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호에 이어서>
위조CD와 이희도지점장 사건 결말
상업은행 명동지점장 이희도씨 자살사건은 온 금융계를 냉각시켰다.
이지점장이 생전에 저지른 금융사고도 사고도 사고려니와 때마침 ‘가짜 양도성정기예금증서’까지 시중에 나돌아 한때 CD시장 마비 시중금리상승과 주가하락이라는 세 가지 악재까지 몰고 와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켰다.
상업은행 명동지점장 이희도 씨 자살사건으로 그동안 설마했던 은행의 사채조성사례가 사실로 확인됨에 따라 충격을 더해줬다.
자살과 가짜 CD사건간에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는 추측이 나돌면서 시중에는 ‘2000억원 금융사고설’이 설득력 있게 떠돌았다.
특히 인천투자금융이 상 업은행 명동지점에서 500억원어치 CD를 매입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파장은 다른 금융기관으로까지 확산될 기미를 보였다. 인천투자금융 측은 ‘당시 자금이 남아돌아 비교적 금리가 높았던 C D에 투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자금이 다시 빡빡해진 11월 중순까지 이를 처분하지 않고 자금을 묵혀둔데 대해 금융계에선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이 지점장에게 100억원의 CD를 매입한 롯데건설도 마찬가지였다.
대량의 가짜 CD발견으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CD유통시장은 완전 마비상태에 빠져들었다.
CD중개기관인 증권사와 단자사는 직원들을 각 은행에 풀어 보유 CD의 진위여부를 일일이 확인하는가 하면 고객의 요청이 있어도 CD중개를 거부했다.
이처럼 CD거래가 중단됨에 따라 기업의 자금압박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CD는 기업이 은행에서 대출 받을 때 ‘꺾기’용으로 떠안은 것이 대부분으로 기업들은 자금부담을 덜기 위해 매입즉시 유통시장에서 할인, 현금으로 바꾸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가짜 CD사건 이후 CD 거래가 중단돼 현금화가 안 되자 기업들은 자금흐름에 애로를 겪어야만 했다.
이 두 사건 이후 금융계의 관심은 또 1000억원이 넘는 사고금액이 누구의 수중에 들어가 있느냐에 온통 집중되었다. 일부는 미국으로 도주한 CD 위조범 황의삼 씨가 가로챘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나머지는 이지점장과 거래관계가 있는 사채업자에게 넘어갔을 것으로 금융당국은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지점장이 자기 집을 저당 잡히는가 하면, 2억~3억원짜리 고객예금까지 손을 댄 것을 보면 어디선가 구멍난 돈을 메우느라 마지막 순간까지 절박하게 몸부림친 사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사자가 숨을 거둔 데다가 관련사채 전주들이 잠적해버려 사건 전모를 캐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 사고로 1992년 12월 2일 김추규(金秋珪) 은행장, 전무이사, 감사는 사임하고 상무이사 정지태(鄭之兌) 씨가 전무이사로 승진한 후 행장대행체제에 들어갔으며, 직원에 대한 문책은 모두 16명으로 지점장, 차장 6명, 과장대우 7명, 행원 2명을 징계 조치했다.
한편 검찰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 사채업자 김기덕(金基德․43) 씨를 단기금융업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사채업자 김씨는 1990년 1월부터 재무부장관의 허가 없이 자살한 이 지점장으로부터 232억 9000여만원의 어음과 CD를 현금으로 교환해 주고 모두 4400만원의 부당이득을 본 혐의를 받고 있다.
정부가 허용한 양도성정기예금의 악용
양도성정기예금(CD)란 무엇인가?
정부는 1984년 6월 1일부터 시중은행, 외환은행, 지방은행에 양도성정기예금 발행업무를 허용하였는데, 이는 은행의 수신경쟁력을 제고하는 동시에 금리자유화의 여건을 조성하고 시중은행 유휴자금의 흡수를 촉진하기 위하여 일반정기예금예금에 비해 수익성과 환금성이 높은 양도성정기예금제도를 도입한다고 했다.
