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김종규 논설고문 겸 대기자) 현대는 정 명예회장과 그 일가의 주식이동조사는 물론 국세청으로부터 수백 억원대의 세금을 추징당했다.
현대에 가해진 세무조사 메스는 그룹 전체 이미지에 영향을 미쳤고 스스로 세무조사를 자초한 꼴이 됐다. 그룹 총수가 대선에 출마, 낙방하는 사태까지 표출되면서 기업자체의 이미지를 흐릴 수밖에 없는 국면에 직면하게 된다.
현대그룹은 외부적 환경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현대와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분리, 그룹 와해라는 불명예를 맛보게 된다. ‘기업이 보는 국세청의 존재’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준을 훨씬 능가한다. ‘기업의 흥망성쇠를 세무조사의 강도가 좌우할 수도 있다’는 심오한 교훈을 현대그룹을 보면서 또 한 수 배우게 된다.
신고납세제가 시행되기 전 세무행정 집행 시기였다. 세무공무원의 과세권이 하늘 높이 방방 뛸 때다. 세무서에서는 개인사업장을 직원들이 지역별로 나눠서 담당, 직접 사업장을 방문하여 업황을 조사한다.
예를 들면, 요식업소는 테이블 개수와 손님의 회전횟수를 체크한다. 한 테이블에 몇 번이나 손님이 번갈았는지에 따라 매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1977년 7월 부가가치세 도입은 과세행정에 큰 혁명이나 진배없는 대개혁이 실행되고 있는 때다. 그동안 개인영업세가 추계과세로 세금이 매겨져온 인정과세 체계를 확 뜯어 고치려고 신고납세제를 정부가 도입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업종별 업황은 물론 시설규모나 투자한 금액 등을 모두 합쳐 세금을 매기는 부과과세 체계를 납세자 스스로 계산해서 세무서에 신고도 하고 세금을 납부하는 자진신고납세 체계로 바꾸어 나간다는 입법취지가 담긴 세제개혁이다.
‘전봇대 과세’ 은어의 탄생
영수증 같은 증빙자료를 갖추고 있는 사업장은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었다. 거개의 개인납세자들은 장부를 갖추지 않았다. 치부책(置簿冊)에라도 끄적끄적 그려두기만 해도 증빙자료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시기가 언제 오려나 싶더니만, 한 순간 코앞에 바싹 다가온 것이다. 부가가치세 도입 시행이 국세행정의 과세체계를 확 바꾸게 된 것이다.
세수가 지상과제였던 당시 세무서 지역담당공무원은 하루에 수십 군데씩 납세자의 사업장을 직접 돌아 다녀야 했다. 현장 확인조사 일종인 호순조사(戶順調査)였다. 고지서 발부를 앞두고 있으면 더욱 잰걸음이 된다.
영업장별 외형을 조사해야 권형을 맞출 자료로 쓰기 때문이다. 지역담당자에게는 담당구역에 따라서 매상수치가 천차만별이다. 하나하나 개인사업자의 매출액을 따져야 맞지만, 그렇게 할 만큼 세무서의 전산시설이 현대화되지 못한 때다. 그야말로 수동행정시대였다.
전표를 수동으로 작업했기 때문에 오류 발생도 없지 않았고, 권형을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고육지책으로 짜낸 권형사정(權衡査定)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다. 영업세 부과결정을 지역별로 나누고, 업종별로 구분해서 전기대비(前期對比)해 권형을 맞추고 조정한 다음 관내 납세자가 내야할 세금을 결정한다.
이때 인접지역 세무서와의 권형까지도 비교 대사할 만큼 공평과세에 힘을 쏟았다. 물론 세입징수관인 세무서장의 결재가 최종적으로 떨어져야 되지만…. 거개가 99.99% 통과된다.
이것으로 지역담당세무공무원의 영업세 업무가 끝이 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일지 모른다. 세수 목표치가 담당자에게 할당됐기 때문이다.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배시(配示)된 세수치를 적절하고 공평하게 매기게 되지만, 남는 배시액이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동댕이칠 수도 없다. 관내 자료에 나타난 ‘어떤 지번’에다가 슬쩍 매겨 놓고 고지 발부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놓는다. 고지 후 체납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사후점검 과정에서 전봇대가 서있는 지번으로 밝혀져 ‘전봇대 과세’라는 웃지못할 은어가 생겼다.
오죽하면 가공부과까지 하면서 목표미달자 좌천인사 조치를 면하고 싶어 했겠는가. 세수 목표달성은 지상과제이다 보니 별의별 아이디어가 총동원되다시피 했다. 지역담당세무공무원들의 몸부림을 그 누구인들, 그 무슨 말인들 위로가 되랴 싶다.
