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김종규 논설고문 겸 대기자)
제2의 개청인사 99개 숫자 맞춰 지방청과 세무서 폐지는 ‘악수’
행정관료 조직의 기본 형태인 계선조직(系線組織=Line Organization)으로 운영해온 국세청의 조직이 1999년에 와서야 기능별 조직으로 대전환하게 된다. 국세청은 기능별 조직 개편을 통해서 본청은 기획업무를, 지방국세청은 조사업무를, 세무서는 서비스 중심 업무로 역할을 재정립해왔다.
국민에게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는 현장 집행조직 특성상 본청과 지방국세청 그리고 세무서의 인력구조는 전통적으로 또는 관례적으로 관료조직의 기본인 피라미드 형태를 갖추어 왔다. 2015년 성실신고 지원기능을 강화하고 현장 납세자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 본청과 지방국세청의 조직을 축소하고 감축된 인력을 세무서로 재배치해나갔다.
경제규모가 커짐에 따라 납세자 수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따라서 세원규모도 확대되어 왔고 세원관리를 위한 국세공무원의 인력 증원은 필연이 됐다. 국세청의 행정 인력의 변천은 1966년 개청 당시 5500명이었던 정원이 1973년에는 1만명이 넘었고, 2015년에는 1만 9900명으로 늘어났다. 2020년만 해도 구리, 연수, 광산세무서 등 3곳 세무서 신설과 세무서 직제개편과 관련 181명을 증원했다.
어찌 보면 국세청 개청의 주요핵심 과업이 세무조사 업무강화라고 할 만큼 세수확대를 최우선으로 설정, 세수제일주의를 표방해온 결과 때문에 인력 증원이 절대였다고 하겠다. 당시만 해도 세무조사 인력 충원을 위해 본청에 176명, 지방세무관서에 824명 등 1000여 명을 증원한 것만 보아도 쉽게 세무조사의 중요도가 묻어난다.
중부지방국세청과 6개 세무서 신설 등으로 1967년에 또 1000여 명을 증원했고, 세무공무원교육원을 1968년 신설함에 따른 인력충원을 88명 증원하는가 하면 대구지방국세청과 산하 세무서 신설에 따른 충원이 1643명에 이르렀다.
그 동안 일반직 1급이었던 국세청 차장 직급을 별정직 1급 상당으로 1970년에 조정했고 한강세무서 신설 등 기구개편과 관련한 충원인력인 365명을 증원했다. 1970년대는 정부의 공무원 정원 감축과 세원 확충에 따른 세무공무원 증원 필요성이 서로 얽혀졌던 시기였다.
1971년 세무서 직세과를 개인세과와 법인세과로 분리 조정함에 따른 인력증원이 184명이 늘어났고 본청 조사국과 전산관리관실과 세무서 신설 그리고 기술연구소 재정비 등에 따라 612명을 증원했다.
특히 1970년대 후반기에는 세제개편에 따른 세목 신설과 관련한 신규업무 수행 인력수급이 급선무였다. 1976년에는 종합소득세와 양도소득세 등 소득세제의 대폭적인 세법 도입에 따른 신규업무 수행 인력인 1200명을 증원하게 됐다.
또 1977년 부가가치세법 시행과 관련한 인원 795명을 증원, 부가가치세 과세행정을 차질 없이 수행하기 위한 업무집행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했다. 1978년 정부의 갑급 직원 양성화 계획에 따라 294명의 고용원을 증원했는데 1984년까지 고용된 1159명을 추가 증원했다.
IMF 이후 고용직 전산자료 처리요원
247명 정원화 일자리창출 한몫
국세청은 198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IMF이후 1987년 12월에는 금융실명제 실시를 위해서 한시적으로 고용한 전산자료 처리요원 247명(고용직)을 전원 정원화, 이른바 비정규직을 전원 정규직화했다. 일자리 창출에 한몫을 한 셈이다.