그러나 양도성정기예금증서는 도입한 취지와는 달리, 무기명으로 발 행되므로 고율의 이 자가 붙는 보증수표처럼 악용되었다. 무자원 선발행되는가 하면 은행이 대출거래처에 강제로 떠맡기는 보상계정(compensating balance) 즉, 꺾기의 도구로 사용되고, 예금증서 없이 수기보관증으로 교부되기도 하면서 은행의 거래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더욱이 점포별 수신목표 배정과 자율신고, 수신실적 위주의 인사관리와 영업점 평가, 금융기관 점포의 과다증설이 CD의 부당 발행을 증폭시켰다. 적응하지 못하는 은행원은 무능하게 보였다.
지하금융의 총아가 된 CD는 로비자금으로서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으로 진정한 분배, 정의구현을 저해하고 도덕성을 훼손하면서 온갖 횡포를 멈추지 않았다.
어쨌든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문민정부가 금융실명제를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발동하면서 양도성정기예금의 위세는 한풀 꺾이게 되었다.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교훈과 고통스런 상처를 남기고서.
한보사건와 정태수
1997년 1월 23일 한보그룹이 부도를 냈다. 이 부도사건은 곧바로 금융사고로 이어졌다. 한보사건. 1개 기업군이 부도를 냈는데 떠들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이 사건이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는가? 그 이야기를 열어보려고 한다.
부도처리 당시 한보의 부채는 제일은행을 비롯한 시중은행과 지방은행, 그리고 종금, 보험, 리스 제2금융권을 모두 합쳐 5조 8000억원에 달했다. 그렇다고 전액이 대손상각될 부채는 아니다. 은행권에만도 2조 6940억원의 담보가 있었다. 이처럼 자산과 부채를 따져보지도 않고 사건화 한 이유가 있다.
한보그룹하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1991년 2월 수서주택조합택지 특별분양사건이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 한보철강 부도사건은 1997년 쓸 대선자금 확보를 위한 특혜지원에서 불거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었다.
자민련 소속 정우택(鄭宇澤) 의원은 ‘검찰이 당진제철소(唐津製鐵所) 건설에 실제로 들어간 자금 규모를 3조 6000억원이라고 밝혔다면 한보철강에 대한 특혜대출금액과의 차액이 무려 1조 5000억원에 달한다. 이 중 상당부분이 정태수 회장 개인축재용으로 빼돌려졌겠지만 검찰발표와는 달리 적어도 4000~5000억원은 로비자금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기아부도사건과 함께 정부가 경제정책을 실기(失機)하여 IMF사태를 불러온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수수께끼의 재벌, 정태수는 누구인가?
그룹총수 가운데 정태수(鄭泰守․74) 한보 총회장(總會長)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인물도 드물다.
‘수수께끼의 재벌’, ‘녹지를 택지로 바꾸는 마술사’, ‘로비의 귀재’, ‘입이 무거운 사람’, ‘무속에 심취한 사람’, ‘결혼을 4번한 총수’, ‘큰손’ 등 다양한 별명을 얻으며 부침을 거듭하였다.
그는 1923년 경남 진주에서 빈농인 정용석 씨의 1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사정이 어려워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고 농사를 돕거나 노동자로 일하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그가 재계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제시된 이력서에는 최종학교가 한양대 산업대학원 1972년 졸업으로, 홍보실자료에는 1980년 한양대 산업경영대학원 수료로 돼 있다. 하지만 그는 사석에서는 ‘내가 정식으로 나온 학교는 고향 진주의 초등학교 뿐’이라고 말한다. 사실일 것이다.
6·25사변이 나던 이듬해 재무부가 주관한 세무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세무주사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년 앞서 1949년에는 첫 번째 부인인 김순자 씨와 결혼했다. 박봉의 공무원생활에 그럭저럭 가장으로서 집안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다 김씨가 1남 1녀만 남기고 결혼 10년만인 1959년에 세상을 떠났다. 장남 종근(宗根․43) 씨와 희자(사망) 씨가 그 소생이다. 그런데 항간에는 ‘김씨가 호적상으로만 사망했을 뿐 아직 살아 있다’, ‘큰어머니라고 불리는 할머니가 맏아들이 사는 아파트에 드나든다. 진주에 살고 있다’는 등 확인할 수 없는 소문도 있다.
