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김종규 논설고문 겸 대기자) 한마디로 세금을 정의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제격이다. 그래서인지 세금 때문에 살겠다는 사람은 없다. 2016년은 사세청에서 독립, ‘국세청’이름으로 개청한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그간 척박한 조세환경 속에서 일구어 낸 금쪽같은 족적(足跡)들은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눈부시다. 반면 억장이 무너지듯 납세국민으로부터 엄청난 신뢰추락 탓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상흔은 함께 지우고 가야할 문제덩어리다. 조세금융신문(월간 금융조세)은 이에 국세청의 미래 50년을 흔들리지 않고 튼실하게 이끌어갈 방향성을 찾아보고자 지난 반세기 국세행정을 재조명해보는 기획시리즈 특집을 제작보도하기로 했다. 정녕, 해묵은 과(過)를 들추어 일파만파하려는 취재·보도자세가 아님을 거듭 분명히 해둔다.
2016년 3월3일 늦은 오후 세종시 국세청 청사는 역대 국세청장을 비롯 개청 50주년 기념행사 참석을 위해 모인 관계자들로 부산하다. 낯 익은 얼굴이 휠체어를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앗! 청장님, 건강도 좋지 않은데 이 먼 곳까지 오시다니요.” 임환수 현 국세청장 등 역대청장들은 하나같이 고 전 청장을 반갑게 맞았다. “다음에는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못 할 것 같아 이번에 꼭 참석하고 싶었어요” 고재일 3대 국세청장(전 건교부장관)이 휠체어에 몸을 싣고 남다른 국세청 사랑의 메시지가 담긴 어조로 응답한다. 청와대로부터 2대 오정근 청장이 낙마한 후유증 정지작업 적격자로 뽑힌 고재일 전 청장이다.
고 전 청장은 당시 청와대의 특명을 안고 전매청장에서 일약 국세청장 자리에 등극하자마자 인적쇄신 집도에 착수했다. 어느 날 밤 고 전 청장은 간부급 회식자리에서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얘기를 들었겠지만, 염려들 마세요. 잘들 해봅시다.”하고 건배사까지 날렸다. 다음날 아침 출근해 보니, 여기저기서 인사 터졌어. 때 아닌 좌천, 영전인사 발령으로 직위고하를 가릴 것 없이 수군수군 거리며 난리 법석들이다.
기념행사 날, 확인행정의 달인 고 전 청장을 극진히 모신 21대 임환수 현 국세청장은 비서관(이건춘 청장 당시)시절을 겪으면서 지겹게 보아온 ‘궂은 일 험한 꼴’ 등 만고풍상을 다 지켜본 덕분인지, 무리 없는 세정운영으로 새로운 작품 만들기에 능하다. 이날 임 청장 다음으로 현 국세동우회장인 이건춘 11대 국세청장(전 건교부장관)이 눈에 띤다. 한국은행 등 40여 개 공기업 세무조사에 대한 공과는 IMF 외환위기를 맞아 세수확보가 절실한 상황과 맞물려 더욱 빛났다. 몇 년 전부터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 오늘이 있음을 감사히 기록하고 있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스스로 감동한다.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 8대와 9대 국세청장을 역임한 추경석 청장은 비고시, 말단 공채 출신으로 국세청장과 건교부장관까지 승승장구, 입지전적 인물로 국세동우회장을 거쳐 지금은 장상태 재단에 관여하고 있다. 1993년 시행된 금융실명제 조기정착에 조사권을 활용, 힘을 보탰고 수면 아래서 꿈틀댔던 지역차별 인사행정을 바로잡아 적재적소 인재를 발탁, 기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당과세 등 탈세대처에 행정력을 집중한 서영택 7대 청장(전 건교부장관)은 부동산투기 척결에 총력, 8000여 명의 국세공무원을 동원, 투기특별단속을 통해서 투기억제는 물론 세수증대에도 기여한 바 크다. 안무혁 5대 청장은 명성 그룹 범양상선 등 신흥재벌들의 조세포탈 사건을 직접 진두지휘 끝장냈다. 특히 1982년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철희·장영자 사건 해결사 역할로도 유명세를 탄 정보통청장이다. 안기부장으로 영전한 안청장은 한국발전연구원을 설립, 국민의식 함양에도 앞장서고 있다. 정치자금 모금 등 비리혐의가 들어난 성용욱 6대 청장은 재직 10개월여 만에 낙마하는 수난을 겪은 최단재임 청장이 됐다.
