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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한국경제 비화 ㊼]부산 해운산업과 비자금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위기의 해운산업, 계속된 망각

 

1970년대 후반 한때는 해운업이 신흥업종으로 지목되기도 했었다. 업종 자체의 수지가 좋았을 뿐 아니라 ‘자국선 적취율’을 높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따라 기업들마다 앞을 다투어 배를 사들였다.

 

은행들도 지급보증 수수료를 챙겨 먹는 맛에 눈이 어두워 배값의 90%나 되는 거액보증을 앞 뒤 안 가리고 남발하였다. 세계적으로 해운경기가 하강곡선을 그리면서 중고선박의 가격이 내리막일 때도 한국의 해운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사들이는 바람에 한때 배값이 오름세를 보이는 기현상을 초래하기까지 했다.

 

해운업자들은 자고 나면 떼돈을 벌었다. 운임수입이 늘어나서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배값이 뛰는 바람에 부동산 투기처럼 가만히 앉아서 횡재를 하는 격이었다. 은행들은 불같은 일이 일어나는 해운회사들과 거래관계를 맺기 위해서 앞을 다투었다.

 

이 가운데 이들이 돈을 해외로 빼돌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런 식이었다. 국내 선주가 800만 달러짜리 배를 사면서 1000만 달러에 사는 것으로 거짓 계약서를 꾸민다. 계약서를 근거로 배값의 10%인 100만 달러만 자기가 부담하고 나머지 900만 달러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다. 어디까지나 합법적이다. 부풀린 배값의 차액은 외국선주의 도움으로 외국의 비밀구좌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데도 아무도 몰랐다. 드디어 국제 중고선 값이 폭락현상을 거듭하는 가운데 국내 해운회사들이 과당경쟁으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비로소 정부도 심상찮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때는 늦었다. 은행들이 물려들 대로 물려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해운산업의 통폐합’ 조치였던 것이다. 63개의 해운회사들을 17개로 통폐합시키면서 부채상환을 연기해주는 것 등이 그 골자였다. 세계의 해운경기가 곧 회복될 것이므로 해운수입이 늘어나 연간 1000억원에 이르는 적자가 1988년에 가면 1000억원의 흑자로 돌아설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나마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보고받은 청와대의 특별지시로 재무부가 만들어 낸 수습방안이었다. 그러나 턱도 없는 이야기였다. 이 같은 방안은 해운경기의 사이클이 종전의 주기를 반복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일본의 해운정책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으나 우리의 해운업계나 주무관청인 해운항만청이라는 곳이 일본의 그것들과 기본적으로 너무나 다르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었다.

 

특히 이때까지 해운정책을 주도해 왔던 항만청 자체가 국내해운산업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 중에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수습을 기대한 것이 잘못이었다.

 

부실 문제의 대한선주나 비자금여부로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범양의 경영도 모두 근본적으로는 자신들이 저질렀던 엄청난 부실에서부터 잉태된 일이었다. 바꾸어 말해 이 두 회사가 금융지원 등을 통해 여태까지 원래의 사주로 하여금 계속 경영을 하게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명백한 특혜로 시비거리가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여기까지는 경제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이 경우 역시 정당했든 부당했든 간에 비경제적인 요인들이 개입된 탓이었다.

 

범양과 함께 국내 해운업계의 선두를 유지해 왔던 대한선주는 경영이 부실했을 뿐 아니라 정부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대표적인 기업이었다. 물론 그들은 그들대로 군데군데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상대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 원래 이들은 과학적인 경영보다는 이런 쪽에 더 능력발휘를 하며 성장을 해 왔던 기업이었다.

 

미움을 샀던 계기는 1984년의 해운산업 통폐합조치 때였다. 이 조치는 범양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으나 대한선주 측은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당시의 해운불황이 살물선을 중심으로 심화되었기 때문에 컨테이너의 비중이 컸던 대한선주로서는 상대적으로 형편이 괜찮았고, 따라서 항만청이 만들어낸 통폐합조치 자체가 자신들에게는 불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들은 한술 더 떠서 불황 타개책의 일환으로 항만청이 정해 놓은 운항 노선을 무시하고 자기네 배를 집어넣기까지 했다. 이처럼 대한선주는 가뜩이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당국의 눈 밖에 나는 일을 서슴지 않고 밀어붙여 나갔던 것이다.

 

국세청, 대한선주에 대한 특단의 세무조사 실시

 

그러니 얼마 후 대한선주는 국세청으로부터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판에 세무조사까지 받게 되자 대한선주는 여기서부터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안무혁 국세청장이 직접 나가서 지휘봉을 잡았다. 단순히 세무조사 차원이 아니라 ‘이런 기업은 가만 놓아둘 수 없다’며 거래은행들까지 동원해서 샅샅이 들춰내기 시작했다.

