은행에 가지고가서 필요한 자금을 융자 받고, 융자해준 시중은행은 한국은행으로부터 재차입을 받았다.
이처럼 수출입업무와 외화송금은 한은이, 수출입금융과 예금업무는 시중은행이 담당함으로써 일반고객은 이원적 업무처리에 따라 적지 않은 불편을 느껴야 했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수출신장이 거듭되고, 월남전 특수에 따른 용역수출로 외환취급량이 급증하자 이런 불편은 경제정책상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5년의 환율현실화와 무역자유화조치 한·일국교정상화와 외국 금융기관이 국내진출이 허용됐다.
따라서 외국 금융기관들과 자주적인 입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국내 외국환업무의 정비를 위하여 외환업무를 전문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금융기관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청되기에 이른 것이다. 을류 외국환은행인 시중은행은 한국은행 외국부를 거쳐야 했으므로 여러 가지 제약요건이 많았고, 유일한 갑류 외국환은행인 한은은 국영 중앙은행이어서 외국 민간은행들과 상업적으로 경쟁하기에 무리가 많았다.
한은이 그때까지 쌓아올린 국제적 신용을 이용할 수 있는 동시에 상업적으로 외국 금융기관과 겨룰 수 있는 외환전문 은행의 설립을 정부가 구상하게 되었다.
당시 김정렴 재무장관의 회고록을 보자.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수출제일주의가 추진되기 시작한 후 수출은 매년 40%씩 신장되어 왔고 이에 따라 외국환업무도 급속히 증대되어 왔다.
한국은행의 외국부만으로는 모든 외국환업무 즉, 갑종 외국환 업무를 전담하기에 벅차고 그렇다고 아직 을종 외국환업무를 취급하는 미숙한 5개 시중은행을 갑종으로 승격시키기도 시기상조였으며, 국내은행의 해외지점증설도 긴요하게 되었는데 중앙 은행인 한국은행의 해외지점을 더 이상 설치하기에 난처했다.
한편 무역업계로서도 갑종은행인 한국은행은 국내 상업금융을 취급하지 않으므로 갑종외환업무는 한국은행, 무역금융은 시중은행을 상대로 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1951년부터 시작되어 파란을 거듭해 온 한일국교정상화도 눈앞에 이르게 됨에 따라 상호주의에 의한 일본 측 은행의 국내진출도 머지않을 것으로 예견되었다.
나는 급격히 증가하는 외환업무를 감당하고 상호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외환업무와 무역금융업무의 일관성 있는 처리, 국내은행의 해외지점망 구축, 그리고 외국은행과 경쟁해 나갈 수 있는 금융체제의 확립 등을 위하여 완전히 상업적으로 운영되는 국제수준의 외환전문은행을 설립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생각해서 이의 설립을 결심하였다.”
이렇게 외환전문은행의 필요성은 인정되었으나, 어떤 형태로 할 것이냐가 문제였다.
기존의 시중은행을 갑류은행으로 승격시켜 육성하자는 안과 새로 전문기관을 만들자는 두 가지 주장이 제기됐고, 또 만일 신설한다면 순수한 민간은행으로 할 것이냐가 논란이 됐다.
시중은행을 승격시키자는 안에 대해서는 5개 시중은행이 일반 상업은행 업무에 주력하고 있어 외환 및 무역업무에 전념하기 힘들다는 점이 지적됐다.
또한 당시 자본금 규모가 10억원 정도여서 도저히 외국은행과 경쟁되지 않으며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업무수행과 국제경제상황의 정확한 판단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전문요원 부족과 업무미숙에 비추어 전문화된 은행설립 쪽으로 기울었다.
순수한 민간은행으로 설립하느냐하는 점에 대해서는 외환에 관련된 금융체계의 변동이 그때까지 한국은행이 취급한 외화지급보증분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으며, 한국은행이 과거 16년동안 외환업무를 통해 쌓아올린 성과와 국제적 신용을 최대한 원용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점이 제기됐다.
결론은 한국은행이 자본금을 전액 출자하는 한은의 자매 은행으로서 외국환전문은행을 신설하게 되었다.
즉,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정부는 외환업무여건을 고려한다는 구실 하에 외환은행을 한국은행에 종속된 국책은행으로서 기형적 출발을 시켰다.
어쨌든 정부는 1966년 6월 14일 한국외환은행법의 모체인 한국환금은행법을 성안,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6월 24일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제57회 국회 제7차 재경위에서 이태성(李泰星) 전문위원의 심사보고를 들었다.
이 위원은 대체로 정부안에 긍정적이었으나 “한국은행이 출자한다는 문제는 한국은행이 무자본 특수법인체이기 때문에 실제로 가능하다고 해도 법적으로 문제될 수 있으며, 무역 금융수행을 위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 자금조달규정이 미비하다”고 비판했다.
[프로필] 이 국 영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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