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고태진 관세사·경영학 박사) 과거 무역장벽은 주로 관세나 수입 쿼터 형태로 나타났지만, 이제는 환경 규범과 디지털 통상이 새로운 형태의 ‘비관세장벽’으로 부상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EU의 CBAM(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이다.
EU는 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수입품에 ‘환경 관세’를 부과하며, 이를 자국 산업 보호 수단으로 활용한다. 미국도 ‘청정에너지 보조금’을 산업 유치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이는 FTA 체결 여부와 기술기준 충족 여부를 수입조건으로 연계하고 있다.
FTA는 이제 환경‧노동‧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기준을 제시하면서도, 그 기준은 각국의 정치적, 산업적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되기 쉽다. 특히 기업으로서는 기준 자체가 명확하지 않거나, 협정 발효 이후 변동될 가능성이 있는 점이 큰 리스크다.
예컨대 ‘디지털 통상’ 분야에서 데이터 이전 제한, 소스 코드 공개 요구, 플랫폼 규제 등은 협정문에 모호하게 기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기업의 기술 보안, 영업비밀 유지, 글로벌 인프라 설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불확실한 법적 환경이 투자 결정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정치화된 FTA, 기업이 짊어지는 리스크
FTA가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될수록, 기업은 규범이 아닌 정치적 맥락에 휘둘리는 무역환경 속에 놓이게 된다. 특히 다음 세 가지는 기업 실무자에게 직접적인 부담으로 다가온다.
1. 원산지기준 변경에 따른 공급망 혼란
2022년 미국이 발표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자국 내 친환경 산업 육성을 위해 전기차 구매자에게 최대 7500달러의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전제 조건으로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일 것, 그리고 ‘북미 또는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에서 생산된 핵심 광물 및 배터리 부품을 사용할 것’이라는 기준을 부과했다.
이 조항은 단순한 소비자 혜택 정책이 아니라, 무역정책과 산업정책, 외교정책이 결합된 조건형 무역 규범에 가깝다. 문제는 이 ‘북미산 배터리’ 요건이 구체적으로 어떤 광물, 어떤 가공 공정을 말하는지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이며, 발표 이후 몇 차례 해석과 세부 지침이 바뀌었다는 데 있다.
국내 기업들은 애초 미국 시장을 겨냥해 수출 및 투자 전략을 수립했으나, IRA 발표 이후 광물 공급망, 배터리 생산공장 위치, 협력사 계약 조건 등을 전면 수정해야 했고, 몇몇 기업은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되며 가격 경쟁력에서 치명적 손실을 보았다.
이러한 사례는 FTA 내 원산지 기준이 기술적‧법적 기준이 아니라, 정치적‧전략적 판단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중소‧중견기업의 경우, 대기업에 비해 공급망 전환의 민첩성이나 로비 및 법률 자문을 활용할 수 있는 여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사전 예고 없이 이루어지는 기준 변경이 치명적인 경영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
2. 자율인증제도의 불확실성과 법적 책임 이슈
기업이 FTA 특혜를 적용받기 위해 활용하는 ‘인증수출자 제도’는, 실제로는 원산지 입증 책임을 기업에 전가하는 구조다. 원산지 기준이 모호하거나 변동성이 클 경우, 사후 검증에서 위반 판정을 받을 가능성이 존재하며, 이때 발생하는 법적‧금전적 부담은 고스란히 기업이 감당해야 한다.
보세운송, 수출신고, 원산지증명서 발급 등 일련의 실무 프로세스에서도 세밀한 문서 관리와 체계적인 리스크 대응 체계 구축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기업이 원산지규정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기는 어렵고, 사소한 해석 차이 하나가 수억 원 규모의 관세 추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구조적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관세사 등 원산지 전문인력의 정기적인 규정 검토와 리스크 진단을 제도화해야 한다. 현재는 기업 자율에 맡겨진 경우가 많지만, FTA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시대일수록 정책 변화에 민감한 규정의 유효성 검토와 문서 체계 점검이 의무화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을 통해 기업은 불확실성을 줄이고, 실무 오차로 인한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다.
3. 다자협정 중첩에 따른 적용기준 혼선
한국은 다자‧양자 FTA를 동시에 여러 개 체결한 국가이다. RCEP, (합류될 것으로 예상되는) CPTPP, 한-아세안 FTA, 한-중 FTA 등이 중첩 적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각 FTA별로 원산지기준, 환경 규정, 노동 규정이 상이하다. 기업은 어떤 협정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 실무적인 혼란을 겪고 있으며, 잘못 적용할 경우 협정 혜택을 반납하거나 벌금을 부담해야 할 수 있다.
전략적 대안, 예측 가능한 무역 질서의 복원
FTA가 전략적 수단으로 활용되는 현실을 기업이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화가 기업의 예측 가능성과 경쟁력을 해치지 않도록 최소한의 구조적 안전장치는 마련되어야 한다. 그 현실적 대안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1. 국제 표준에 기반한 원산지 기준 재설계
FTA 원산지기준은 정치와 산업구조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기술 중립적(technology-neutral rules)이고 구조적으로 단순한 형태로 재설계될 필요가 있다. 현재 대부분의 FTA는 원산지를 판단할 때 세번변경기준, 부가가치기준, 공정기준 등 품목별 규칙을 혼합하고 있으며, 협정마다 적용 기준이 다르고, 세부 규정은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이로 인해 기업은 협정 별로 다른 인증 체계를 구축해야 하며, 수출 과정에서 문서 작성, 원산지 검토, 세관 대응 등에서 상당한 행정비용과 리스크를 감수하고 있다.