오직 재정역군의 사명감이라고 강조할 따름이다. 당시의 세무공무원들의 세수에 얽힌 애증을 넌지시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세적(稅籍)옮기기 작전' 세무비리 온상
과세행정은 양면성을 안고 있다. 사유재산권을 감사하는 조사권이 있는가 하면 납세자의 권익을 보호해야할 의무도 함께 갖고 있다. 현장조사권이 무뎌지다 보면 세무공무원과 납세자와의 유착에 의한 감세결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곧 내 사업장의 매출이 담당세무공무원의 손 안에서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영업세 과표가 오르락내리락 할 수밖에 없다. 조사현장의 유착은 불 보듯 뻔했고 세무비리의 온상이 되어 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언젠가부터 담당공무원을 따라 세적(稅籍)을 옮겨 다니는 사례가 생겨났다.
당시 서울시내 동대문시장 집단지역에서는 광장시장과 평화시장 등이 인접지역이면서도 관할 세무서가 다르기 때문에 불거지는 문제로 일선세무서 관리자들이 곤욕을 치룬 적이 있다. “과표가 이렇게 올라가면 다른 시장으로 사업장을 옮겨야겠습니다.”
당시 남산세무서 아무개 과장은 “걸핏하면 세적 옮긴다는 납세자의 돌변에 질색할 지경이다. 20년 동안 세무행정에 몸담고 있었으나, 납세자의 생리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넋두리를 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기대비’라는 기준치가 과표 상승 수치를 플러스알파 작용을 했기 때문이다. 세금 부담 가중치가 폭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관례의 틀을 과세행정의 군림이라고만 비아냥거리기보다는 납세자의 성실신고를 위한 효율적 개선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측면을 섣불리 보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이즈음, 국세청에 세정개혁 바람이 불어 닥친다. 전매청 재임 중이던 고재일 청장이 돌연 국세청장으로 입성한 것이다. 고 국세청장은 자리에 앉아마자 전 직원 브리핑 보고를 받기 시작했다. 벽지 세무서까지 다니면서, 서장은 물론 서기보까지 업무브리핑을 직접 받았다.
어느 주사 왈, “아는 것도 떨려서 말을 더듬다가 끝났다”고 할 정도로 난생 처음해 보는 청장 앞에서의 보고는 얼떨떨했다는 자평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대중세 혁신’은 고재일 국세청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영업세 과세대장을 브리핑 받을 때 마다 꼭 챙긴다. 만일 연필로 기록한 개인 과표가 확인되면 그 즉석에서 인사조치할 정도로 딱 부러졌다. 과표를 깜짝 손질, 조작할 소지가 많다는 우려인 것이다.
김 아무개 당시 안양세무서장이 브리핑 도중 즉석에서 인사조치 당한 사실이 상기된다. 이로 인해 추 아무개 이리세무서장이 어부지리로 서울 입성의 꿈을 이루게 된다. 그때의 현장 온도가 얼마였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좌천당한 김 서장은 대중세 개혁 물결에 첫 희생양이 된 셈이다.
당시 을지로세무서와 중부세무서 관할에는 재래시장이 많았다. 동대문시장, 평화시장, 광장시장 등 서울을 대표하는 시장이 즐비하다. 때문에 세무서 관할구역이 다른 인접된 시장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시장의 통로길 사이로 세무서 관할이 서로 달라 동종업종 과표 차이가 들어나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재래시장 사잇길 세무서 관할 달라 조세저항 빌미
세무서 관할구역이 다르니 권형지수도 당연히 편차가 생길 수 있다. 납세자들은 관할세무서를 시정항의 방문했고, 상급관서에서는 조세저항으로 번질까봐 ‘쉬쉬’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대중세의 생리상 잡다한 얘깃거리가 많았다.
세칭 가짜뉴스도 제법 나돌아 다녔지만, 세금얘기라면 한가락씩 할 얘기가 많은 곳이 재래시장 사업장이다. 좁은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다 보니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는데서 나오는 과잉친절 패턴 때문이라고 보고자 한다.
세금고지서라도 나오면 서로 입을 맞추어보기도 하지만 시장번영회를 통해서도 ‘많다 적다’ 쓴 소리로 야단법석 난리굿을 벌이는 곳이 집단상가 납세자들의 생태라고 촌평하는 정 아무개 중부세무서 영업세담당계장의 푸념이 아련하기만 하다. 당시의 대중세 업무혁신은 세무행정상 불가피한 조류였다. 누가 국세청장이라 해도 풀고 가야할 과업이었다.
