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5 (목)

  • 맑음동두천 -6.4℃
  • 맑음강릉 0.6℃
  • 맑음서울 -4.8℃
  • 구름조금대전 -1.2℃
  • 맑음대구 2.7℃
  • 맑음울산 3.4℃
  • 구름조금광주 1.8℃
  • 구름조금부산 4.6℃
  • 흐림고창 0.6℃
  • 흐림제주 7.0℃
  • 맑음강화 -6.2℃
  • 구름조금보은 -2.1℃
  • 맑음금산 -0.7℃
  • 흐림강진군 2.8℃
  • 맑음경주시 2.6℃
  • 구름많음거제 6.0℃
기상청 제공

[김우일의 세상 돋보기]친일매국파 이근택의 면면

(조세금융신문=김우일 대우M&A 대표) 최근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36년간 식민침해를 받았던 우리나라의 정당한 권리주장에 가해자인 일본은 참회는커녕 거꾸로 몽둥이를 들고 공격해 오는 양상이다. 군사력의 대칭성으로 경제력으로 승부를 거는 듯한 인상이다.

 

국제분업의 자유무역주의규칙을 위배하는 무리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주요산업에 필요한 소재, 부품, 장비에 대한 수출규제를 함으로써 한국의 미래산업의 생명을 끊으려는 속셈이 뻔하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의 국권에 관한 대칭성을 비대칭성으로 바꾸고자 하는 노림수이다.

 

전 국민의 대다수가 일본제품 불매운동 등으로 단결하는 와중에 일본의 입장을 두둔, 이해하는 친일성향의 목소리가 야당이나 보수단체에서 SNS를 통해 들려오기도 한다.

 

필자는 이 목소리를 접할 때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75년이 흘러 이제는 선진국대열에 끼웠을 만큼 국권이 신장됐다고 자부하고 있는 터에 아직까지 친일의 잔영이 국민 중 일부에 남아있다는 것이 참 의아했다. 이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본다.

 

첫째는 36년간 일제의 식민통치가 1919년의 삼일독립운동을 기점으로 이전의 무력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되면서 온갖 파렴치한 정신의식세뇌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무력통치는 고작해야 9년에 불과했지만 문화통치는 이후 27년간 집요하고 깊숙하게 우리나라 국민 속에 자리 잡았다.

 

총칼보다는 내선일체, 창씨개명, 한국문화파쇄, 한글사용금지, 사회지도자들을 통한 황국신민 열창 등을 통한 정신개조에 더 힘을 썼기에 그때의 친일성향이 마음속 뿌리 깊게 박혀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신에 의한 식민사상은 쉽사리 못 바꾼다.

 

둘째는 해방 후 친일세력청산을 못하고 거꾸로 친일세력이 정부와 산업계를 도맡아 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한국전쟁 덕에 전쟁의 잿더미에서 부활된 일본의 경제성장이 더욱 친일파들에게 강한 입지를 제공했을 수가 있다.

 

이러한 친일파 성향이 도처에 사회적 혼란을 제공하고 국민의 시야를 흐리는 가운데 필자는 지금까지 역사 중에 최고로 손꼽히는 친일파가 누구이고 그 행동과 생활이 어떠했는지가 궁금하여 필자의 잣대로 비교해보니 이근택이라는 사람이 친일파로는 군계일학이었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을 찬성한 다섯 명의 대신 중 한 사람인데 당시 군부 대신을 맡고 있었다. 을사오적 중 학부 대신 이완용, 내부 대신 이지용 등은 잘 알려져 있지만 군부 대신 이근택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듯하다.

 

그는 1865년 충주 무인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십대 시절에는 일본식군대에 비해 낮은 처우로 차별 받던 구식군대가 일으킨 임오군란으로 명성황후가 이웃마을로 피난 왔을 때 황후를 극진히 보살피고 후에 벼슬을 가지게 된다. 명성황후가 피살된 후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황후의 피 묻은 비단허리띠를 거금에 산 후 고종에게 바쳐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한다.

 

이후 친러파로 고종을 모시며 독립협회를 진압하고 군사와 경찰 부문에서 최고실력자가 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이근택은 친일파로 전향하여 일제로부터 거액의 기밀비를 받고 한일의정서, 을사조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평소 교활하기로 소문났던 그는 테러를 당해 겨우 목숨을 건지는데 이 사건으로 더욱 일본의 신뢰를 받아 거액의 뇌물로 거부가 된다. 일본군사령관과 의형제를 맺고 이토히로부미의 양아들인 양 게다를 신고 일본인행세를 하였다.

 

강제병합 후 그는 합방은사금을 받고 총독부중추원 고문으로 취임, 침략을 돕는 온갖 단체장을 맡으며 친일의 선봉에 섰다. 그의 형제들도 남작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친일로 이름을 떨쳤는데 사람들은 이들 5형제를 5귀(鬼)라 불렀다. 그 후손들도 각각 남작작위를 물려받아 이 집안에는 일본귀족이 6명이나 나왔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이들이 어떻게 죽게 됐나 봤더니 허망하게도 잘 살다 잘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친일 잔영을 하루빨리 지워야 한다. 친일잔영빼기 국민운동을 대거적으로 진행했으면 한다.

 

 

[프로필] 김우일 대우김우일경영연구원 대표/대우 M&A 대표

•전)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

•전)대우그룹 기획조정실 경영관리팀 이사

•인천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

•서울고등학교, 연세대 법학과 졸업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배너




[CEO탐구]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신중의 아이콘 새로운 20년을 설계하다
(조세금융신문=방영석 기자) 교보생명은 삼성생명의 뒤를 이어 한화생명과 생명보험업계 2위사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오너형 생명보험사 중에선 유일하게 빅3 생보사의 대표이사인 신창재 회장은 타 대표이사들과 달리 자신의 경영 철학을 장기간 접목시킬 수 있었던 장점이 있었다. 취임 이후 과감한 체질 개선작업으로 견실한 실적을 거둬들였던 신 회장은 최근 각자 대표체제 전환으로 보험업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편집자 주> 신창재 회장은 보험업계에서 보기 드문 2세 경영자다. 19년째 교보생명을 경영하면서 과감한 체질개선 작업에 착수, IFRS17 도입을 앞둔 상황에서 재무건전성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수익성을 강화하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리스크 축소에 몰두한 신 회장의 행보는 역설적으로 교보생명의 실적 반전을 견인했던 재무적 투자자들과의 갈등을 낳았다. 3월 윤열현 사장과 각자대표 체계를 구축한 신 회장의 차기 행보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신창재 회장은 서울대 의대 졸업 후 같은 대학 의과대학 교수를 지낸 특이한 이력이 있다. 생명보험사 대표이사 중 유일하게 오너 일가에 속한 2세 경영자다. 의대 출신의 신 회장