 

물론 대한선주를 상대로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편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이 시기에 그처럼 강력한 세무조사를 폈던 것인가.

 

첫째 이유는 우선 대한선주가 매우 부실한 상태였고, 더구나 정부의 정책에도 비협조적이었으므로 이에 대한 응징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보다 개인적인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대한선주는 당시 국민당의 부총재로 있던 윤석민 씨가 회장으로, 그의 동생인 윤석조 씨가 사장으로 실질적인 경영을 해 왔었는데 이들 모두가 개인적으로 전 대통령의 눈 밖에 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애당초 해운공사(대한선주의 전신)가 윤 씨에게 넘어간 것부터 달갑지 않게 여겼던 처지였는데, 때마침 터져 나온 투서사건(丁來赫 민정당 대표위원 사퇴)으로 여당을 궁지에 몰아 넣었던 문형태 씨가 이들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도 괘씸죄 차원에서 크게 작용했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맥락 속에서 대한선주는 회생불능의 상태로 빠져들었고, 따라서 정부는 부랴부랴 해운산업에 대한 추가지원 조치와 함께 대한선주를 한진에 인수시키기로 한 것이다. 결국 기업 자체의 부실이 가속화함과 동시에 고위층의 감정적인 반작용까지 가세됐고, 그런 과정에서 절차상의 무리를 무릅쓰고 서둘러 제3자 인수를 실천에 옮겨 나갔던 것이다.

 

범양의 경우는 좀 달랐다. 1987년 4월, 박건석 회장의 자살로 떠들썩하게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됐던 사건으로, 처음으로 전문 경영인이었던 한상연 사장과의 불화에 초점이 맞춰지더니 나중에는 비자금문제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사건이었다.

 

해운산업의 부실로 드러난 비자금 문제

 

이 사건의 배경은 단순한 것이었다. 박 회장은 자신의 유서를 통해 한 사장을 파렴치한 인물로 묘사했고 당시의 언론들도 덩달아 그렇게 몰아세웠으나 회사의 경영에 관한 한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누가 뭐래도 한 사장은 쓰러져 가는 회사를 버텨나가는 구심적이었던 반면, 오너인 박 회장은 오히려 전혀 겉돌고 있었다. 더구나 정부가 추가 지원책을 마련하면서 한 사장을 파트너로 삼고 일을 추진해 나갔기 때문에 박 회장은 심한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양측으로 갈라져 내분이 심화되어 가면서 회사는 더욱 어려운 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여기에서 국세청의 내사가 시작되는데 그 동기는 지극히 실무적인 것이었다. 범양 내부의 갈등, 다시말해 박 회장파와 한 사장파가 서로의 약점을 퍼뜨리는 것이 국세청의 조사망에 걸려들면서 내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박 회장의 자살 사건이 터지자 안무혁 국세청장은 ‘국세청이 박 회장을 조사한 일은 없다’고 언론에 밝혔으나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국세청은 박 회장이 자살하기 직전까지 불러다가 밀도 높은 조사를 통해 외환도피 등을 밝혀냈고, 자살당일날도 범양의 장래를 놓고 박 회장으로부터 마지막 결심을 얻어 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국세청으로서는 정부의 해운산업지원 정책과는 별도로 ‘범양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박 회장부터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전 대통령은 해운산업의 부실이 워낙 심각한 만큼 기업은 살리는 쪽으로 처리하도록 지시했고, 따라서 국세청은 박 회장에게 최후 통고를 해놓고 있던 상태였다.

 

요컨대 경제 형편을 생각해서 될수록 조용히 해결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런 판에 박 회장의 자살로 일이 커지면서 범양이 그동안 사용한 비자금 문제까지 비화되었던 것이다. 당시 의혹만 제기되고 덮어지고 말았던 비자금 문제에 대해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물론 범양과 비자금에 관한 추적을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처음에는 전 대통령도 완전히 그 내용을 까발려서 형사처벌까지 하도록 방침을 정했었으나 그렇게 되면 워낙 일이 커진다는 주위의 권고에 따라 덮기로 한 것이지요. 비자금의 전체규모는 짐작했던 것보다는 작았으며, 국회의원의 경우에는 최고 5000만원 짜리도 있었습니다. 또한 비자금의 사용은 대부분 박 회장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압력이 개재된 흔적은 없었고, 다만 해운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도록 하기 위한 로비 차원 문제였습니다.”

