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고태진 관세사·경영학 박사) 과거 국가 간 경제활동 범위는 단순히 ‘상품’무역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국제통상은 기술의 발달로 돈으로 거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경제활동으로까지 확대됐다.
여기에 더해 비경제적 요소인 환경보호, 노동기준, 기업윤리 등 예전에는 국제통상과 거리가 멀어 보였던 분야에 대해서도 국제규범을 설정하고 무역과 투자활동에 연계시키려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한데 모은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뜻하는 ESG 경영이다.
특히 환경 문제는 냉전종식 후 주요 국제관계 의제로 부각되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경제활동은 필히 환경을 오염시키는 원인을 유발하며, 이는 특정 국가에 한정되지 않고 여러 나라와 관련됨에 따라 국가 간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하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중국 공장에서 발생한 엄청난 양의 미세먼지가 우리나라와 일본 등 이웃 국가로 넘어와 외교적 문제로까지 이슈화된 사실을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에서는 소위 그린라운드(green round)협상을 통해 국제통상활동을 제약하거나 금지시키는 방향으로 얼마나 또 어떻게 제한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자간 협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으로 지구의 온난화를 규제‧방지하기 위한 ‘기후변화협약’, 유해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 및 교역을 규제하는 ‘바젤협약’이 있다.
그 밖에도 오존층을 파괴하는 물질에 대한 사용금지 및 규제를 위한 ‘몬트리올의정서’ 등이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이와 같은 다자간 협약이 추상적이고 선언적으로만 다가왔지 실질 체감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ESG 경영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세상에 나왔을 때 얼마가지 못해 흐지부지되는 유행쯤으로 인식하는 이가 많았다.
ESG, 새로운 국제무역질서 개편의 신호탄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ESG는 더욱 또렷이 한 자리매김해 가고 있는 듯해 보인다. ‘ESG 공시’ 의무가 그것이다. 기업의 가치 성과 등을 숫자로 나타낸 재무적 요소가 아닌 환경 등 비재무적 요소를 계량화하여 의무적으로 공시하게 하는 것이다.
기업의 책임 경영, 그리고 새로운 투자 판단의 기초자료로 적극 사용될 수 있는 시대가 성큼 다가선 것이다. 우리나라 1년 예산보다 많은 돈을 굴리는 네덜란드 연기금 APG가 석탄발전소에 투자하는 한국전력 등 전 세계 8개사 지분을 매각한 사례는 이의 경각심을 알리는 데 충분하다.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배출하는 기업은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도덕한 기업으로 비쳐져 비호감 기업으로 전락될 수 있다. 또한 글로벌 투자자 입장에서는 재생가능에너지 사용 확대를 비롯한 기업의 기후위기 대응 성적을 투자 판단에 중요한 요소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자신의 공급망에 포함되어 있는 협력업체들에게도 동일한 잣대가 적용되어 친환경적 생산과정을 거친 부품을 납품하도록 요구받는다. 나 혼자만 잘해서도 안 된다는 얘기다.
이는 곧 국제무역환경에서는 새로운 장벽의 등장을 뜻한다. ESG를 준비하지 못하면 국제통상 세계에서 변방으로 ‘아웃’된다는 말과 같다.
특히 ESG 중 주요 이슈인 환경과 관련해서는 기후변화 대응이나 환경정책을 표면적 이유로 무역장벽을 올리는 ‘녹색보호주의’(Green protectionism)의 실체적 등장이기도 하다. 환경보호를 ‘핑계’로 진행되는 유럽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그간의 글로벌 공급망을 흔들기에 충분하며 새로운 국제무역질서 개편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여러 다른 나라들은 이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노력하고 경우에 따라 자국의 이해와 반하는 경우 로비스트까지 동원하며 최대한 그 영향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어찌됐든 녹색보호주의는 세계적 추세일 뿐 아니라, 하나뿐인 지구를 다음 세대에 안전히 넘겨주자는 환경보호라는 막강한 명분으로 다른 그 어떤 장벽에 비해 국제적 비난과 WTO 제재의 소지가 혁혁히 낮다. 그래서 더 무섭다.
