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이 대량 생산된 캐쥬얼이라면, 신탁은 개인형 맞춤옷과 비슷하다. 둘 다 위험을 주제로 한 상품이지만, 신탁 속에는 더욱 다앙햔 개인의 삶과 모습을 담아낼 수 있다. 신탁이기에 장애인·미성년자·범죄 피해자 후견 문제, 고령자가 노후나 치매 대비도 ‘맞춤형’으로 설정할 수 있다. 초고령화, 저출산 사회에 근접할수록 신탁은 개인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컨설턴트로도 변화하고 있다.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로부터 실제 경험한 사례를 제공받아 신탁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봤다. /편집자 주 |
(조세금융신문=고승주 기자) 부모는 자녀의 기둥이지만, 갑작스러운 변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건축업을 하는 40대 A씨는 이른 이혼으로 6살 난 딸과 A씨의 부모님,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하루하루 지내던 중 A씨는 어느 날 벼락같은 불치병 선고를 받게 됐다. 이젠 뒷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A씨 일가가 사는 집은 A씨가 직접 지은 집. A씨는 자신의 손때가 묻은 이 집만은 온전히 딸에게 남겨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A씨는 미리 준비를 마쳐둔 상태였다. 이혼한 아내가 갑자기 친권을 주장할 것에 대비해 유언장에 후견인을 조부모로 정해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모은 현금은 딸의 양육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액 부모님께 드릴 수 있다고 의사를 전했다. 다행히 A씨 부모는 연금생활자라 생계가 어렵지는 않았다.
A씨가 물려주려고 한 집의 공시지가는 2억원 초반 수준으로 A씨가 물려주려는 현금보다도 적은 수준이었다.
신탁회사는 이 정도 준비했으면 큰 문제가 없을 텐데 하면서도 A씨의 의사에 따라 신탁을 맺었다.
계약서 서명이 끝나자 A씨는 사정을 털어놓았다. 원인은 미혼의 남동생이었다. 남동생은 수 차례 사업실패를 겪었고, 생활이 불안정했다.
만일 남동생이 사업 명목으로 부모님께 손을 벌리다가 집까지 손을 대면 딸의 미래가 흔들릴 수 있었다. A씨는 그것만은 꼭 해결하고 싶었던 것이다.
범죄피해 아동의 보호 영역에서도 신탁이 활용된다면 다소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이미 중요한 수단으로 주목받는 일이다.
엄마의 남자친구로부터 14세 소녀 B양이 성적 학대를 받은 가슴 아픈 사건이 있었다.
친부는 이혼한 지 오래였고, 양육비도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 매정한 모친은 자녀를 학대했고, 무방비하게 놓여진 자녀를 보호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각은 학교 선생님에게 발각됐다. 이후 엄마의 남자친구는 구속됐고, 법원에 3000만원을 피해보상금으로 공탁했다.
문제는 모친이었다. 모친은 한 차례 경찰수사를 응한 후 잠적하고 있다가 피해보상금 공탁 후 갑자기 나타나 친권자로서 공탁금을 받을 방법을 법원에 문의한 것이었다.
우리 법에서는 2014년 아동학대와 관련된 처벌을 강화하고, 2016년에는 부모의 학대행위로부터 친권을 제한하는 법안이 마련됐다.
법원은 모친이 친권자라는 이유만으로 피해보상금을 찾아가지 못하도록 했다. 나머지는 나중에 B양이 성인이 될 때까지 누가 관리하다 넘겨주느냐 였다.
신탁회사는 B양의 피해보상금을 운용하다 성년이 된 후 넘겨주도록 계약을 맺었다. 신탁회사와 B양의 변호사에게 이익이 되는 거래는 아니었지만, 둘은 B양을 위해 기꺼이 해당 계약을 맺었다.
현재 피해보상금 관련 신탁은 다양한 영역의 보상에서 활용된다.
2017년 4월 서울가정법원은 여덟 살의 세월호 피해 유가족 C양에게 지급돼야 할 보상금, 국민 성금, 보험금 합계액 15억원을 신탁회사에 맡기는 것을 허가했다.
C양의 임시후견인이 된 친척은 C양이 그 돈이 안전하게 관리되길 바란다며 법원에 청구했고, 신탁회사는 C양이 충분한 성인이 될 때까지 매월 생활비를 지급하며, 만 25세와 만 30세 두 차례에 나누어 신탁재산을 전달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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