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호에 이어서>
정태수 회장의 파란만장한 성공담
“항상 태양을 향해야 살아남아요. 음지로 향하면 안돼. 북극이나 남극으로 가면 살 수 없어…여러분이 이 말뜻이 무엇인지 잘 알리라고 봅니다.”
1994년 9월 한보그룹 임원워크숍. 정태수 한보 총회장이 150여명의 임직원을 앞에 두고 이런 훈시를 했다.
목단추를 풀러 헤친 편안한 와이셔츠 차림. 앞줄에는 정보근 회장이 경청하고 있었다. 이 자리는 수서사건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던 정 총회장이 당진제철소의 한보철강을 디딤돌로 삼아 화려하게 컴백하는 자리였다. 그래서인지 평소 그의 경영철학이 펼쳐졌다.
정 총회장이 목에 힘주어 말하는 ‘항상 태양을 향해야..’란 이야기는 아마도 ‘되는 쪽으로 일을 벌여 나가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그런데 참석한 임직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최고 권력에 가까이 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나를 봐라. 정국을 회오리로 몰아넣었던 수서사건에서도 재기하지 않느냐? 사업이란 그런 것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세월을 통한 정 총회장의 재기무대였던 만큼 누구나 그렇게 받아 들였다. 그는 기분이 한껏 고조돼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개인적인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마음도 답답하고 해서 한 역술가를 만나 처자식 문제를 물으니까 다 잘될 거라. 사업도 다 잘된다고 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정 총회장이 사업을 시작한 계기가 된 역술가의 만남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처음에 반신반의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사업가로서의 천부적인 자질을 굳게 믿었고, 이같은 미신적인 확신은 사업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아침이면 학교운동장과 관청 앞마당에서 재건체조가 한창이던 1969년 가을 무렵 정씨는 친구와 함께 우연히 한 역술가를 찾아갔다. 평소 운명론과 역술학에 관심이 많았던 정씨는 마침 말단 세리(稅吏)생활이 실증나기도 한 터였다.
“직장 그만둬. 사업하면 대한민국에서 첫째, 둘째손가락 꼽힐 거야. 직장생활 해봐야 과장되기도 어려울 걸” 역술가는 대뜸 사업을 권했다.
미심쩍기도 하고 당장 때려치우기도 뭣해서 미적거리다가 두어 달쯤 지나 정씨는 다시 한번 그 역술가를 찾았다.
“애 또 왔어. 사업하랬는데. 어서 사업할 계획이나 세워”
그는 정씨가 음양오행상 ‘토(土)의 운세를 타고 태어났으니 흙과 관련된 사업을 하라고 제시했다. 이때부터 정씨는 공휴일이면 등산을 가기 시작했다. 산자락을 헤집다가 이상한 돌멩이 즉 광석만 보면 배낭 가득 담아 가지고 내려왔다.
그 역술가는 사업하면 큰돈을 번다지만 재산이라야 서울 구로동의 9평짜리 집뿐. 밑천 없이 일확천금(一攫千金)하는 길은 역시 광산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수집한 광석을 광업진흥공사에 분석을 의뢰했지만 번번이 잡석으로 판명되곤 했다.
그러나 운명이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가? 정씨는 마침내 일제 때 폐광된 강원도의 몰리브덴광산을 찾아냈다. 연산 1000t 규모였다. 광산출원을 내고 1974년 겨우 2만여원의 헐값에 광산을 인수했다. 정씨는 더 이상 세무서의 ‘정주사’가 아니었다.
정씨가 기업을 일으킨 것은 51세 때. 강릉세무서의 주사를 마지막으로 23년간의 세무공무원 생활을 마감하고 1974년 3월 몰리브덴광석 수출을 주업종으로 한보상사를 설립했다. 그의 사업밑천은 부인이 모은 곗돈 100만원과 집을 담보로 얻은 200만원 뿐이었다.
몰리브덴 수출에 주력하는 한편으로 집장사(주택사업)를 시작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택지를 살 돈이 없었다.
그는 세무직원인 직원동료 7명을 설득해 한사람에 300만원씩을 출자. 서울 구로동에 1200여평을 마련한다. 사업이 지지부진하자 동료 출자자들은 ‘차익을 남기고 팔아넘기자’, ‘분할해서 나눠갖자’는 등 입씨름을 벌이다 아파트 건립에 의견을 모았다.