두 번째 부인이 1966년 결혼한 ‘한보의 어머니’ 이수정(李受貞) 씨다.
“집사람은 사실 나하고 동업자이자 창업자야. 마누라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를 생각하기 어려워. 마누라가 모은 곗돈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니까.”
바로 정 총회장이 세무공무원을 걷어차고 사업을 벌일 때 최초 사업자금인 곗돈 100만원의 주인이다. 정 총회장은 이씨와의 결혼생활이 가장 고통스러우면서도 행복했던 시절로 떠올린다.
은마아파트가 분양이 안 되던 시절 ‘몸빼바지’를 입고 직접 노무자들의 밥을 지어 날랐고 자금난에 몰리자 사채시장을 돌아다니며 급전을 만들었던 이씨는 암으로 운명하기 직전까지도 회사법인의 인감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회사경영에 관심을 보였다.
이처럼 사업동지이자 반려자인 이씨가 고생만 하고 호강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자 정 총회장은 지극한 보상심리를 보인다. 우선 이씨와의 사이에 난 세 아들 원근(源根․35), 보근(譜根․34), 한근(澣根․32) 씨 중 보근 씨를 그룹회장에 앉혔다. 정 총회장은 보근 씨가 자신과 이씨의 사업가적 자질을 가장 잘 이어 받았다고 평소 말해왔다.
또 이씨의 장례와 묘소를 초호화로 차린다. 이씨가 안장된 곳은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왕길리 야산. 구릉하나를 차지한 채 김포의 넓은 들판을 바라보는 형태로 수서(水西)사건 때 호화분묘의 시비를 부르기도 했다. 묘역은 당초 허가면적이 149평이었으나 이를 한때 1000여평으로 늘리고 돌계단, 해태석상에 잔디진입로, 스프링클러까지 갖췄다가 지금은 묘지전역이 67평정도로 축소됐다. 묘소의 비석에는 ‘한보의 어머니…’, ‘죽은 아내를 생각하는 남편의 애틋한 사랑…’ 등의 글귀와 함께 새겨져 있다.
고급석재 애석(艾石)으로 만들어진 병풍석에는 ‘친애하는 정태수 사장’으로 시작되는 고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친서가 씌어 있고, 새마을사업에 5억원을 헌납해 전두환(全斗煥)전 대통령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는 내용도 적혀있다.
정씨는 이씨와 사별한 이듬해인 1984년 세 번째 부인을 맞는다.
이화여대 약대 출신으로 광화문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22세 연하의 이영자 씨(51)와 인연을 갖게 된다.
결혼식은 10월 12일 한일골프장에서 정·관·재계 인사들이 성시를 이룬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고 신현학(申鉉碻) 전 총리가 주례를 서주었다. 이씨는 주주총회, 그룹행사에 자주 모습을 보여 ‘여의도 사모님’으로 불렸고 1985년에는 정씨의 첫손자보다 7세나 아래인 딸을 낳았다.
그러나 잦은 병치레와 성격 차이로 결혼 1년 만에 정 총회장과 별거하다 1996년 합의이혼했다. 현재도 서울 여의도동에서 딸과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총회장은 셋째 부인 이씨와 협의이혼 한 달 뒤인 지난 1996년 8월 네 번째 부인을 맞는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최모씨(49)로 서울인근 사찰에서 가족, 친지들만 참석한 채 조촐하게 결혼식을 치렀다.
네 번째 결혼은 지난해 7월 유럽 출장 중 갑자기 눈병이 생기면서 재혼을 서두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이 때문에 평소 옆에서 지켜줄 사람이 필요한 데다 마침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결혼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네 명의 부인과 사이에 4남 2녀를 두고 있지만 이들 사이에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갈등은 없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얘기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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