이렇듯 ESG는 국제통상의 세계에서 뉴노멀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기업은 이러한 통상환경의 변화에 잘 대응하고 있을까. 매우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한 듯하다. 우리의 GDP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경우, RE100의 전환율은 23%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보도자료에 의하면 ‘RE100 이니셔티브’에 가입한 국내 기업들이 2022년 쓴 전력량이 서울시 전체 전력 사용량보다 많다고 한다. 그중 전력 사용량 1위인 삼성전자가 국내 사업장을 운영하면서 부산시보다 많은 전력이 들어갔다고 한다.
여기서 RE100이란 재생에너지 전기(Renewable Electricity) 100%를 말하는 것으로 기업 활동에 필요한 전력의 100%를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이용해 생산된 전기로 사용하겠다는 국제적 캠페인이다. 기후환경 보호의 대표성을 갖고 있는 탄소 발생량이 무역장벽의 주요 지표가 되면서 RE100은 기업 경쟁력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아가는 모양새다.
삼성전자가 친환경으로의 전환이 늦어져 우려를 낳고 있는 반면, 반도체 생산 최대 라이벌인 TSMC는 오히려 그 목표를 삼성전자의 2050년에 10년 앞선 2040년까지 RE100을 달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함께 TSMC는 2020년 덴마크 풍력 기업 오스테드와 20년간 1기가와트(GW)에 육박하는 PPA를 맺었다. 단일 규모로 역대 최대다.
다행일까. 2025년 국내 도입 예정이었던 ESG 공시의무가 미국 등 주요국의 공시가 지연됨에 따라 우리도 2026년 이후로 연기됐다. 준비가 덜 되어 있는데 투자의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작용될 ESG 공시를 우리가 먼저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ESG 공시 자체는 피할 수 없는 대세이며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문제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협력사까지 공급망 모두를 들여다본다는 데 있다. 즉 중소기업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대기업은 경각심을 갖고 자체 힘으로 빠르게 친환경 프로세스를 진행할 수 있지만 시간과 돈, 인력 등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여력이 없다. 그래서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대기업과 정부의 적극적 협조와 조력이 필요하다.
정부는 공개된 글로벌 ESG 공시 기준에 따라 심도 있는 관련 교육, 가이드북과 체크리스트 제작 및 배포 등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환경 오염물질 배출 공정과 설비를 친환경 시설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포함한 각종의 개선작업과 R&D 지원 부분을 신설 또는 추가하여 중소기업이 ESG 의무공시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국제통상의 무역장벽으로 작용할 ESG 지표를 수출입 기업이 문제없이 대응하게끔 유도하는 방안으로 ‘AEO’의 활용을 논할 수도 있다. 인증의 공인기준에 ESG 관련 요소를 새로이 삽입하거나 또는 안전관리와 같은 기존 분야를 다듬어 수정‧보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AEO(Authorized Economic Operator)는 세계관세기구(WCO)를 중심으로 국제사회가 채택한 민‧관 협력제도이다. 이 제도는 테러방지 등 안전 문제를 우선적으로 확보하면서 동시에 교역흐름을 저해하지 않기 위한 방안으로 시작했으나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충분히 확대 개편하여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WTO ‘세계 교역 규모’ 자료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우리나라 수출규모는 전년 동기 대비 12% 감소했다고 한다. 반면 같은 자료에 따르면 세계 교역 규모 중 전년 동기대비 수출 감소율은 7.8%이고, 30위권 국가만을 살펴보게되면 수출 감소율은 더 낮아져 7.0%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의 수출 감소율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큰 폭으로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수출로 부를 창출하는 우리에게는 뼈저리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다. ESG 의무공시가 현실화 되면 기술이 아무리 훌륭하여 비교우위에 있더라도 수출을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자칫 이 부분을 소홀히 한다면 나락으로 빠질 수 있다.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프로필] 고태진 관세법인한림(인천) 대표관세사
•(현)경인여자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현)중소벤처기업부, 중기중앙회, 창진원 등 기관 전문위원
•(전)NCS 워킹그룹 심의위원(무역, 유통관리 부문)
•고려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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