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군사정권 초기 정치자금 조달방법 새나라자동차 사건 증권파동사건만이 군사정권 초기의 정치자금과 관련된 부정사건이 아니다. 새나라자동차, 워커힐, 빠찡꼬사건은 증권파동과 더불어 4대의혹사건으로서 공화당 조직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감행된 사건들이다.
새나라자동차 사건, 이 사건은 1961년 12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라인이 재일 교포 재산을 끌어들여 국내에 자동차공장을 건설, 특혜를 줌으로써 자금을 조성하자는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중앙정보부 석정선 제2국장 등의 아이디어로 일본제 소형자동차의 부품을 수입, 국내에서 조립하는 새나라공업주식회사라는 공장을 설립한다는 아이디어가 김종필 부장에게 먹혀 들어간 것이 의혹사건의 출발이었다.
당시 서울시내에서 굴러다니던 대중용 택시는 시발택시였다. 군용지프를 개조한 시발택시는 50대 이상 세대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중의 하나다. 초기에는 꽤 인기를 끌었지만 상자 곽처럼 생겨서 볼품이 없었다.
그래서 외국관광객을 유치하고 자동차 공업도 육성할 겸해서 날씬한 일제 소형차를 들여와야 한다는 것이다. 포섭대상으로 떠오른재일 교포는 박노정 씨, 일본이름 야스다 에이지라는 교포실업가였다.
박노정 씨는 동경 번화가에 몇 개의 빌딩과 맨션, 호텔을 갖고 있었고 일본 유수의 온천장인 아다미에도 핫조엔(八丁園)이란 요정을 갖고 있었다. 재일 거류민단 부단장까지 지낸 바 있는 교포사회의 거물이었다.
1961년 12월 박노정 씨는 주일대사관 참사관 최영택 씨와 만났다. 최영택 씨는 김종필 씨가 자신의 에이전트로 일본에 파견해 놓은 인물이었다. 돈벌이에는 재빠른 박노정 씨는 최영택 씨의 달콤한 제의에 넘어갔다. 주판알을 튕겨보니 괜찮을 것 같았고, 더욱이 군사정권의 핵심실세와 손을 잡으면 한몫을 볼 수 있을 듯 했다.
새나라공업주식회사는 자본금 1억원으로 설립하기로 하고 박노정 씨가 3000만원을 출자했다. 나머지는 한일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해결했다. 당시 한일은행에는 김종필 씨의 가형 김종락 씨가 상무이사로 앉아 있었다.
중정으로서는 제일 손쉬운 융자창구였다.
1962년 5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앞으로 5년간 자동차부품수입을 무관세로 하고 자동차세를 감면하는 내용의 ‘자동차공업보호법’을 제정하였다. 자동차공업육성을 명분으로 새나라공업주식회사에 특혜를 주기 위한 이 법이었다.
그러나 부품수입, 조립생산이란 말뿐이었다. 새나라는 부품이 아닌 완성차를 일본에서 수입했던 것이다. 무려 2000여대를 관세 없이. 이 많은 일제 승용차들이 거리를 쏟아져 나오자 시발택시들은 지방으로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대당 수입가격이 13만원인 일제 자동차는 국내업자들에게 25만원에 넘겨졌다. 김종필 라인은 이로써 2억5000만원의 부당이득을 챙겨 정치자금을 조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뒷얘기가 재미있다.
현지생산을 시작한 새나라공장의 첫해 이익금 1200만원의 분배에서 문제가 생겼다. 박노정 씨는 김종필 씨에게서 생각했던 만큼 제대로 이익금을 분배받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각계에 진정서를 돌려 억울하다고 주장하였다.
노발대발한 김종필 씨, “당장 그놈을 잡아 들여라”고 중정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를 사전에 눈치챈 박노정 씨는 혼비백산, 옷도 제대로 주워 입지 못한 채 숙소인 반도호텔을 뛰쳐나와 부산으로 줄행랑쳐 밀항선으로 일본으로 달아났다.
