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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230억환의 증권금융 요청에 대해 한은 임직원과 금융통화운영위원회(금통운위) 종합된 의견은 ‘이 융자는 부당하므로 금통운위에서 일단 부결하여 이를 정부에 회부, 정부 단독으로 수행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5월 24일 개정된 한은법에 따라 재무부장관의 금통운위 의결사항 재심요구권 및 재심의도 부결되었을 때 대통령이 최종 결정한다는 조항에 의거, 금통운위가 부결하여 정부(대통령)가 결론을 내리도록 하자는 얘기였다. 어차피 수행될 때 되더라도 막을 수 있는 데까지는 막아보자, 아니 막는 시늉이라도 제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판이 벌어지자 이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정부에 회부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천병규 재무장관이 직접 주재하는 금통운위가 5월 30일 오전 10시 10분에 열렸다. 참석자는 민병도 총재, 송찬규, 임석춘, 서재식, 임익두, 정문기, 김병원, 정인욱 위원 등이었다.

 

회의는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도중에 12시부터 10분간 긴장을 풀기 위해 휴회를 가질 정도였다. 증권금융의 당사자인 한은 총재가 가타부타 한마디도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답답할 만도 했다.

 

의장인 천 재무장관이, “총재의 의견은 어떻습니까”고 지목하고 나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여러 위원께서 대강 생각하시는 점이 이 한도외 취급 그 자체보다도 과열상태에 있는 증권계를 앞으로 어떻게 조속하게 큰 파탄이 없이 냉각시키느냐 하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 재무부 혹은 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부터 책임 있는 증언이 아직 나오지 않은 까닭에 각 위원께서 확실한 의사를표시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저 자신도 그에 대해서 각 위원이 말씀하신 것과 대동소이한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의는 오전 내내 진전을 보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다. 정오에 휴회를 거쳐 다시 속개되어 1시 25분에 끝났다. 결국 장시간의 논란 끝에 증권거래소 180억환, 연합증권 50억환의 증권금융이 통과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인욱 위원은 끝까지 반대, 자신의 반대표시를 의사록에 남겨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증권시장 파탄…정부, 재개장과 폐장 기로에 서다

 

이렇듯 천신만고 끝에 방출된 230억환의 증권금융으로 위기를 넘겼다면 얼마나 좋았으랴마는 5월말 수도결제는 무사히 넘어가질 못했다.

 

증권시장은 결국 파탄했으니, 이 사건을 5월 증권파동이라 부른다. 증권거래소의 판단착오로 결제자금 부족액을 너무적게 계산했던 것이다.

 

거래소에서는 180억환만 지원 받으면 5월말의 수도결제가 원만히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증거금으로 받았던 개인당 좌수표 중에서 상당부분이 은행에 예금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교환에 회부하면 당장 부도가 날 수밖에 없었다.

 

거래소가 결정한 증권금융 요청액은 5월말 총 거래약정대금 691억환 중 60%가 증거금으로 적립돼 있으므로, 나머지 276억환 중에서 가용자금을 뺀 180억환 규모였다. 이 계산은 증거금으로 적립된 415억환을 모두 현금화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데 증거금의 상당액이 은행잔액도 없는 당좌수표로서 현금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밑천이 완전히 바닥난 매수 측은 다급한 나머지 부도날 당좌수표로라도 증거금을 내보자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대주주인 이상 거래소가 어떻게든 막아 주리라는 배짱이었다.

 

사실 거래소는 최선을 다했다. 금통운위에서 의결한 증권금융 230억환 중 연합증권금융에 나간 50억환은 증거금관계 당좌수표의 부도를 막기 위한 자금이었다. 증권금융 건이 30일 금통운위에 올려진다는 소식에 증권업자들은 보유 당좌수표를 은행에 지급 제시했다.

 

회의만 열리면 즉시 증권금융이 결의돼 어음교환 마감시간 전에 융자가 나와 부도사태 없이 결제가 되리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융자가 결의된 것은 오후 1시 25분이었다. 어음교환 마감시간은 이미 지났다. 부도를 낼 수 없어 은행이 교환을 보류함으로써 수도결제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나마 50억환은 다음날 증권금융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이것 말고도 입금이 되지 않은 당좌수표가 1억환에 달했다. 내줄 돈이 없었던 것이다. 수도결제를 못하게 되자 증권시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재무부당국도 대경실색했다.

 

증권업계가 신청한 230억환만 대주면 되겠거니 했는데 난데없이 100억환이나 턱없이 부족하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증권시장은 파탄했다. 풍선은 끝내 터져버렸고 정부로서는 증시를 뒤집어엎을 수밖에 없었다. 파국은 이미 벌어진 것이다. 남은 선택은 100억환을 더 내서 수도결제를 완결시켜 사태를 일단 수습하고 다시 시장을 개장하느냐, 아예 말썽만 일으키는 증권시장의 문을 닫아버리느냐의 두 가지 길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정부입장에선 증시폐장을 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일 오후 금통운위를 소집, 100억환의 증권금융을 추가 방출하고 2일 수습한 다음 월요일인 4일에 증권시장을 재개한다는 대책을 세웠다.