국세청 첫 여성세무서장으로 제연희 서장을 배출시킨 손영래 13대 청장은 썬앤문 감세로비 의혹 연루로 고초가 심한 탓인지, 공·사간에 거의 얼굴을 못본다. 일명 호남권 출신 2번째 청장이다. 인사혁신과 성과관리 혁신에 남다른 지도력을 발휘해온 이용섭 14대 국세청장은 20대 관세청장, 청와대 혁신기획관, 행정자치부장관, 건교부장관 등도 역임했다. 18대와 19대 국회의원으로 정치권에 입문, 활동했었고 최근 법무법인 율촌 고문에 영입됐다. 호남권 출신 3번째 청장이다. 특히 이 청장은 일 잘하는 직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칭찬할 정도로 부하 사랑이 남다르다. 접대비실명제 시행과 관련, 기득권의 저항과 비난을 뚫고 뚝심으로 밀어붙여 성사시켰다는 일화는 업적으로 남는다. 과세적부심사제도 정착에 몰두한 임채주 10대 국세청장은 정치적 스캔들인 세풍(稅風)사건에 연루돼 만감이 교차하는 나날인데, 코오롱 그룹 고문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손을 뗀 상태다. 백용호 18대 국세청장은 “금융위윈장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으나, 국세청장으로 임명됐다”는 후일담이 쓴웃음을 짓게 한다. 장관보다 실권이 더 센 국세청장인데, 그걸 미처 몰랐어요?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는 그는 이대 교수로 캠퍼스를 누비고 있고 얼마 전 자서전도 발간한 학구파다.
구속된 청장들이 손꼽을 정도인데,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 군사정권에서 문민정권으로 이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더욱 이들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성이 생긴다. 이주성 15대 청장은 론스타 등 외국계 펀드에 대한 세무조사를 강행, 탈세방지 기반 마련에 열정을 쏟았다. 뜬금없이 사표를 제출, 의혹을 사기도 했는데, 아파트를 뇌물로 받은 혐의로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다. 청장으로 승진 임명된 후 “국세청이 내 손 안에 있다”고 감회를 피력했다는 일화가 걸작이다. 전군표 16대 국세청장은 현직 국세청장으로는 처음으로 구속되는 불명예를 감당하게 된 비운의 주인공이다. 강원국세청을 세우겠다고 지역에 선전할 만큼 애향심이 넘치는 인물이다.
역외탈세 방지에 초점을 맞추어 국세행정 추진동력을 가동시킨 한상률 17대 청장은 그림로비사건 등으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하여 6개월여 동안 허병익 전 차장 체제로 국세청을 움직이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주성 전군표 한상률 3인방 청장들의 불미스런 행각을 놓고 일부 선배 청장들의 평가는 “할 말이 없다”는 싸늘한 반응이다.