결국 모국의 실권자와 손잡고 돈을 벌어보려던 그는 원금마저 깨끗이 날리고 일본에선 밀입국 혐의로 체포돼 곤욕을 치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김종필 씨도 이미지에 큰 상처를 입은 꼴이 됐고, 일본에서는 박노정 사건이 화제가 되어 그의 악명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새나라자동차 사건은 정치자금 조달방법 치고는 참으로 치졸하고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론이나 남의 눈은 전혀 개의치 않았던 초헌법적 절대권력을 쥔, 쿠데타로 출범한 군사정권 초기의 전형적 모습이었다.
김종필 씨의 지시로 이 사건을 주도한 석정선 국장은 그 의혹이 문제가 되자 1963년 3월 구속돼 조사를 받다가 한 달 후에 풀려났다.
또 하나의 의혹사건 워커힐 사건
같은 무렵 터진 사건이 워커힐 사건이다.
쿠데타 한 달 후인 6월, 김종필 씨는 외국관광객을 유치해 외화를 벌어들이겠다는 꽤 참신하고 대담한 구상에 착수했다. 당시 주한 미군들은 휴가를 일본 등지로 나갔다.
국내 레저시설이 열악한 까닭이었다. 지금도 한강을 굽어보며 우뚝서 있는 워커힐호텔은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는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초호화판 호텔로 화제를 모았다.
7월 들어 석정선 국장을 중심으로 워커힐건설 사단법인이 설립됐다. 석 국장 휘하의 임병준 과장이 건설사무소장이었다.
10월 4일 김종필 씨는 교통부장관, 재무부장관, 경제기획원부원장, 서울시장, 한국전력사장, 산업은행총재 등을 불러들여 연석회의를 가졌다. 워커힐 건설자금 65억원 조달을 위한 구수회의였다. 그 결과 정부예산에서 16억원, 산업은행 융자 21억원, 주택공사에서 12억원, 서울시에서 6억원, 그리고 한국전력에서 1억원을 염출하기로 했다.
당시 이 회의에 참석했던 나익진 당시 산업은행 총재의 회고를 보자.
“그해 10월께라고 기억한다. 어느 회의에서 워커힐을 만드는데, 서울시는 도로를 담당하고 한국전력은 전기를, 주택공사는 건설을 담당하는 것이요, 산업은행은 자금 20억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만드는 주체는 누구며 상환계획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내 옆에 앉아있던 서울시장이 ‘그런 것은 후일에 차차 따지기로 하고 우선 이 자리에서는 한다는 원칙만 정합시다’하니 모두 ‘좋습니다’하고 일어섰다.
나로서는 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정세로서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 없어 그 날은 그대로 돌아왔다.” 이윽고 워커힐 부지로 내정된 광나루 밖 18만평의 임야에 토지수용령이 발동됐다. 주민들은 시가 2800만원짜리 땅을 5분의 1밖에 안 되는 430만원의 헐값에 넘기고 쫓겨났다. 10만여 평은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설경동의 첩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김종필 씨의 압력으로 거의 거저 빼앗다시피 사들였다고 한다.
공사는 건설부와 교통부의 기술지원과 육군 공병대 및 군형무소 수감자까지 포함, 연인원 2만4000여명이 동원돼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한국의 라스베가스’로 불린 초유의 환락의 궁전 워커힐은 1962년말 한강변 언덕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박장, 수영장, 나이트클럽, 회전무대, 고급 살롱, 사격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준공식은 4개월여나 지연돼 이듬해 4월 8일에 가졌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김현철 내각수반 등 요인들이 모두 참석했다.
