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여러 은행을 뒤흔든 박영복의 사기행각
1972년 4월 하순경 중소기업은행.
을지로지점에 영창식품(永昌食品)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는 은행장실을 제 사무실처럼 드나드는 젊은 실업가 박영복(朴永復·39)과 관계된 회사인데 당좌대출 요청을 해왔기 때문에 본점에까지 올리게 되었다.
본점 심사부에서 심사를 하다 보니 퇴계로지점에서 이미 취득한 현대통상(現代通商) 대출담보물과 동일물건이 이 당좌대출신청서에 담보로 제시된 것이 아닌가? 그 담보부동산은 대구시 신청동 대지 895평. 이를 발견한 사람은 강동기 과장이었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융자를 알선한 박영복과 관계된 모든 대출담보에 대해서 등기부를 한번 열람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 해서 법무사를 시켜 열람케 되었다.
앞의 담보가 허위였다는 것이 밝혀짐은 물론, 다른 허위담보도 드러나 6억 5100만원이나 되었다. 즉시 은행장에게 보고되었고 은행장도 비로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4억 5800만원이라는 융자가 나가 있었다. 수출금융이 2억4000만원, 일반대출이 2억 1800만원이었다.
문제의 화근은 사고발견을 했으면 즉각적으로 은행감독원 또는 재무당국에 보고를 했더라면 일찍이 수습하여 손실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은행은 대외공신력을 생각해서 일체 보고를 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채권회수에 나섰다.
그래서 채권회수 및 정상화를 위한 제반조치를 강구하여 상환 2500만원과 추가담보 7900만원 등 모두 1억 400만원이 회수 및 담보가 보강되었다.
박영복과 관계된 대출을 깨끗이 회수하고 완결했더라면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지만 오물(汚物)은 덮는다고 냄새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은행감독원의 정기검사가 1973년 10월 10일 종로지점, 을지로지점, 퇴계로지점에 닥쳤다.
담보가 허위였다는 것이 발각되고 또 한국감정원이 감정한 것이 아니고 은행자체에서 했을 뿐만 아니라 과다감정사실도 적출되었다. 은행감독원 특별검사실 양재열 검사역이 이를 놓칠 리 없다. 이어서 본점 외국부로 검사가 확대되었다.
1974년 1월말 정우창(鄭遇昌) 행장이 사표를 썼고, 담당이사 및 감사도 동시에 사임하였다. 이 문제가 일단락 짓고 나니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서울은행에도 박영복 관계 대출이 있다는 것이다.
1974년 2월 서울은행.
거래기업인 남도산업 대표 손증수가 박영복과 인척관계라는 것이다. 은행장도 소문을 듣고 걱정이 되므로 검사부에 지시하였다. 곧 검사부 이종상(李琮相) 등 3명이 남도산업에 대한 대출금에 관하여 검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3월 4일 내국신용장 부당발급 사실을 적출되었으나 그때까지도 L/C가 위조됐다는 사실은 적발하지 못했다. 은행감독원은 서울은행 감사(監事)의 보고를 받고 3월 25일 특별검사를 실시하였는데, 여기서 비로소 위조신용장이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은행 비치분과 외환은행 비본과 대조한 결과 서로 일치하지 않음이 발견되었으며, 서울은행 검사결과 중소기업은행에서 발급한 박영복 관계회사의 수출신용장이 위조로 밝혀졌다. 그래서 남도산업 총무부장 박영오(朴永吾·26)와 서울은행 외국영업부 차장 김정수(金正洙), 대리 안영호(安煐鎬), 박수웅(朴秀雄) 관련자가 고발되었다.
경찰수사과정에서 박영복의 동생인 박영오가 신용장을 위조했고, 김정수 차장과 안·박 대리가 다시 손질해서 직속상급자를 속여 융자를 받게 해주었다고 실토했다. 이쯤되면 모든 신용장이 미심쩍어 보이게 된다. 은행감독원은 여타금융기관에 대하여 모든 신용장을 조사할 계획을 세웠다.
우선 급하게 되었으므로 전 금융기관에 지시하여 박영복 관계 홍콩의 UCB발행 수출신용장과 수출금융명세를 모두 받아서 조사한 결과 기타 2개 은행에도 위조신용장이 있음이 발견되었다.
은행을 전전한 경로를 보면 1971년에는 한일은행에서, 1971년부터 1972년에는 중소기업은행 퇴계로, 종로, 을지로지점, 외국부를, 1972년부터 1973년에는 서울은행 외국부, 1973년에 들어서는 외환은행 광화문지점, 농협 외국부, 신탁은행 외국부, 주택은행를 돌아 다녔다.
박영복 그는 누구인가
그의 고향은 경북 군위(軍威). 대구국민학교, 대륜고교를 마친 그는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해운공사에서 선원으로 5년간 근무했다. 이 시절 사교술로 이름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 후 박영복이 손을 댄 것은 무허가 벌목이었다. 이때부터 사기성이 발휘되었고, 큰소리를 치며 한동안 재미를 보았다.
물론 그 후 꼬리가 잡혀 29일간 구류를 살았지만.
그가 기업에 뛰어든 것은 1966년 중앙합동 전무로 발을 디디면서부터였다. 이 회사는 토건회사로 등기돼 있지만 광주천공사를 하청 받기 위한 유령회사였다.
