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고승주 기자) 김창기 국세청장이 취임 후 첫 전국세무관서장 회의에서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정치의 언어를 꺼내들었다.
관서장 회의는 전국 지방국세청장, 세무관서장, 해외 주재관들을 전원 소집, 도열해두고 국세청장이 직접 육성으로 하달하는 자리다.
역대 국세청장들은 사자성어를 통해 은밀한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줄탁동시는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병아리와 어미 닭이 안과 밖에서 함께 쪼아야 한다는 말인데 송나라 시기 선종(禪宗)의 대표적인 불서인 벽암록(碧巖錄) 공안집(公案集)가 출처다.
줄탁동시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나온다.
유가에서는 율곡이이의 합심과 맞닿아 있고, 불가에서는 선학과 후학 간 깨달음의 공시성을 뜻한다. 정계에서는 다른 뜻을 품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 말을 잘 사용하기로 유명한 정치인은 단연 고 김종필 전 총리다.
호남, 영남, 충청이 혼조세를 보이던 1997년 대선 정국시기. 김종필 전 총리는 자신의 후원조직 민족중흥회 회보 신년휘호의 머릿말로 줄탁동기를 꺼내들었다.
당시 대선에서 충청 후보로 나온 김종필, 호남 후보로 나온 김대중 두 인물이 독자생존으로 갈 경우 둘 다 패망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김대중, 김종필, 둘의 관계는 파트너여야 했고, 서로가 서로를 강제할 수 없었다. 김종필 전 총리가 건넨 줄탁동기는 합심의 메시지였다.
김종필 전 총리는 줄탁동시 네 글자 중 ‘때 時’ 대신 ‘기미 機’를 썼다. '시'를 쓰나 '기'를 쓰나 본 뜻은 같지만, 그는 '기'를 씀으로써 기회, 행동을 강조했다.
김대중 후보는 이를 받아들여 행동에 나섰다. 그리고 2년 후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DJP연합 결성, 김대중 제15대 대통령 당선에 이른다.
김종필 전 총리가 마지막으로 줄탁동기를 언급한 것은 그로부터 20년 후인 2017년 4월 대선 정국으로 알려진다.
2017년 3월 보수진영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사분오열됐고, 연립 권력들은 각자도생에 나서며 서로 다른 목소리를 냈다. 대선 패망이 분명해보이는 상황에서 변방에 있던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보수 진영 대표선수가 됐다.
김종필 전 총리는 2017년 4월 예방한 홍준표 대선 후보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파들이 꼭 결집을 해서 대통령이 되어라. 대통령이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이 있다. 하늘의 뜻과 다 맞아야 한다. 꼭 대통령이 되어서 좌파들이 집권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2017년의 줄탁동기는 1997년의 줄탁동기와 달랐다. 말이야 홍준표 후보에 했지만, 속뜻은 사분오열된 보수진영 전체에 던진 말이었다. ‘흩어지면 패망한다.’ 보수진영 원로로서의 경고 메시지였다.
김창기 국세청장의 줄탁동시도 경고로 기울어져 있다.
“국세행정의 발전과 혁신을 위한 우리의 노력도, 2만여 국세공무원의 지혜와 역량을 한데 모으지 못한다면,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역대 국세청장들과 비교하면 국세청장으로서는 굉장히 보기 드문 직설적인 화법이다.
국세청장들은 에둘러 말하거나 독려를 위해 사자성어를 써왔다. 국세청이라는 팀의 감독으로서 그가 느끼는 위기 의식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방증한다.
고물가 등 외부 위기를 강조하는 것으로 들을 수도 있긴 한 데 내부 합이 잘 맞지 않는다고 들릴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위태롭다. 게다가 그는 정권 첫 국세청장이며, 첫 고위직 인사를 통해 주전선수 엔트리를 마쳤다.
감독이 지시는 하지만, 공은 선수들이 찬다.
선수들의 생각이 다르다면, 플레이가 어긋난다. 팀웍도 흔들린다.
지금 팀웍이 유지될지, 새로운 팀웍이 필요하게 될지.
지시는 내려졌고, 공은 선수들 발 앞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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