 

6월 1일 오후 3시, 긴급 금통운위가 소집됐다. 이 자리에는 류원식(柳原植)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위원(준장)이 배석됐다.

 

그런데 30일 회의에서 끝까지 반대했던 정인욱 위원 등은 불참했다. 본회의에 앞서 류 위원과 금통위원들은 소위원회실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갑론을박을 거듭했다. 위원들은 완강히 반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230억환을 내주었지만 증시는 결국 파산했다.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류 위원과 천 재무장관은 ‘본건은 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의 분부도 있었고, 증권시장 수습은 국가 정책’이라며 추가방출 필요성을 역설했다.

 

오후 5시 10분, 본회의 거수표결로 100억환의 증권금융 추가융자 한도외 취급이 의결됐다.

 

연석회의, 그리고 정부의 대증주 인수 종용

 

증권금융 100억환 추가방출로 겨우 사태를 수습하고 6월 4일 증시는 다시 개장했으나 6월말 수도결제분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5월 파동을 경험한 증권가에서 6월말 결제가 정상적으로 이뤄지리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장대리인 회의에서는 거래거부를 선언했다. 재무부도 대책마련에 골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금융계가 증권계에 대출한 총액이 390억환으로 당시 통화량의 11%에 달하는 상황에서 증권금융을 더 내라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

 

대신 이번에는 주식을 은행이 떠맡아 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즉, 금융기관과 보험단이 국가적 견지에 입각하여 주가폭락을 막기 위해 대증주 등 6월 중 건옥일부를 인수해 줄 것을 요망하고 이를 강력히 권고한다는 것이다. 증권계도 자신들의 책임과 피해축소에 급급, 금융기관 및 보험단이 일부 주식을 인수해주면 나머지를 자진해서 거래를 원상복귀하는 해옥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4일 하오 은행집회소에서는 재무부, 금융단, 보험단, 증권거래소 및 증권업협회 대표자 연석회의가 열렸다. 금융단과 보험단이 대증주 5억7000만 주를 프리미엄부 공모가인 주당 14환50전에 인수해 달라는 증권계의 요청을 검토하기 위한 자리였다.

 

정부당국도 이를 강력히 종용했는데 인수규모는 금융단 60억환, 생보업계 및 손보업계가 각각 10억환씩이었다. 그러나 금융기관과 보험사들 입장에서는 이같은 요구는 당치 않은 얘기였다.

 

5월 파동으로 주가가 폭락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어서,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손실을 보라는 것이 아닌가.

 

문상철 은감원장, 금융인으로서 사태를 해결하다

 

시중은행의 재무구조 악화를 막기 위해 결연히 반대하느냐 아니면 대세에 따라 묵과하느냐로 고민하던 문상철 은감원장은 금융기관의 경영건전성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은행집회소에서 한국은행으로 돌아온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빈 껍데기 주식을 어떻게 은행이 인수하느냐. 내가 책임지고 이를 막겠다”이것이 회견의 골자였다.

 

5월 금융계 소식통에 의하면 금융단은 대증신주 인수를 결정한 바 없으며 5일 중으로 인수여부를 증권거래소에 통고하기로 약속한 바도 없다고 밝혔다.

 

금융계 소식통에서는 현 금융정세를 보아서 대증주를 도저히 인수할 수 없으며 50전의 대증주를 14환50전으로 인수한다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주목을 끌었다.

 

이것은 6월 5일자 한국일보 보도내용. 이같은 문 원장의 폭탄선언이 나가자 정부와 증권계는 발칵 뒤집혔다. 류원식 재경위원과 천병규 재무장관이 전화로 재고를 요청해도, 증권계쪽 인물로 추정되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협박전화에도 그는 굽힐 줄 몰랐다.

 

며칠 후 최고회의 의장실, 문 원장은 류 위원과 함께 박정희 의장에게 불려갔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의 권력자 박정희였다.

 

그러나 문 원장은 다소 긴장했을 망정 위축되지 않았다.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왜 이리 시끄럽소.” 박 의장이 물었다.

 

문 원장은 그간의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당당히 소신을 주장했다.

 

“모든 일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처리해야지, 빈 껍데기 주식을 80억환이나 은행 및 보험회사에 안긴다는 것은 은행의 민주주주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고, 국민이 납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부에서 꼭 필요하다면 최고회의는 입법권이 있으니까 입법을 해서 이 증권인수에 대해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행감독원장으로서 금융단의 주식인수에 승복할 수 없습니다.”