그러나 건물의 주역들은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이들이 참석 못한 것도, 준공식이 늦어진 것도 건설과정에서의 부정사건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임병주 건설사무소장과 유재명 경리과장, 제일은행에서 융자받은 공사대금 3970만원 중 200만원을 워커힐 고문이던 정해직 씨가 운영하던 동해장유에 무단히 대부하고, 보관 중인 입찰보증금을 잃어버리자 퇴직사원이 계속 근무하는 것처럼 서류를 조작해 인건비를 지출한 것처럼 꾸몄다.
또 그들이 석정선 국장의 지시로 건축자재를 공화당사로 내정된 옛 세브란스병원 건물의 수리용으로 빼돌렸고, 접대비마련을 위해 6000만원의 공사를 맡은 시공회사 삼환기업으로부터 180만원을 수뢰했다는 혐의였다. 그런데 소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의혹의 화살은 최고책임자인 김종필 씨에게로 날아오고 있었다.
김종필 씨는 워커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62년 8월부터 1963년 2월까지 박춘식 교통부장관과, 신두영 관광공사총재에게 압력을 넣어 정부지분 5억3600만원을 건설자금 명목으로 뽑아내서 가불형식으로 전용함으로써, 막대한 공사대금을 정치자금으로 빼돌렸다고 한다.
나이트클럽의 회전무대, 전기장치에다 시멘트까지 모두 일제였는데 중정은 이 자재들을 검사도 관세도 없이 들여와 15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마련했다.
워커힐·새나라자동차 사건 금융통화위원회에 안건 상정
새나라자동차에는 한일은행, 워커힐은 산업은행이 각각 김종필 라인의 압력으로 거액의 대출이 나감으로써 금융계가 끌려들어 갔지만, 한국은행도 수입신용장 개설문제로 휘말려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은에 워커힐 관계 지시가 처음 내려온 것은 1962년 3월, 금융통화위원회는 3월 15일 워커힐에 대한 긴급자금 8억환을 대출최고한도외로 취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당시 외환사정은 1962년말의 외환보유고가 금을 포함해 1억6700만 달러로 1년 사이 4000만 달러가 감소하는 등 매우 나빠 사회적 관심사가 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워커힐 자재와 새나라자동차 수입에 귀중한 외화를 쓰겠다는 중정의 구상은 순탄히 넘어갈 수 없었다.
7월 16일, 워커힐과 새나라자동차에 대한 안건이 금융통화위원회에 상정됐다. 워커힐 건은 은행보유불에 의한 수입신용장개설시 전액 시중은행이 지급 보증하도록 해 달라는 것이고, 새나라자동차 역시 금융기관 지급보증으로 신용장을 개설하자는 요구였다.
지급보증한도는 은행이 수입물자대금을 대신 물어내야 할 것도 뻔했지만 악화 일로의 외환사정으로 볼 때도 이는 무리였다.
워커힐은 이미 여러 기관이 동원돼 사업이 추진되고 있었다. 금통위로서도 이 안건을 통과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정치자금과 관련된 소문이 난무하자 당초 주고객으로 잡았던 주한미군에 출입금지령이 떨어졌다. 이에 따라 워커힐은 외화획득은 고사하고 경영난을 겪으며 부실화, 금융기관들은 애먹었다.
7월 16일 금통위는 워커힐에 대한 신용장 지급보증을 통과시켰으나, 새나라자동차건은 다수 위원들의 반대로 보류됐다. 그러자 정부는 19일 건명과 의결사항을 바꾸어 다시 내놓았다. 당초 안건명은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 신청에 의한 일람불 180일 및 360일 유전스 수입신용장 개설을 위하여 그 보증금으로서 전액 금융기관의 지급보증서를 징구하고 신용장 개설 취급허용’이었다.
이 원안에서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를 빼고 ‘상공부장관이 허가한 자동차공업보호법의 적용을 받는 자동차 생산용원자재’를 강조해 명분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과 본질이 바뀐 것이 아니라 포장만 약간 달리 했을 뿐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장시간의 논란 끝에 금통위는 최고회의 의장의 지시각서를 근거로 신용장 개설 특례취급을 의결했다.