정씨는 주택은행의 융자를 받아 이곳에 아파트 172가구를 지어 분양한다. 동료들의 출자금을 이자 쳐서 모두 갚고도 수천 만원이 남았다. 그는 이 돈으로 땅을 사서 아파트를 지어나갔다. 본격 주택건설업에 손대기 시작한 것이다. 1976년에는 삼아건설을 인수해 한보주택을 설립했다. 그해에 480가구를 지었고, 1977년에는 1330가구를 분양했다.
은마아파트로 돈벼락 맞은 정 회장
1977년은 정씨가 사업에 자신이 붙은 해다. 무엇보다 관악구 신림동에 지은 960가구의 미도아파트가 대히트했다. 분양에 1만여명이 몰려 경쟁률이 10대1을 넘었다. 이때 벌어들인 순이익만도 20억원에 달했다.
금상첨화(錦上添花)로 국제시장에서 몰리브덴 값이 천장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규모 몰리브덴광산이 불이나 공급량이 달리게 된 것이다. 돈이 엄청나게 쌓이기 시작했다.
“사업이란 말이야. 그게 재미있어. 내가 처음에 20억원 들여서 1350억원 사업했지. 은마아파트 440가구… 다 계산이 나오더라고. 20억원 갖고 1350억원 말이야.”
정 총회장은 사업이야기만 나오면 자신의 짜릿한 성공체험인 ‘은마의 기적’을 되살린다. 임직원을 앞에 두고 두 배도 세 배도 아닌 70배의 이익을 남겼던 사업가로서 한판승부를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것이다. 은마아파트 건설사업이 시작된 1978년은 정 총회장이 한편으로는 기로에 섰던 해다. 부인의 곗돈 100만원으로 시작한 사업이 4년 만에 20억대로 불어나자 ‘이만하면 됐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터져버린 ‘돈벼락’에 은근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또다시 운명에 모든 것을 걸었다. 대치동 은마아파트 부지는 비만 오면 물이 괴는 저습지인 데다 양재천과 탄천의 유수지였다. 그는 이 불모의 땅을 사들여 아파트용지로 용도를 변경하고, 모두 4424가구의 대단위 아파트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모두 31, 34평형으로 당시로서는 중대형이었다.
그렇지만 정 총회장의 자랑대로 은마의 기적이 처음부터 계산이 나오거나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창 골조가 올라가던 1978년 8월 9일 부동산투기억제조치가 내려진다. 이에 따라 은마아파트에도 먹구름이 몰려든다. 분양이 이뤄지지 않자 아파트단지는 밤이면 불 켜진 곳이 없어 음산하기까지 했다. 극심한 자금난이 찾아왔다.
건자재대금 지급어음이 매주 돌아왔고 은행이자와 상환금 납입기일도 ‘없는 집 제삿날 돌아오듯’했다. 직원들도 하나둘씩 떠났다. 사채를 끌어다 메우기 시작했지만 1979년 가을에는 도산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
당시 정 총회장의 일과는 오전 8시 30분 은행장실에 진을 치면서 시작됐다. 결재서류도 은행장실로 가져오도록 했다. 은행돈을 한 푼이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여기서도 행운은 정 총회장의 손을 잡아준다. ‘기업사채 긴급 동결령’이 내려져 한보의 숨통이 트인 데다 1980년 1월부터는 유가 환율 금리가 대폭 오르는 소위 ‘3고’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자 인플레 심리가 확산되면서 돈이 부동산으로 몰려들었다. 겨울잠에 들었던 은마아파트가 기지개를 펴는 순간이다.
아파트는 유가인상 발표 후 20일 만에 완전 분양됐다. 천문학적인 돈이 분양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1만원권 지폐가 마대자루에 담겨 은행으로 옮겨졌다. 현금으로만 하루에 20억~30억원의 거금이었다. 이제는 은행장들이 거꾸로 정 총회장을 고객으로 모시기에 바빴다. ‘20억원으로 1350억원’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주팔자와 역술에 의지했던 정 회장
어차피 역술가의 한마디로 사업에 첫발을 디딘 정 씨는 ‘역술경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같은 경영방식은 경우에 따라서는 무모하다는 지적도 받지만 어떤 때는 엄청난 성공을 이끌어 냈다.
광산이 그랬고, 주택이 그랬고, ‘쇳가루를 만지라’는 역술가의 권유로 시작한 철강도 그랬다.
충남 아산만의 당진제철소 부지에서 1990년 12월 29일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한보철강공장기공식을 가졌다. 해가 바꾸기 직전에 서둘러 치러진 기공식이었다. 식장 맨 앞에는 정 총회장이 자리하고 있었고 옆에는 한 스님이 앉아 있었다. 바로 이날 기공식을 치르도록 ‘길일’을 잡아 줬다는 스님이다.