 

배석한 류 위원의 얼굴이 굳어졌으나 문 원장은 오히려 담담한 심정이었다.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뭔가 생각하던 박 의장, “알았소”라는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금융단과 보험단은 80억환 규모의 대증주를 인수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는 오로지 문상철 씨의 굽히지 않는 용기와 금융인으로서의 정도를 지키겠다는 신념의 결과였다.

 

증권계는 대증주 5억5000만주를 강제 인수시키려던 계획이 좌절되자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어 자신들의 책임 하에 자체적 해결책을 모색하게 됐다. 6월말 당한 건옥의 대부분을 금융단과 보험단에 떠넘기고 체면상 일부만 해옥하려던 안이한 생각을 버린 것이다.

 

5일 하오 증권거래소 이사장과 증협회장단은 재무장관을 방문, 6월말 건옥의 전면 해옥, 5월 파동에 책임이 있는 업자에 대한 제재, 증권시장의 운영정상화를 지시 받았다. 6일 증협이사회에서는 전면 해옥을 결의하고 해합가격은 당시 시세의 3분의 2선으로 정해졌다.

 

이때 매도 측의 한 업자는 해옥에 반대하며 버티다가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해합이란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거나 매점 또는 투매로 시세가 급변한 경우 매매쌍방이 협의, 일정한 가격으로 매매계약을 원상 복귀시키는 것을 말하며 청산거래에서는 해옥이라고도 한다.

 

증권파동의 파급력 정치계까지 손뻗쳐

 

증권파동이 증권. 금융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전반에 일파만파의 충격을 던졌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6일 최고회의 제12차 본회의는 통화개혁에 따른 후속 긴급금융조치법을 통과시키는 한편, 송요찬 내각수반과 천병규 재무장관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에 따라 내각 전 각료도 일괄사표를 제출했다.

 

어쨌든 후임 내각수반을 빨리 인선해야 했으나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결국 박 의장의 내각수반 겸임 카드를 사용, 18일 저녁 최고회의는 새 내각을 승인했다. 경제기획원장에 김현철, 재무부장관에 김세련(金世鍊), 공보부장관에 이원우(李元雨) 건설부장관에 박임환(朴林桓) 등이었다.

 

그런데 대파동을 겪고 난 후의 증시는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대증주는 폭락행진을 거듭, 휴지조각이나 다름없게 됐고 파동은 다반사로 일어났다.

 

매수 측도 매도 측도 치명적 타격을 받은 상태에서 거덜난 투자자들은 악밖에 남지 아니하여 시위로서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당국과 거래소는 일관되게 증시의 정상화와 투기억제, 건전한 발전기반 구축에 혼신을 기울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영제 증권거래소로의 개편이었다.

 

그리고 1963년 4월 27일 공영제로 증권거래법이 개정되고 5월 8일 우선 금융단에 의한 3억원의 출자로 공영제 증권거래소의 개소식이 거행되기에 이르렀다. 국회보고서에는 이렇게 남아 있다.

 

“소위 5월 파동이라는 소요상태가 야기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고회의 재경위원 류원식 등을 설복 금융통화위원회로 하여금 수차에 긍하여 동 수도자금으로 합계 330억환을 한도외대출승인토록 강제통과 시켰고 또 5340명에 달하는 선의의 군소투자자들에게 사기행위로써 138억6000만환이라는 엄청난 돈을 손해 입혀 그들을 패가망신 내지 자살의 길로 몰아넣게 하여 사회의 혼란과 물의를 야기케 하는 등 혐의로서 이영근 등은 특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특례법 제2조 위반, 윤응상 서재식은 사기 업무상 횡령 배임죄 및 상법위반 증권거래소법 위반 류원식 등은 권리행사방해를 적용 1963년 3월 31일 육군보통군법회의에 송치되었으나 전원 무죄가 언도되고 검찰관의 불복공소에 대하여 사면령으로 면소판결되었다.”

 

류원식 등 15명은 모두 무죄로 풀려나 파동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유야무야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새나라자동차, 증권파동, 회전당구사건사건, 워커힐사건 등 4대 의혹사건으로 조성된 자금으로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흘러갔다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종필의 설명은 담담하다. 1986년 12월호 월간조선 기자와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공화당을 조직하는데 돈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습니다. 누군가 ‘4대 의혹사건’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거기서 돈이 흘러 들어갔다고 하는데 사실 조직단계의 돈은 내가 관장하고 있던 기관의 자금으로 썼습니다. 내가 이 말을 않고 있으니까 자꾸 협잡질해서 정당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맹세코 그런 돈이 흘러 들어왔는지 어땠는지 몰라요.”

 

[프로필] 이 국 영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 한은 은행감독원 은행검사역

• 전) 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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