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정욱 기자) 서울 임대차 시장이 근본적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올해 들어 정부의 규제 강화 기조와 금융권의 연말 대출 총량 관리가 동시에 강화되면서, 전세라는 제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전세가격 상승이나 일시적 매물 부족을 넘어 전세를 선택할 조건 자체가 무너지는 ‘전세 선택권 붕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세입자들은 원치 않아도 월세로 이동하는 흐름에 내몰리고 있다. 시장의 움직임이 수요와 가격이 아니라 규제 강도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 같은 흐름은 개별 지역이나 특정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이라는 초대형 시장 전체가 규제 중심 구조로 옮겨가는 전환기에 접어들었음을 뜻한다. 시장 수요의 자연스러운 이동이 아니라 정책적·제도적 장치가 시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파급효과는 더욱 크다는 평가다.
◇ 대출 창구 동시 차단
4대 시중은행(KB·신한·하나·우리)은 11월 중순부터 주택담보대출 취급을 사실상 멈추기 시작했다. 금융당국이 제시한 가계대출 증가율 관리(총량규제) 목표가 연말을 앞두고 한계치에 근접했고, 은행들은 목표를 초과할 경우 감독 강화를 받게 되기 때문에 스스로 대출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 조치는 단순히 신규 주담대를 줄이는 수준이 아니라, 소득·신용이 충분한 실수요자까지 시장 진입이 불가능한 환경을 만든다. 기존에는 대출 규제라 하더라도 일정 수준의 심사가 가능했지만, 올해는 ‘창구 자체가 닫힌 상태’에 가까운 수준으로 제한이 이뤄지고 있다.
전세대출 역시 동일한 흐름을 따른다. 소유권 이전 조건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은행에서 전세대출 신규 취급이 사실상 불가해졌고, 이는 전세시장 전체의 기반을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전세 제도는 보증금 기반의 담보부 대출 인프라 위에 서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전세대출이 막히는 순간 전세 제도 자체가 기능을 잃게 된다.
내년 1월 대출 총량이 재설정되면 일정 부분 대출 여력이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매년 연말마다 비슷한 현상이 반복될 경우, 서울 임대차 시장은 해마다 마지막 분기에 구조적 충격을 맞고 연초 이후 회복기를 거치는 비대칭적 시장으로 고착될 우려가 있다.
◇ 사라진 전세 선택권
전세시장은 올해 들어 두 가지 측면에서 동시에 붕괴를 맞고 있다. 첫째는 전세 매물의 절대적 부족, 둘째는 전세대출 중단으로 인한 접근성 붕괴다.
서울 주요 지역에서 전세 수급지수는 100을 넘어섰고, 일부 인기 지역에서는 110~120 수준까지 올랐다. 이는 전세 공급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런 수급 불균형은 단순히 전세 수요 증가 때문이 아니라, 전세대출 중단으로 전세를 선택하는 실수요자의 구조가 붕괴한 데 따른 측면이 더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인만 부동산경제연구소장은 전세 선택권 붕괴를 이렇게 설명한다.
“전세가 좋아서 찾는 게 아니라, 지금은 전세 자체가 없습니다. 전세 매물도 적고 전세대출도 총량 규제로 막혀 사실상 연말까지 나오기 어렵습니다.”
서울 거주 30대 여성 A씨 역시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는 “집값이 오르고 대출 규제가 강화된다는 소식을 듣고 은행을 찾았지만 대부분 시중은행에서 신규 대출은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며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전세도 고려하고 있지만 수요가 몰리다 보니 전세 매물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의 대출 규제로 무주택 실수요자들의 고충만 더 커진 것 같다”고 토로했다.
전세를 통한 거주 안정성을 선호하는 세입자들은 여전히 많지만, 전세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이 차단되면서 전세 시장은 사실상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이 같은 전세 선택권 상실은 사회초년층·중산층·신혼부부·고령층 등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대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중산층은 대출 없이는 전세 보증금을 맞추기 어렵고, 2030세대는 애초에 대출 없이는 전세 진입 자체가 힘들다. 고령층 역시 기존 보증금 회수 지연 등으로 전세 선택지가 크게 줄어든 상태다.
◇ 전세 불능이 만든 ‘강제 이동’
전세시장 기능이 약화되면서 월세로의 이동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시장의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 전세를 선택할 수 없어서 생긴 ‘강제 이동’에 가깝다. 세입자들은 전세의 장점과 월세의 부담을 비교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로 진입할 수 있는 구조가 사라졌기 때문에 월세로 이동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서울 월세지수는 역대 최고 수준을 지속적으로 경신하고 있으며, 월세 상승은 강남·서초·송파·용산 등 주요 지역뿐 아니라 중저가 지역에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전세 수요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전세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막히면서 그 수요가 월세로 밀려난 것이다.
월세 비중이 높아질수록 세입자 부담은 더욱 커진다. 매달 지출이 늘고 보증금 반환 지연이 반복되면 장기적 주거 불안도 확대된다. 월세 계약은 협상력에서도 상대적으로 불리해 세입자의 조건 선택권이 떨어지고, 이는 생계비 구조 전반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김 소장은 “전세대출이 막히니 세입자들이 전세로 진입할 수 있는 구조 자체가 무너졌다”며 “세입자들이 월세를 원해서가 아니라, 전세가 안 되니 월세로 밀려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 서울 임대차 순환 구조가 뒤집혔다
서울 임대차 시장의 가장 큰 변화는 순환 구조가 뒤집혔다는 점이다. 기존 시장에서는 매매가 어렵거나 부담될 경우 전세로 이동하고, 전세가 어려우면 월세로 이동하는 순차적 흐름이 존재했다. 이는 가격과 수요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뤄지던 시장의 기본 원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 순환이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다. 매매 시장은 대출 중단으로 진입 자체가 어렵고, 전세 시장은 전세대출 중단과 매물 부족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매매와 전세라는 두 단계가 모두 막힌 채 월세만 남는 비정상적인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시장의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니라 규제로 인해 선택지가 차단되면서 발생한 역전 현상이다.
김 소장은 이를 “시장 스스로 만들어낸 흐름이 아닌, 정책과 대출 제도의 변화로 인해 만들어진 구조적 이동”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구조가 지속될 경우, 서울 임대차 시장은 경제 여건이나 수급 요인이 아니라 금융 규제의 시점과 강도에 따라 움직이는 비정상적 시장으로 고착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전세가격·월세가격뿐 아니라 가계부채, 주거비 부담, 주거 이동성 등 다양한 경제지표에도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서울 임대차 시장은 전세 실종, 월세 강제 이동, 순환 구조 역전이라는 세 가지 변화를 동시에 겪고 있다. 전세대출 중단은 전세 선택권 자체를 무너뜨렸고, 이는 세입자가 월세를 선호해서가 아니라 전세로 진입할 수 없어 월세에 머무르게 되는 구조적 변화를 낳고 있다. 시장은 더 이상 수요와 가격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며, 대출 규제의 강도에 따라 임대차 흐름이 결정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구조가 반복될 경우 서울 임대차 시장의 안정성이 크게 약화될 수 있다며 정책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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