“정 회장은 사주팔자와 역술을 깊이 믿었죠. 한번은 선박회사를 하나 인수하라고 권하니까 사주에는 안 좋다고 나왔다며 고개를 가로 저었어요. 그런데 세양선박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더라고요. 넌지시 물어보니 자신의 소유가 아니래요.”
정씨와 막역한 친구이자 같은 해주(海州) 정씨 종친회 위원이기도 한 정종환(鄭宗煥) 씨가 (주)제원선박 소유주라는 얘기다. 그의 무속과 미신, 역술 등에 대한 관심은 집요할 정도다. 정씨의 원래 이름은 태준(泰俊)이었는데 성명학에 따라 태수(泰守)로 바꿨다. 또 4남의 이름도 한근(翰根)이었던 것을 한근(澣根)으로 바꿨다.
한보그룹 사옥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상가 3층에 있는데 14대 재벌기업으로서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입구가 여러 곳이어서 신입사원은 처음 사무실을 찾는데 애를 먹기 일쑤다. 그러나 이전하지 않았다. ‘목수가 자기 집을 지으면 망한다’는 정 총회장의 믿음 때문이다.
또한 은마아파트의 자리가 ‘물이 흩어지는 자리가 아니라 물이 들어오는 바람의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서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명당’이라는 풍수지리 측면도 감안된 것으로 알려진다. 풍수에서 물(水)은 곧 재물로 비유된다.
정 총회장은 박태준(朴泰俊) 전 총리가 자주 찾던 부산 지역의 역술인 박모씨를 가끔 만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치소에서 검찰조사를 받고 있는 정씨는 아마 ‘한국 최대의 민간제철’이란 꿈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철강을 추천한 역술인은 여전히 정씨가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사업가’이며 ‘운세도 강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비에 능통했던 정 회장
어쨌든 정씨에게 따라 다니는 수식어는 ‘천부적인 사업가’, ‘신흥재벌’이 아니라 ‘로비의 귀재’다. 사업가에게는 여러 자질이 필요하겠지만 그중 가장 뛰어난 점 가운데 하나가 로비능력이었다.
“한번은 정씨가 인사나 하겠다고 찾아왔어요. 특별한 이야기도 없이 이런저런 말을 하다 약속 때문에 일어나겠다며 봉투를 내미는 거예요. 뭐 대충 그만한 액수겠지 싶어 과총무를 맡은 직원에게 그 자리에서 건네줬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0’하나 더 붙었더라고요. 안되겠다 싶어 돌려 줬죠.”
한 시청간부가 소개한 정씨의 로비행태다. 그는 제대로 몰랐지만 정씨의 ‘통’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다른 고위관리는 일식집에서 단둘이 정씨를 만났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정씨가 몇 마디 이야기를 하고는 약속 때문에 먼저 일어난다며 나갔다. 그런데 정씨가 가지고 온 트렁크가 그대로 있지 않는가. 호기심에 열어보니 1만원권으로 가득차 있었다.
놀라서 전화를 거니 정씨가 “아 참. 깜박했군요. 감사합니다. 비서를 보내겠습니다”고 대답했다. 트렁크는 정씨의 비서가 찾아갔다. “줘도 못 먹는 얼간이에게는 줄 필요도 없고 억지로 줘봐야 나중에 탈이 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정씨가 세무공무원 시절에는 로비에 매우 서툴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강릉, 속초 등 변방지역을 뱅뱅 돈 것도 동료나 하급자와의 의리는 중시하지만 ‘상납’을 하지 않아 좌천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사업을 시작하기 전 1974년까지 서울 구로동의 9평짜리 난민주택에서 궁색한 살림을 꾸렸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맨땅에서 기업을 일으키다보면 곳곳에 ‘발목 잡는’ 덫이 있었고, 별다른 배경이 없던 그는 확실한 ‘현금배팅’으로 이를 피해나갔다.
대표적인 수법이 한보에 영입한 전직 고위공무원을 내세워 옛 동료나 부하 등과 접촉해 사전정지작업을 마치는 것. 이후 직접 고위당국자나 관계 인사를 만나 깜짝 놀랄 거액을 제공한다. 물론 모두 현찰이었다.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내세울 것이 없던 정씨는 어떠한 형태로든 ‘관계 맺기’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정도 많아 한번 맺은 인연이라면 쉽게 끊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로비라는 것도 ‘대가를 바라는 일과성이’ 아니라 끈끈한 내 사람 만들기였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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