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가계대출 총량 관리에서 전세대출은 사실상 '성역'이었다. 실수요라는 점에서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민심의 역린을 건드릴 수 있다.
하지만 전세대출을 느슨하게 관리하는 사이 이를 이용한 주택 갭투자가 활개를 쳤고 결국 가계부채 급증과 집값 급등을 부채질했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는다.
가계대출과 전쟁을 선포한 금융위원회는 고심하고 있다. 전세대출을 틀어막았다가는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부담스럽고, 이를 방치했다가는 가계대출 총량 관리의 최종 타깃인 집값 안정에 구멍이 뚫린다.'
◇ 가계부채 대책에 전세대출 포함하나
가계대출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고승범 금융위원장의 말이 미묘하게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 때문에 전세대출 규제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던 고 위원장이 손을 대겠다는 쪽으로 입장이 이동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고 위원장은 지난 10일 금융지주회장단과의 간담회 후 취재진과 만나 전세대출 규제와 관련 "정해진 바 없다"고 했다. 그는 "실수요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라며 "전세대출은 실수요자가 많으니 여건을 보면서 다시 한번 들여다보겠다"고 했다.
지난 16일 금융업협회장 간담회 때도 가계부채 총량 관리로 실수요자가 피해를 본다는 지적에 대해 "집단대출, 전세대출, 정책모기지가 많이 늘고 있는 데다 실수요와 관련된 대출"이라며 "전세대출과 집단대출(중도금대출) 모두 실수요자가 피해 보지 않도록 계속 검토하겠다"라고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 위원장은 '들여다보고는 있으나 방향이 정해진 것은 없다'는 스탠스였다. 이 때문에 시장 일각에서는 다음 달 나올 가계부채 대책에 전세대출 규제는 포함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27일 경제·금융시장 전문가 간담회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여러 가지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면서 "전세자금 대출은 실수요와 연결된 측면도 있고 전세대출의 여러 조건이 좋다 보니 많이 늘어나는 부분도 있어서 종합적으로 보겠다"고 밝혔다.
"실수요자가 피해 보는 것은 피해야 하니 신중히 고려하겠다"는 사족은 달았으나 '전세대출의 조건이 좋아 많이 늘어난 부분이 있다'는 언급은 이에 대한 대책을 검토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미 가계대출 비중이 큰 KB국민은행은 행동에 나섰다. 이 은행은 29일부터 한시적으로 전세자금 대출 한도를 '전셋값 증액 범위 내'로 줄였다. 예컨대 전세 보증금이 4억원에서 6억원으로 오른 경우 지금까지는 최대 80%인 4억8천만원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증액된 2억만 받을 수 있다.
금융계 관계자는 "최근 은행권의 움직임은 금융위가 이미 전세대출 규제에 발을 내디뎠다는 것을 시사한다"면서 "다음 달 대책에 어느 정도의 강도와 범위로 규제책이 나오느냐가 관건"이라고 했다.
◇ 가계대출 증가 주도한 전세대출
금융위의 고심은 전세대출이 실수요자 대출이긴 하지만 이 상태로 놔두고는 가계대출 총량 관리가 어렵다는 데 있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전체 금융권의 가계대출 증가율은 5%가 넘어 금융위가 제시한 마지노선인 6%의 턱밑에 육박했다. 연말까지 남은 4개월간 금융권이 대출을 사실상 동결하지 않을 경우 총량 관리 목표 달성은 어렵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의 가계대출은 8월 말까지 4.28% 증가해 이달 중 증가율이 5%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금융권은 이미 신용대출은 물론 부동산담보대출 가운데 집단대출(아파트 중도금 대출) 등은 한도를 대폭 축소하거나 중단했다. 문제는 전세대출이다. 5대 은행의 경우 지난 8월 말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493조4천148억원으로 작년 말보다 4.14%(19조6천229억원) 증가했는데, 이 기간 전세자금 대출잔액은 105조2천127억원에서 119조9천670억원으로 14.02%(14조7천543억원)나 불어났다. 주택담보대출 증가액의 75.1%, 전체 가계대출 증가액(28조6천610억원)의 51.5%를 각각 차지했다.
서영수 키움증권[039490] 은행 담당 애널리스트는 "지난 2015년 말에서 작년 말까지 5년간 금융권 전체의 전세대출 잔액은 40조원에서 153조4천억원으로 283.5% 증가했다"고 했다.
이처럼 전세대출이 급증했지만, 금융위는 지난 7월 1일부터 시행된 개인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40% 적용 대상에서 전세대출은 제외했다. 투기 수요가 아니라 실수요라는 이유에서다.'
◇ '실수요' vs '자산버블 주범' 논란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전세대출의 용도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전세대출이 실수요성 대출이라거나 주택 가격이 급등하는 바람에 전셋값이 올라 자연스럽게 전세대출이 많이 늘어난 측면이 있다는 점에 이견은 없다.
KB부동산 리브온에 의하면 실제 8월 전국 주택 전셋값은 1년 전보다 11.28% 올랐고, 아파트 전셋값은 13.69% 뛰었다. 수도권의 경우 이 기간 전국 주택 전세가는 14.40%, 아파트 전셋값은 17.77% 치솟았다.
하지만 전세대출이 주택 구매나 주식 투자 등 다른 용도로 상당 부분 전용되면서 자산 시장의 버블을 키웠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전세대출을 한도껏 받은 뒤 일부만 전세대출에 쓰고 나머지는 주택 갭투자나 주식, 코인 등 투자로 돌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서영수 애널리스트는 "작년까지 5년간 주택 전셋값은 30% 올랐는데 전세대출은 283% 증가했다"면서 "이는 상당 부분 받지 않아도 될 전세대출을 받아 주택 구입이나 주식 매입 등에 투자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했다.
전세대출 금리는 일반적으로 일반 주택담보대출보다 낮아 세입자 입장에서는 일단 받고 보자는 분위기가 있고, 은행 입장에서는 공공기관인 한국주택금융공사나 주택도시보증공사 등 공적 기관이 90% 이상 보증을 해주기 때문에 떼일 염려가 없다는 점에서 대출을 방만하게 늘린 측면이 있었다. 이런 모럴해저드를 지금까지 금융당국은 방치했다.
서 애널리스트는 "현재 전세대출의 보증 한도는 90∼100%인데 이를 50% 이내로 줄여야 한다"면서 "이렇게 되면 은행들이 차주의 신용도에 맞춰 대출 한도나 가격(이자)을 결정할 수밖에 없어 자연스럽게 대출 규모가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가계대출이 문제 된다면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이라는 정공법을 써야 하고, 집값 급등이 문제라면 공급으로 해결해야 한다"면서 "전세대출은 실수요자 대출인데다 옥석을 가리기 쉽지 않은 만큼 이를 규제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은 "전세대출이 여러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자칫 옥석구분 없이 대출을 막았다가는 무주택 실수요자들을 월세로 내몰 위험이 있다"면서 "실수요자 보호나 월세 자금 지원 등 충분한 무주택 서민층의 주거 안정 지원책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