이현동 19대 청장은 사전안내제를 전격 폐지, 사후검증제로 전환했으나 제2의 세무조사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청문회 도중에 화장실에 다녀올 정도로 청문회에 대한 부담과 긴장감을 엿볼 수 있게 연출해 시선을 끌기도 했다. 김덕중 20대 청장은 지하경제 양성화에 힘을 쏟았고 FIU법을 통과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그 당시 청장 물망에 오른 1급들이 줄줄이 사의를 표명한 관계로 ‘어부지리 청장’이 됐다는 ‘풍문 아닌 풍문’이 세정가에 파다했다. 충청권 국세청장 탄생 제1호이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청장들로는 초대 이낙선 청장 2대 오정근 청장 4대 김수학 청장 12대 안정남 청장이 있다. 이낙선 초대 청장은 박정희정권의 중심세력 중의 한 사람이다. ‘견금여석’이라는 박 전 대통령의 친필휘호를 가슴에 안고 국세청에 당당하게 입성한 국세청개청 공신이다. 세수 700억 달성 지령을 무난히 점령한 이 청장은 상공부장관 건설부장관 등을 역임한 후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롯데그룹부회장 롯데상사 및 롯데호텔 사장 등을 지냈다. 향년 62세로 1982년에 별세.
오정근 2대 청장은 세정과학화와 납세자권익강화에 힘썼다. 세원관리를 위해 컴퓨터 입력장치(35대)를 도입, 세정과학화에 새 장을 열었다. 73년 3월 퇴임 후 대한펜싱협회회장 제9대 국회의원(비례대표) 등을 지냈다. 1982년에 별세. 도백출신의 김수학 4대 국세청장은 자율납세 기반확충에 진력했다. 황색공한(黃色公翰)으로 이름 붙여진 서정쇄신 차원의 부조리 방지에 대한 청장 메시지로 간부들의 솔선수범을 당부한 적도 있다. 국세청 세무상담실 개설과 조사요원자격시험, 세무전문대학교(훗날 세무대학으로 개명)개교 등이 대표적 업적이다. 퇴임 후 토지공사사장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회장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이사 등 역임. 향년84세로 2011년 3월에 별세했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시절, 호남출신 첫 국세청장이 된 안정남 12대 청장은 제2의 개청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조직과 업무개혁을 실행했다. 세목별 조직을 납세자 중심의 기능별 조직으로 전환했고 대기업 총수 일가 등 사회상류층의 변칙적 부의 세습과의 전쟁선포로도 이름을 떨쳤다. 2001년에는 조.중.동 등 언론사 세무조사를 강행, 언론과 등 돌리는 껄끄러운 관계를 만들기도 했다. 야인생활 중에도 언론의 집요한 취재 화살에 시달려왔다는 후문이다. 부동산 등 축재의혹이 터지면서 건교부장관 취임 20일 만에 낙마하는 수모를 겪었다. 말술로 알려진 안 청장은 취임 초 골프 금지령까지 내릴 만큼 개혁성향이 강한 인물로 정평이 나있다. 2013년 6월에 향년 72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났다.
역대 국세청장들이 세운 세정지표는 그 시대 국세행정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압축된다. 20명의 역대 청장들의 세정지표 중 무려 13개가 ‘공평세정’이다. 세수증대, 명랑세정, 열린세정, 신뢰세정, 정도세정 그리고 임환수 현 국세청장의 준법·청렴세정까지 다양하다. 납세자를 의식한 과세 중립성을 강조한 그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운영지표들이다. 바꾸어 말해서 역대 국세청장들은 기본에 올인 했다는 얘기다.
어느 날 한 밤중에 고재일 전 장관(3대 국세청장)으로부터 난데없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 장관(11대 국세청장·전 건교부장관), “TV뉴스에서 세금이야기가 나쁘게 나오던데, 국세청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거야?”
“아닙니다. 고 장관님, 지난 연말정산 때 신고폭주로 전산시스템이 잠시 과부하가 걸려서 생긴 일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나(고 장관)는 지금도 국세청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면 마음이 안 좋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짧은 대화 속에 국세행정의 침울했던 지난날을 잘 삭혀낸 세월들이 절절히 묻어난다. 공직자는 재물(돈)보다 명예를 선택할 줄 알아야 롱런할 수 있다. 누구누구라고 굳이 꼬집어 지적질을 안 해도 역대 국세청장들이 그린 자화상이 이를 잘 입증시켜주고 있다. 50년 국세청의 오묘한 민낯을 그리고 실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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