되돌아보면, 참여정부의 개혁의지 중 하나가 ‘관리형 국세청장’의 태동이라고 보고 싶다. 국세청장의 세무조사 향방이 사유재산권 행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얘기다.
1960년대는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경제개발 재정수요를 탈루세원 적출 과징으로 충당하기 위해 제조업 과표 현실화에 주력한 적도 있었다. 지하경제가 극성을 부리던 1980년대 세무조사가 음성 불로소득 적출과세였다면 부가가치세 시행초기의 위장가공거래 추적행정은 자료양성화를 위한 대표적 세무조사 모습이었다.
서슬이 시퍼렇던 1960년대의 007가방은 흔적조차 없어졌고 견금여석(見金如石)의 정신은 온데간데없다. 그 당시만 해도 ‘세무조사를 빌미로 한 금품수수행위에 족쇄를 씌우겠다’는 강경조치는 납세자는 물론 세무대리인까지도 ‘동시처벌’이라는 특별관리 범위에 포함시켜 관리하고 있는 참이다.
조사국장, 임 청장 때는 영남 득세, 한 청장 재임시기엔 호남 약진
2기 한승희 국세청장 재임 시기 중 ‘국세청의 칼’이라고 불리는 조사국의 국장을 살펴보았다. 2019년 상반기 인천국세청 개청을 계기로 본 국세청 조사국장들의 면면이다. 임환수 전 국세청장 때는 경북 영덕 출신이며 행시 36회인 임경구(1961년) 고공단이 본청 조사국장 자리를 차지했었으나 2019년에는 서울청 김명준(1968년) 국제거래조사국장이 본청 조사국장 자리로 옮겨 앉게 된다. 행시 37회인 전북 부안 출신이다.
굳이 따진다면, 박근혜 정부(임환수 국세청장 재임 시기)에서는 영남 출신이 득세한 반면, 문재인 정부(한승희 청장 재임 시기)에서는 호남 출신이 약진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경인국세청 개청을 계기로 본 국세청 조사국장을 임용과 지역별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임용구분으로 보면 행시 출신이 11명, 비행시(일반공채) 1명, 세무대 7명인데 단연 행시 출신 싹쓸이라는 평을 받을 만큼 다수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 ▲지역별로 보면 영남 5명, 호남 8명, 충청 3명, 경기 1명, 강원 2명이 포진하고 있으나 호남 출신이 8명으로 영남지역에 비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다음은 2019년 상반기 중 본청 및 7개 지방국세청 조사국장들의 면면이다.
▲김명준 국세청 조사국장(1968년생, 고공단, 행시 37회, 전북 부안) ▲임광현 서울국세청 조사1국장(1970년생, 고공단, 행시 38회, 충남 홍성) ▲이청룡 서울국세청 조사2국장(1963년생, 고공단, 세대2기, 경남 거제) ▲박석현 서울국세청 조사3국장(1966년생, 고공단, 행시 38회, 전남 영암) ▲임성빈 서울국세청 조사4국장(1965년생, 고공단, 행시 37회, 부산) ▲김동일 서울국세청 국제거래조사국장(1966년생, 고공단, 행시 38회, 경남 진주) ▲오호선 중부국세청 조사1국장(1969년생, 고공단, 행시 39회, 경기 화성) ▲김태호 중부국세청 조사2국장(1968년생, 고공단, 행시 38회, 경북 경주) ▲송기봉 중부국세청 조사3국장(1965년생, 고공단, 행시 38회, 전북 고창) ▲이현규 인천국세청 조사1국장(1964년생, 3급, 세대2기, 전북 남원) ▲구재완 인천국세청 조사2국장(1965년생, 4급, 세대3기, 충남 서천) ▲주효종 대전국세청 조사1국장(1967년생, 4급, 세대5기, 충북 옥천) ▲한인철 대전국세청 조사2국장(1963년생, 4급, 세대4기, 강원 양구) ▲박종희 대구국세청 조사1국장(1972년생, 3급, 행시 42회, 대구) ▲윤영일 대구국세청 조사2국장(1965년생, 4급, 세대8기, 강원 원주) ▲윤영석 부산국세청 조사1국장(1965년생, 고공단 행시 41회, 전남 함평) ▲송바우 부산국세청 조사2국장(1972년생, 고공단, 행시 38회, 전북 정읍) ▲임진정 광주국세청 조사1국장(1965년생, 4급, 세대4기, 전남 해남) ▲김천기 광주국세청 조사2국장(1962년생, 4급, 공채7급, 전북 부안) 등이다.
[프로필] 김 종 규
• 조세금융신문 논설고문 겸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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