 

대봉(大峯) 부도

 

대봉산업이 충북은행 서울지점에서 2000만원의 부도를 냈다. 이로써 여름 이후 은행 관리하에서 실질적인 영업활동을 중단해 왔던 대봉그룹은 완전히 문을 닫았다.

 

대봉계열기업들은 오래 전부터 부도 상태에 빠져왔으나 은행 손실을 줄이기 위한 재고처분과 해외신용 등을 감안해 지금까지 부도 처분을 늦춰온 것이다.

 

한편 대봉에게 5000만 달러어치나 지급보증을 서줬다가 대봉의 수출불이행으로 은행 자신이 부도가 날 뻔 했던 충북은행은 금년 2월 한국은행으로부터 300억원 특별융자까지 받았고 앞으로 추가지원을 받아야 할 형편이다.

 

대봉그룹의 건설산업은 지난 9월 22일 이미 3000만원의 부도를 낸 바 있다. 대봉은 창업주인 김병만 씨가 1975년 6월 더 플라스틱사라는 수출회사로 출발, K고 동창을 중심으로 제2율산을 자처하며 무리하게 사업을 벌여오다 결국 도산하고 만 것이다.

 

대봉은 그동안 앨범, 가방, 잡화류 등을 수출해 한때 놀라운 기업성장을 보이며 협성혐항공화물, 성진냉동공업, 대봉농수산, 한수낸기계산업을 무리하게 인수하던 끝에 율산 사태 이후 수출 금융의 통제와 긴축에 휘말려 힘없이 주저앉고 만 것이다.

 

대봉의 은행빚은 충북은행에 450억원, 외환은행 400억원 등 모두 85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정보사(情報司)땅 매매사기 사건

 

1992년 6월 25일자 신문보도에 의하면 예비역 대령인 합참(合參)의 고위 군무원이 서울 강남의 정보사땅 불하를 알선해 주겠다고 속여 거액의 사기극을 벌인 뒤 자신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홍콩으로 도주했다고 밝혔다.

 

내용인즉 이렇다. 합참 군사자료실 군사자료과장 김영호(金英浩·52 육사18기) 씨는 1990년 1월부터 1991년 8월까지 합참의 군사시설정책실장으로 재직하면서 기업 및 민간인들에게 서울 서초구 서초동정보사땅의 불하를 알선해 주겠다며 50여 억원을 받아 챙긴 뒤, 민원인들의 진정으로 군수사기관의 수사가 시작되자 6월 11일 오전 9시 대한항공편으로 달아났다는 것이다.

 

문제가 된 정보사땅은 어떤 곳인가

 

정보사땅 서초구 서초동 1005의 6번지 일대는 1960년대 말까지 논과 밭, 임야지대였던 곳으로 1970년 10월 15일을 기해 정보사령부 터로 수용됐다.

 

당시 이 지역 땅값은 평당 1만원대였지만 이번 사기사건의 매각대금이 평당 2100만원이었던 점을 감안해 볼 때 땅값이 22년 동안 무려 5000배 이상 오른 셈이다.

 

이 정보사 땅이 부동산 업자들 간에 말이 오고가기 시작한 것은 1987년부터로 1988년 서울주둔군부대 지방이전계획에 따라 육군과 공군본부의 계룡대로 이전이 실행단계에 접어들고 수도방위사령부의 이전이 확정되자 정보사 이전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1990년 5월 당시 이상훈(李相薰) 국방장관과 이종구(李鍾九) 육군참모총장이 이전계획을 확정하고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성남으로 옮기는 실무작업을 진행했다.

 

참모총장을 지내던 이상훈 씨가 국방장관에 취임한 후인 1991년 2월 국무회의 의결을 거친 이 계획은 대통령 결재까지 받았으나 같은 해 5월 정보사이전과 관련된 루머가 계속 떠들자 이 결정을 백지화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이 도로계획상 직통대로가 뚫리는 개발예정지역인데다 인근에 법원단지를 비롯하여 서초역 등이 있어 군사지역에서 풀릴 경우 맞은편 서초동 호화주택단지의 평균지가인 평당 3000만원에 가깝게 될 것으로 예상돼 이 같은 땅값 상승과 기대심리를 악용한 사기사건이 1989년 6월부터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돌아보면 문제가 된 정보사 땅은 1989년 6월 김영호 씨의 전임자인 정승원(鄭勝遠·54 당시 군무원2급) 등이 이 땅이 군사기밀 보호구역에서 일부 해제된다는 사실을 군 간부, 친지들에게 미리 알려줘 부근 토지를 매입하게 하는 등 거액의 땅 투기를 벌여 정씨를 포함, 군무원 6명이 구속되는 등 물의를 빚어 왔던 곳이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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