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이 대량 생산된 캐쥬얼이라면, 신탁은 개인형 맞춤옷과 비슷하다. 둘 다 위험을 주제로 한 상품이지만, 신탁 속에는 더욱 다앙햔 개인의 삶과 모습을 담아낼 수 있다. 신탁이기에 장애인·미성년자·범죄 피해자 후견 문제, 고령자가 노후나 치매 대비도 ‘맞춤형’으로 설정할 수 있다. 초고령화, 저출산 사회에 근접할수록 신탁은 개인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컨설턴트로도 변화하고 있다.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로부터 실제 경험한 사례를 제공받아 신탁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봤다. /편집자 주 |
(조세금융신문=고승주 기자) ‘아이보다 딱 하루만 더 살고 싶어요.’
발달장애 자녀를 둔 A씨의 유일한 소원은 자녀가 자신보다 먼저 떠나는 것이다.
아들이 성인이 됐지만, 일하거나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등 사회성을 기르는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다.
A씨의 전 재산은 먼저 세상을 떠난 배우자의 사망보험금과 미리 사둔 오피스텔 정도. 그나마도 배우자의 부모님이 사망보험금 중 일부를 요구하고 있어 어려움이 크다.
하지만 A씨는 자녀보다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A씨의 사례처럼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떠난 후 자녀가 조금이라도 어려움을 겪지 않고 생활하길 바란다.
장애인 신탁은 이러한 경우 장애 자녀를 위한 생활보장 수단이 되고 있다.
생전에는 생활비와 의료비를 신탁수익 등을 통해 지급하고, 이 재산이 친인척에 의해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현행 법에서는 장애인 신탁 활성화를 위해 5억원까지 비과세를 적용한다.
조건은 증여재산은 금전·유가증권·부동산일 것, 증여재산을 전액 신탁업자에게 신탁할 것, 장애인이 신탁 이익 전부를 받는 수익자일 것, 장애인이 사망할 때까지 신탁 기간이 유지될 것 등이다. 이러한 조건을 지키지 않을 경우 국세청은 즉각 과세처분에 나선다.
최근 들어 국내 장애인 신탁 관련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
과거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신탁 원금의 중도인출이 불가능했다. 2020년부터는 ‘중증장애인 본인의 의료비·특수교육비 지출’ 외에도 신탁수익이 최저 월 생계비 150만원에 미달할 경우 미달 부분을 원금에서 채워서 인출할 수 있게 했다.
부동산이 주요 재산이라면 부동산 임대수입을 자녀 생활비로 쓸 수 있게 하고, 부모 사후에 자녀에게 재산이 넘어가는 구조로도 만들 수 있다.
장애인 신탁의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그룹홈 지킴이 신탁이다.
그룹홈 시설장이 시설에서 사는 발달장애인들의 통장에서 돈을 빼돌린 사건이 적발됐다. 통장관리가 어려운 장애인들의 통장을 시설장이 일괄 관리하기 때문이다.
신탁은 생활비만이 아니라 미래 자립을 위한 소중한 종잣돈이 시설장의 주머닛돈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통장 관리 권한을 신탁에 부여하고 자금 지급 시 엄격한 통제를 통해 타인의 횡령에서 손을 못 대게 하는 것이다.
장애인 신탁과 관련 최근의 과제는 공공부조의 역할이다.
정부는 장애인에 대해 기초생활을 보장하는 공공부조 기능을 가동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 등 친인척이 도와주는 금액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공공부조를 끊는다.
부모나 친인척이 공공부조를 작게 생각할 정도의 큰 부자라면 문제없겠지만, 재산이 중산층 중하층 등 아슬아슬하게 공공부조 지원 영역에 걸쳐 있는 부모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자신이 도와주면 자녀가 나라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단절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발달장애나 뇌병변 장애 등의 경우 장애가 평생 진행되는데 부모나 친인척이 어설프게 도와주었다가 이들이 세상을 떠나고 재산이 고갈되는 동안 자녀가 공공부조를 받는 다른 장애 자녀보다 더 어려운 생활을 겪을 수 있다.
이에 따라 사회복지학계에서는 특별수요신탁(Special needs trust) 등을 제시한다.
발달장애처럼 평생동안 지원이 필요한 영역은 부모의 부와 관계없이 공공부조를 해주고, 가족의 지원은 보조적으로 신탁을 통해 지원하고, 혹여 장애 자녀가 생애를 마감하는 순간 신탁재산이 남을 경우 해당 재산을 공공복지 영역의 재원으로 돌려 복지의 선순환을 갖추자는 취지다.
미국과 영국 등 일부 선진국에서 도입된 이 제도는 안타깝게도 크게 논의가 활성화되고 있지 않다.
사회전반적으로 보편적 공공부조보다는 선별적 공공부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기조가 강하기 때문이다.
사회복지학계에서는 개인이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고, 이를 공공부조가 지원하는 것이라면 평생 장애라는 큰 위험을 겪는 이들에 대해서는 보편적 복지를 주로 하고, 민간의 영역은 보조적, 지원적 역할로 돌려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다.
부자라도 그 부가 영원하지는 않고, 자신의 사후 재산이 사라질 수도 있으며, 이러한 위험은 오로지 국가의 영역에서만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특히 계약종료 후 신탁재산을 국가에 기부해 선순환을 낳아야 한다고 전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발달장애 등 특정 장애인들은 위험이 평생 지속되고, 일반인보다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현재 공적부조 시스템은 여전히 개인에게 그 부담을 더 많이 지우고 있다”라며 “공공부조의 보편화, 민간영역의 보조화를 통해 사회복지시스템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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