박영복은 당시 맨손으로 29억원짜리 광주천복개공사를 하청 받기 위해 당시 전남지사의 대학동창인 배일태 씨를 소개 받아 접근했다. 지사에게 귀띔만 해주면 2000만원을 주겠다고 꾀었다. 그리고 그는 친구를 통해 광주에 있는 토건업자 김광필 씨를 소개받았다.
이때 김 씨는 몇 차례 공사에 실패한 터에 전남지사와 막역하다는 박영복이 나타나자 있는 돈 없는 돈을 긁어모아 그에게 매달렸다.
한편 배일태 씨는 동창생인 전남지사를 찾아갔다가 유력한 기존회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박영복에게 전했다.
며칠이 지나자 박영복은 중앙합동이라는 토건회사를 설립했다며 사장에 광주의 김광필 씨를, 이사에는 배일태 씨를 앉혔다. 그리고 박영복은 전무가 되었다.
배 씨는 중앙합동의 등기서류를 들고 지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지사는 “사장 김광필 씨는 소문난 부실업자로 도저히 공사를 맡길 수 없다”고 했다. 곧 배씨는 이사직을 사임하고 손을 뗐지만 박영복은 아직도 희망이 있다면서 토건업자 김 씨로부터 교제비조로 돈을 뜯어냈다.
1967년 3월 박영복은 서울 마포경찰서에 사기혐의로 구속됐지만 곧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그는 은행융자의 허점을 재빨리 간파했고 엉터리 땅을 담보로 제공, 수억원을 은행으로부터 부정융자를 받은 고정훈(高貞勳) 사건의 배후인물로 솜씨를 발휘했었다.
그 후 그는 사채로 10억원을 끌어 모아 이 은행 저 은행에 예금을 하고 옮기기도 하면서 은행원을 손아귀에 넣기 시작했다. 재벌답게 호유(豪遊)도 즐겨 애인도 여럿 있었고 술집에서 접대부에게 뿌리는 팁도 5만에서 10만원씩 손이 잡히는 대로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집도 3채를 마련하여 본래 살던 집은 아내와 2남2여 가족이 살고 다른 한 채는 비밀서류 등을 보관해 두는데 썼고, 또 한 채는 애인의 살림집으로 썼다고 한다.
물론 호사가가 만들어 낸 말이 꼬리를 물고 커갔다고 볼 수도 있으나 은행의 높은 문턱을 자유롭게 넘나든 행각으로 보아 짐작할 만 하다. 이 같은 행각에서 그는 다섯 차례나 수사를 받기도 했다.
1967년에는 사기혐의, 1970년 감금혐의로, 1971, 72년에는 모피위장수출로 관세법 위반 혐의, 1973년에는 사기혐의로 수사를 받았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무혐의 또는 무죄로 풀려나왔다.
박영복은 어떠한 방법으로 융자사기행각을 벌였는가.
그는 먼저 회사를 신설해서 먼저 최소한의 무역업자자격을 갖추어 놓거나 수출실적이 있는 기존무역회사를 인수하였다.
이렇게 설립 또는 인수한 기업이 18개나 되었다. 그리고 사채시장에서 돈을 빌려다가 은행이 예금유치에 급급하다는 실정을 이용해서 지점장을 찾아가 무역회사 사장임을 자처하고 먼저 2000만원, 경우에 따라 4억원 내지 5억원정도의 예금을 해주고 은행거래를 시작하였다.
예금유치에 고심하는 은행에 대하여 계속 예금을 유치해 주고 어느 정도 신용을 얻었다. 그래서 지점장들이 “예금 좀 해줄 수 없느냐?”하면 “걱정 말라”하고, 즉석에서 전화를 걸어 거액의 예금을 입금시켜 주었다.
그에 대한 신용이 두터워진 뒤 무역금융 기타 자금의 융자를 요구하였는데 최초에는 예금액에 비하여 소액의 대출만을 요구하였고 정상담보를 제공한 다음 대출을 받았다. 정상적인 신용장으로 무역금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수출도 정상적으로 이행하였다. 이렇게 지점장을 비롯한 은행원들을 충분히 현혹시키고 나면 박영복 관계회사를 건실한 기업으로서 모범거래처로 선정하게 되고, 허위담보물을 제공하여 거액융자를 받고 위조신용장으로 무역금융도 받았다.
박영복은 등기소장을 했던 김용환(金容煥)과 결탁해서 부동산권리증을 위조하였다. 공모를 해서 1971년 10월부터 1972년 4월까지 6회에 걸쳐 중소기업은행에서 융자를 받았다.
그런데 여기에 은행에서 실수가 있었다.
원래 은행은 근저당권설정등기를 할 때에는 그 지점의 지정법무사가 아니면 맡기지 않는다. 그러나 경력이 많은 은행원도 박영복의 말에 넘어갔다.
“그럴 것이 없지 않느냐. 이것이 지방에도 갔다 와야 되고 여러 가지 경비도 나고 하니까 내가 다 해주면 경비도 절약되고 신속할 테니 나에게 맡겨라.”
그 후 그 직원도 후회하면서, “30년내 처음 그런 짓을 했습니다”며 실수를 실토하였다.
박영복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미 정당하게 20통 가량의 등기부등본을 받았는데 그 등본의 말미만 남기고 표제부(表題部) 소유권표시난인 갑구부(甲區部), 담보표시난 을구부(乙區部)를 위조해서 은행에 제시했다. 그래서 이것이 은행으로 하여금 정당히 작성된 등기서류로 오인케 하여 4억원 가량을 대출 받았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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