1990년대는 본청과 지방국세청의 재산세국을 확대 개편했고 서울지방국세청과 중부지방국세청에 전산처리과를 설치함에 따라 914명을 증원했고, 1993년에는 토지초과이득세의 과세에 대비해서 22개 세무서에 재산세과를 신설하고 360명을 증원했다. 또 1996년 7월에는 금융소득 종합과세의 시행 등을 위해 347명의 인원을 증원하게 됐다.
2013년 12월 정부의 통합정원제 시행을 계기로
조사국 등 4백여 명 감축 증원퍼레이드 발목 잡혀
2000년대 접어들면서 국세행정은 부동산 등 종합과세를 비롯 투기억제를 위한 행정력 강화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또 근로장려세제 첫 도입, 국정과제의 하나였던 지하경제 양성화 그리고 성실납세 지원행정을 위한 인력체계 개편을 서두를 상황이었으나 정부의 계속된 ‘통합정원제 시행’에 가로막혀 인원감축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2005년 종합부동산세 시행을 필두로 현금영수증제도 실행, 양도소득세 실지가액의 조사 그리고 국세상담 등에 필요한 인력 288명을 증원하게 된다. 또 2006년에는 부동산 투기억제 전담조직인 부동산납세관리국을 신설하고 종합부동산세의 과세대상 확대와 양도소득세 실거래가 과세 시행에 따른 필요 인력 701명을 증원했다.
근로장려세제가 처음으로 도입된 2007년에는 양도소득세 실거래가 과세제도가 전면 확대 실시됨에 따라 실무필요인력 1992명을 증원하게 된다. 국정과제로 까지 무게중심이 팽창된 지하경제 양성화 과제를 원활하게 세입징수 기반을 조성해 나가기 위해 지방국세청의 신고관리과를 폐지하고 숨긴재산추적과를 신설했다. 지방청과 세무서에 139명을 증원함에 따라 국세청 정원이 처음으로 2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증원과 감축이 연쇄적으로 집행되다보니 국세청의 성실납세 행정향방이 오락가락 집중집행에 여간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 설상가상 격으로 2013년 12월 정부의 통합정원제 시행으로 또 발목을 잡히고 만다.
191명이 감축됐고 2015년에도 지방국세청의 숨긴재산추적과, 조사국, 정보화센터 직원 등 443명을 감축했는데 지방국세청 송무국에 73명, 일선 세무서에 370명을 재배치해 현장의 대응역량을 강화해 나갔다.
지하경제 양성화 과제 원활 수행위해 신설증원과
감축이 연쇄적으로 집행돼 인력부족 현상 여전
2015년에는 근로장려세제 확대 시행과 취업 후 학자금 상환관리를 위한 집행 인력 256명, 4월에 아산, 관악세무서 신설 등으로 18명 증원했고 5월에는 공익단체 관리 등에 필요한 인력 19명도 증원했으나 그 해 연말에 정부의 통합정원제 시행과 관련하여 무려 189명이 감축됨에 따라 인력부족현상은 여전한 실정을 보여왔다.
공직 전체로 진행되고 있는 인적구성의 변화는 여성인력의 지속적인 증가 현상을 들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공무원 공개채용시험에서 여성합격자 수가 지속 증가함에 따라 전체 국세공무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증가해 왔다.
국세공무원 중 여성공무원의 비율이 2005년 말에는 26%, 2015년(9월말 현재)에는 36%까지 증가해서 비상한 관심을 쏟게 했다. 2000년대에 와서는 관서별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거개가 50~60%를 훌쩍 넘는 것으로 탐문되고 있다.
주목해야할 인력임이 분명하다. 국세청은 2005년부터 7급 이하 승진임용에 여성공무원을 우대하는 여성공무원 승진목표할당제를 시행했다. 양성평등과 균형인사를 실천해서 여성공무원의 사기진작에 모멘텀을 몰고 갈 에너지를 갖게 했다. 여성공무원이기에 상사나 동료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시대는 이제 옛 세상일이 돼버렸다.