6월 1일 금통위에서 증권파동수습을 위한 증권금융을 의결할 때는 류원식 최고의원과 천병규 재무부장관으로부터 ‘최고회의 의장의 분부가 있었다’는 증언을 듣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었다. 새나라 자동차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최고회의 의장의 지시’를 문서로 요구했고, 결국 메모형태의 ‘지시각서’가 타협안으로 채택되었다.
산업은행의 워커힐 융자 경위
워커힐에 대한 산업은행의 융자경위를 나익진 당시 산업은행 총재의 회고를 통해 좀 더 들어보자.
“군정이 시작된 지 불과 몇 개월이 못 가서 하나둘 씩 부조리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도록 강요받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나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한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없다고 그때그때 마다 강경히 거절했다. 그리고 그것이 혁명주체들의 의사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그가 워커힐 건설관계 회의에 참석한 지 며칠 후, 건설사무소장인 임병주 중령이 산은총재실로 찾아왔다. 워커힐 건설자금을 대부해 달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일을 맡아 하는 주체가 누구요.” 나 총재가 따져물었다.
임 중령은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을 회피하면서 ‘사단법인으로 할 계획인데 교통부, 중앙정보부, 재무부 등의 국장급이 이사가 되어 운영하며 대출상환은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해서 그 수입으로 변제할 예정’이라고 설명하면서 은근한 압력을 가해왔다.
나 총재는 난처했다. 은행원 입장에서야 도저히 수락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안 할 수 도 없는 상황이었다. 궁리 끝에 그는 이같이 제의했다.
“이것을 국립으로 하시오. 그러면 혹 잘못되는 경우라도 국립은행에서 국립기관에 내는 것이니 큰 문제가 없을 것이요. 그러나 사단법인체에 이 같은 큰돈을 내는데 담보도 상환계획도 불확실해 가지고는 곤란합니다.”
임 중령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이래서 산은대부는 나가게 된 것이다. 그 임병수 중령은 건설과정의 의혹으로 그후 감방의 고초를 맛보아야 했다.
빠찡코 의혹사건
이 같은 산업은행에 대한 사례들은 금융계에 대한 쿠데타핵심세력의 대출압력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아직까지 이 글에선 4대 의혹사건 중 하나를 언급하지 않았다. 바로 빠찡꼬 의혹사건이다.
이 사건은 성격상 금융계와는 별 관련이 없었다. 회전당구, 일명 빠찡꼬를 들여온 것도 김종필 씨의 아이디어였다. 다른 의혹사건들 보다 규모는 작지만,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을 대상으로 도박판을 벌였다는 점에서 말썽이 됐다.
1960년 8월, 500대의 빠찡꼬를 처음 들여온 것이 국내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사행심을 조장한다는 여론의 비난으로 곧 금지됐다.
그런데 김종필 씨는 그 기억이 생생한 마당에 아예 유기장법까지 제정하고 한꺼번에 2527대를 들여왔다. 당연히 물의가 일었다. 그러자 1962년 10월 25일 군사정부는 임시각의에서 빠찡꼬 유기시설을 폐쇄한다고 선언했다.
법까지 만들어 빠찡꼬를 들여오도록 해놓고 난데없이 문을 닫으라고 하자 국내업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특히 업자들은 기계를 수입할 때 일본의 시세보다 엄청나게 비싼 대당 15000원씩을 지불했다고 폭로, 말썽이 됐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리베이트가 중앙정보부로 흘러 들어갔던 것이다.
문제의 빠찡꼬 수입에는 중정이 배후 조종했고 강성원, 정지원, 이영근 등이 수입업무를 주관했다. 이들이 누구인가.
바로 공화당 사전조직의 핵심들이자 증권파동의 막후주역들이었다.
4대 의혹사건은 모두 공화당 사전조직에 나선 김종필 씨가 자금에 쪼들린 나머지 생각해 낸 정치자금 조달책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 국 영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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