국제표준기구(ISO), UNCTAD 등과의 협력을 통해 세번변경기준 등의 항목을 단순화하고 국제표준화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표준화는 원산지 검증의 일관성을 확보하고, 각국 협정 간 충돌을 줄여 기업의 예측 가능성을 높인다. 특히 다자간 협정이나 디지털 통상 분야로 확대되는 현대형 FTA 구조에서는 복잡한 원산지 판단이 실질적인 수출 장벽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원산지기준을 기술 중심으로 재정립하고, 정치적 논리에 따른 변경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것이야말로, FTA의 전략화를 수용하면서도 기업에 실질적 안정성을 제공하는 핵심 장치가 된다.1)
1) 참조: UNCTAD, 『Rules of Origin and the Private Sector』, 2024
2. 정책성 조항에 대한 사전 공시와 독립적 검토 절차 도입
CBAM이나 IRA처럼 산업정책적 성격을 띠는 조항은 기존 자유무역 규범과는 본질이 다르다. 이러한 조항은 일반 협정 조항과 구분해 명확히 공시하고, 기업이 이해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사전 검토 및 영향평가 절차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정치‧환경‧안보 등 비경제적 요소가 결합한 무역 규범은 협정문 내에서 예측 가능성을 낮추고, 해석의 불확실성을 높인다. 특히 이들 조항은 협상 단계보다 시행령‧가이드라인 단계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아, 기업으로서는 준비 시간이 부족하고 적용 방식에 따라 해석이 엇갈릴 수 있다.
FTA 전략화가 불가피한 시대라면, 정책형 조항에 대한 체계적 대응 시차를 확보하는 것이 기업 생존의 조건이 된다. 조항의 취지와 적용 범위, 시행 시점 등을 선제적으로 분석하고 대비하는 기업은 그만큼 리스크를 줄이고, 새로운 제도 환경을 ‘기회’로 전환할 가능성이 커진다.
결국 오늘날의 FTA는 단순한 협정문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 진입을 위한 전략 지형도에 가깝다. 조항을 ‘해석’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기업만이 무역정책의 수단화를 자신만의 성장 동력으로 바꿀 수 있다.2)
2) 참조: OECD Policy Brief, “Trade and Industrial Policy Interface”, 2023
3. 기업 중심의 FTA 운영체계 마련
정부 중심의 협상 구조는 외교적 타협과 거시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특성상, 현장 기업의 세부 실무나 공급망 구조 변화까지 반영하기 어렵다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FTA가 발효된 이후 원산지기준, 인증 절차, 환경‧노동 관련 조항 등에서 기업들이 겪는 시행착오나 비용 부담은 정부 통계에 잘 잡히지 않거나 협상 피드백으로 환류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FTA를 실질적으로 활용하는 기업들의 경험과 데이터를 제도 설계 단계에 반영할 수 있는 ‘FTA 기업 자문협의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협의체는 업종별 대표기업, 수출 규모별 중소‧중견기업, 법률‧관세‧회계 전문가 등을 포함하여, 협정의 실효성과 기업 활용성을 높이기 위한 현실적 조정 역할을 맡아야 한다.
특히 협정 초안 작성 단계부터 이 자문기구가 개입할 수 있다면, 조항의 해석 가능성, 인증 기준의 명확성, 행정 절차의 효율성 등을 사전에 검토할 수 있어 정책 설계의 완성도와 수용성 모두를 높일 수 있다. 단순한 의견 수렴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운영되는 실무 피드백 구조로 정착시킨다면, 이는 향후 디지털 통상, 탄소 국경세 등 새로운 무역 이슈에도 대응력을 갖춘 제도로 발전할 수 있다.3)
3) 참조: 한국무역협회, 『FTA 활용실태조사』, 2024
규범을 잃은 수단, 그 비용은 기업이 치른다
FTA는 본래 무역의 수단이다. 하지만 최근 그 수단은 산업정책, 외교안보, 기후전략과 결합되며 훨씬 복합적이고 정치적인 도구로 진화하고 있다. 이제 FTA는 단순히 관세를 낮추는 협정이 아니라, 국가 간 가치체계와 산업 지형의 재편을 위한 ‘정렬의 장치(alignment mechanism)’로 기능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기업이 감당해야 할 리스크와 불확실성은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 규범이 실종된 수단은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해치고, 투자 결정을 보류시키며, 공급망 전체에 혼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 상황을 단지 위기로만 볼 수는 없다.
FTA가 전략화되는 시대일수록, 기업에는 단기 리스크 이상의 구조적 질문이 던져진다.
“우리의 공급망은 지정학적 충격에 얼마나 유연한가?”
“우리의 인증 체계는 정치적 기준 변경에 즉시 대응할 수 있는가?”
“우리는 협정문을 해석할 역량을 갖춘다, 아니면 그 해석에 끌려다니는가?”
이제 필요한 것은 ‘FTA 무용론’이 아니라, FTA 전략화의 속도에 맞는 규범과 구조의 정비다. 동시에, 기업은 FTA를 단순히 비용 절감 수단이 아닌, 미래 산업 경쟁력의 ‘플랫폼’으로 인식하고 역량을 축적해야 한다.
정책 도구로서의 FTA가 불가피하다면, 그 정당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장치는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수단의 부작용은 오롯이 기업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반대로, 그 구조를 이해하고 선제적으로 설계하는 기업에는 새로운 시장에 들어가는 ‘키(key)’로 작용할 수 있다.
이제 FTA는 ‘따라야 할 협정’이 아니라, 읽고 해석하고 설계해야 할 전략문서가 되었다.

[프로필] 고태진 관세법인한림(인천) 대표관세사
• (현)경인여자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현)중소벤처기업부, 중기중앙회, 창진원, 경기TP, 인천TP 등 기관 전문위원
• (전)월드클래스 300, NCS워킹그룹 심의위원
• 고려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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