2015년 현재 국세공무원 정원 1만 9998명 중 6839명이 여성공무원이다. 이 중에 ▲세무서에 근무하는 여성공무원은 5527명(80.8%)이고 ▲지방국세청 근무자는 1086명(15.9%) ▲본청 근무자는 226명(3.3%)인 것으로 나타났다.
OECD 주요국과 국세청 인력 운영 현황을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국세공무원 1명이 담당하는 경제활동 인구는 1802명인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우리나라는 1373명으로 OECD 회원국의 평균 수준(770명)의 2배가 넘는 근무환경 개선도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다.
서정백관의 기본이 인사라고 한다. 그래서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상용화되어 온지 오래다. 국가 재정수입이라는 특수행정 업무를 집행, 수행하는 관계로 권력기관이라는 닉네임도 달았다. 나라 곳간 채우기 행정덕분에 특혜는 아니지만 어느 수준까지는 상당한 예우(?)를 받기도 했던 국세청이다.
직제 상으로는 기재부의 외청(外廳)이다. 제5공화국 때까지만 해도 각부 장관 인사 때 국세청장 인사가 함께 발령 날 정도로 격이 높아져 있었다. 그러나 나라 재정정책이 점차 안정화 추세에 진입해 왔고 국세행정이 납세서비스 행정 쪽으로 기수를 틀어 나가면서 군림행정을 차차 탈피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해졌다. 예전같은 세수 지상주의 행정의 자취가 슬금슬금 감추어져 갔다.
세수가 국세청이고 국세청의 기본이 세수업무다. 때문에 비단 개청 때만 세수 중요도를 새겨지게 만든 것이 아니다. 지금껏 세금은 나라 곳간을 상징하는 국고세입 로드이기에 더욱 값진 업무이고 엘리트 집단의 산실이어야 했다.
이 같은 상황이 회오리치듯 몇몇 국세청 수장들의 분별없는 행각이 수사망에 걸려 들어 비리 몸통으로 들통나게 된다. 격변했던 국세행정 위상이 땅에 떨어지기도 했지만, 때로는 창의적인 인력운영으로 인사운영 우수기관으로 선정돼 대통령표창을 수상하기도 해서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60년 국세행정을 두고 굴곡진 세정 사(史)였다고 명패를 달기에는 그래서 아직 이르다.
국세청의 증원 행진 퍼레이드가 쉼 없이 내달리고 있다가, 1972년에 정부의 감원정책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공무원 정원 5% 감축 계획에 따라 340명을 감축하게 된다. 또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정부가 추진해온 생산성 10% 높이기 정책을 피할 길이 없게 된다.
대구출신 박 전 대구국세청장 인사 후유증
호남출신 안 전 국세청장 인사집도가 ‘화제’
애석하지만 국세청은 정원을 일부 축소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1998년 세무공무원교육원과 관세공무원교육원을 통합하고 과세자료 입력업무를 민간에 위탁함에 따라 무려 223명을 감축하게 됐다. 제2의 국세청 개청을 표방하고 나선 대대적인 조직개편 단행은 175명의 자리를 억지로 줄여 버렸다.
경인지방국세청과 35개 세무서를 폐지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1999년이니까 99개 세무서만 남긴다는 ‘숫자 기준’이 악수(惡手)를 둔 것이 아니냐는 비판여론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정치 1번지 대구 출신 박 전 대구국세청장의 옷을 벗게 만든 인사 후유증은 의외로 컸다. 국민의 정부 때라서 당시 국세청장이 호남출신인 안 전 청장이다 보니, 영호남의 묘한 기류까지 겹쳐 빅뉴스 화제로 불거져 대서특필됐다. 훗날 국세청 굴곡사의 한 페이지를 칙칙하게 장식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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